우리도 노동자이기 이전에 시민
우리도 노동자이기 이전에 시민
  • 권석정 기자
  • 승인 2009.07.0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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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과 함께 하는 것이 진짜 노동조합
수화통역 자원봉사 노동자, 옥쇄파업 현장에서 만나다
쌍용자동차 박정근 기감

<참여와혁신>은 지난 5년 동안 60명의 ‘E사람’을 만났다. 바쁜 노동조합 간부생활로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한 아버지, 그런 상황이 못내 서운하면서도 아버지가 만든 노동조합선전물의 오타를 수정해주는 아들,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으로 인터뷰를 곤란해 했던 이주노동자, ‘나이 없는 날’을 기획한 문화기획가, 뇌병변 장애를 가진 배우 등 우리 주변의 다양한 이웃들이 E사람 코너를 통해 자신들의 속내를 들려줬다.

<참여와혁신>은 창간 5주년을 맞아 지난 5년 동안 만났던 ‘E사람’들 중 한 사람을 다시 만나보기로 했다. ‘낮에는 자동차공장의 노동자로, 밤에는 수화통역사로 활동하는 아름다운 이중인격자’로 소개됐던 쌍용자동차 박정근 기감을 만나러 가는 발길은 무거웠다. 4년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의 직장은 지금 정리해고의 태풍 한 가운데 놓여 있다.

그래서 그를 만나기 위해 찾은 곳도 옥쇄파업이 벌어지고 있는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천막농성장이었다.

박정근 기감을 만나러 갔을 때 그는 부친상을 당한 동료 조합원 문상을 가기 위해 주변 동료들로부터 부의금 봉투를 걷고 있었다. 전남 곡성까지 내려가야 하기에 인터뷰를 서둘러야 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조직’보다 ‘현장’이 우선

옥쇄파업에 참여중인 박 기감은 정리해고대상자도, 노동조합 간부도 아니다. 그런 그가 파업에 참가하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박 기감은 현재 평 조합원이지만 95년부터 2000년경까지 노동조합 집행부로 현장의 제일선에서 활동했었다.

박 기감이 <참여와혁신>과 처음 인터뷰를 했던 2005년 10월은 그가 노동조합 활동에 회의를 느끼고 현장 조직을 막 탈퇴했을 때였다. 당시 “집행부의 기득권과 특권의식에 회의를 느꼈다”던 박 기감은 현장조직 탈퇴 이후 7명의 동료들과 ‘쌍용자동차노동운동혁신위원회’(이하 혁신위)를 만든다.

“혁신위가 추구했던 것은 조합원, 대의원, 활동가 등이 어우러져 자유롭게 토론하고 상층에 집중된 노조의 권한을 분산시킴으로써 살아있는 현장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조직화’가 아닌 ‘현장운동’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혁신위는 노조간부 특권 폐지에 대해 조합원들과 자유토론회를 갖고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등 조합원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활동들을 펼쳤다. 또 평택공장 인근에 있는 이젠텍의 천막농성에 참여하는 등 주변 노동조합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혁신위의 활동은 많은 조합원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한다.

당시 혁신위에서 박 기감과 동고동락하던 동료들 다수가 현재 쌍용자동차 총파업에 참여하고 있다. 정리해고대상이 아닌 박 기감이 옥쇄파업 현장에 있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다.

현장에서 사회로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혁신위 활동에 한창 몰두하던 박 기감은 우연한 계기로 시민사회단체 활동에 눈을 돌렸다.

“밖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고민하던 차에 촛불집회를 보면서 시민의 힘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조합 활동과 병행해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게 됐죠.”

박 기감은 수원촛불, 언론소비자주권캠페인(이하 언소주), 진실을알리는시민(이하 진알시) 등 시민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수원촛불에 모인 네티즌, 학생, 시민사회단체 등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다 보니 다양한 사회영역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매주 문화제에 참가하면서 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그런 논의를 계기로 일제고사 반대 1인 시위 등 여러 활동들을 실행에 옮겼죠.”

인터넷카페를 통해 알게 된 언소주의 경우 ‘댓글’ 다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다던 박 기감은 신영철 대법관 사퇴 1인 시위에 동참했다.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하기 전에도 이미 직장생활과 함께 수화통역사 활동을 병행해온 박 기감은 어마어마한 스케줄을 소화해내기 위해 순환휴직을 신청했다.

일주일, 한 달 단위로 일하고 쉬는 것을 반복하면서 시민사회단체와 수화통역사 그리고 직장생활을 병행해나간 것이다. 시급으로 급여를 계산하는 자동차공장에서 순환휴직은 곧, 반 토막 난 월급봉투를 의미한다. 하지만 박 기감은 “소득은 동료들보다 적었지만 훨씬 알찬 시간을 보냈다”며 웃어보였다.

그러던 작년 11월, 쌍용자동차의 임금지급이 중단되면서 노동자들의 월급이 체불되기 시작했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조립 1팀에 근무하던 박 기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적금 깨는 걸로 시작해서 부모님한테 드리던 용돈도 중단되고, 그렇게 하나하나 중단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에 판매망이 확대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수출이 줄고, 회사에서 말하던 장밋빛 환상이 다 깨졌죠.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데, 억울하죠. 무능한 경영진들, 정부정책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사회적 약자인 우리들만 피해를 봤으니.”

박 기감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회사의 방침에 의해 2월부터 장기휴업에 들어갔다. 당시 졸지에 ‘실업자’가 된 많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대부분 다른 수입원을 알아보기에 바빴지만 박 기감은 오히려 시민사회단체 활동과 수화통역사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수화통역센터에서 상근으로 일하는 아내와 저의 수화통역사 수입으로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대신 생활에 대한 눈높이를 낮춘 거죠.”

휴업 이후 거의 매일을 시민단체 활동과 수화통역으로 보내던 박 기감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무척 행복했다고 회고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옥쇄파업 이후

5월 22일자로 박 기감은 평택공장 옥쇄파업에 가담했다. 박 기감은 파업에 동참하면서 이제껏 해오던 시민단체 활동을 비롯해 오산대학교, 농아인협회 수화강의, 고용안정촉진공단 청각장애인상담 등 수입원이었던 일정들을 모두 취소했다. 아내의 벌이가 유일한 수입원이 된 것이다. 벼랑에 반쯤 몰린 셈이지만 박 기감은 의외로 담담했다.

“전 견딜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쌍용자동차 투쟁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간과 방법에 상관없이 얼마든지 해나갈 수 있습니다.”

박 기감은 “20년 동안 해온 수화활동과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 답답하긴 하지만 노동자로서 이 안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최근에 어떤 분이 제 블로그에 ‘너희들이 매일 파업하니까 평생 노동자로 살지. 이번 기회에 다른 일에 창의적으로 도전해볼 생각은 안하고 파업만 하니까 거기에 얽매이는 것 아니냐’라는 글을 올렸어요. 거기에 대해서 저는 당당히 얘기합니다. ‘난 노동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모든 생산물은 노동자들이 만들고 우리가 세상의 주체다’라고요. 일반인들이 우리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접근해도 저는 당당합니다. 오히려 우리들에게 그런 식으로라도 관심 가져주면 고맙죠. 그것도 다 소통의 시작이니까요.”

박 기감은 노조활동하면서 느끼는 솔직담백한 생각들을 주변의 사람들과 나누기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저와 친한 사람들도 선입견 때문인지 노동조합 이야기를 꺼려해요. 심지어 수화하는 후배들도 내가 조합 이야기하면 ‘형 그거 좀 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수화봉사나 노동조합 활동이나 똑같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인데 말이죠.”

박 기감은 “노동조합에 대한 대중의 생각을 바꾸게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주위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며 “우리 조합원들은 노동자이기 이전에 시민”임을 강조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주위를 돌아볼 줄 아는 노동자가 되고 싶다

박 기감은 예전부터 ‘주위를 돌아보는’ 노동운동을 실천해왔다. ‘1000원+끝전사업’이 대표적인 예다.

“2007년 이젠텍 장기투쟁이 한창일 때 우리 쌍용차 조합원들이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고민했어요. 꼭 몸으로만 때우는 것이 아니라 기금을 모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투쟁기금을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1000원+끝전사업이었다. 매달 기본 천원은 노조투쟁기금으로 적립하고 ‘플러스 알파’인 끝전은 쌍용차조합원 이름으로 소년소녀가장을 돕는 것이다. 박 기감의 이러한 아이디어에 무려 1100여명이 참가했고 매달 100만원이 훌쩍 넘는 기금이 ‘기적 같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천원’들은 이젠텍, 엠에이티 등 다른 투쟁사업장에 지원됐고 ‘끝전’들은 매달 17명의 소년소녀가장들의 급식비로 쓰였다. 이 사업은 임금이 체불되기 전까지 계속됐다.

“요즘 우리 조합원들이 쌍용자동차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서울에서 열리는 굵직한 집회에 200~300여명 단위로 올라갑니다. 저는 그러한 참여활동이 일상화됐으면 합니다. 노동자들이 더 이상 공장에 갇혀있기보다 시야를 넓혀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운동도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어요. 또한, 우리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소중한 임금만큼이나 최저임금제와 같은 제도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그래야만 노동조합에 대한 대중들의 생각도 변할 거라고 생각해요.”

옥쇄파업현장에서 당장 동료들 앞에 닥친 위기만큼이나 노동자들의 ‘의식’을 걱정하는 박 기감. 어쩌면 그는 이상주의자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 공권력이 투입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동료 노동자들의 위상을 생각하는 그에게서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경구가 허세가 아닌 희망, 의지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