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손가락, 자른 손가락 그리고 ‘진정성’
잘린 손가락, 자른 손가락 그리고 ‘진정성’
  • 하승립 기자
  • 승인 2005.06.10 00:00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장 하승립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 차마 손만을 꺼내 주질 못하였다 (박노해 ‘손무덤’ 중)

 

1984년, 여기 한 노동자가 있습니다. 동료 정형의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한 손가락을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원한의 눈물로’ 묻으면서 울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그랬습니다. 손가락이 잘려 나가도 일당 4800원을 받기 위해 다시 프레스 앞에 서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현실에 분노했고, 그런 아픔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투쟁에 나섰습니다.


1986년, 여기 한 대학생이 있습니다. 체포와 투옥, 고문과 분신이 이어지던 그 시절 ‘살아남은 자로서의 수치감, 1남 6녀의 장남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분노와 두려움’에 힘겨워하던 이 대학생은 자신의 손가락을 자릅니다. 그리고 그 피로 태극기 위에 ‘절대 변절하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그 시절에는 그랬습니다.


2005년 오늘, 잘린 손가락을 부여잡고 오열하던 노동자들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고, 자른 손가락으로 변절하지 않겠다던 대학생은 대통령 최측근의 자리에서 비리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요. 분명 그 시절의 ‘잘린 손가락’은 시대의 아픔이었고, 그 시절의 ‘자른 손가락’은 상처 속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그 진정성을 의심할 권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진정성’이 의심받는 현실 속에 있습니다.


적당한 타협에 물들어 가고, 권력의 단맛을 알아가는 이들에게 진정성을 느끼기는 힘듭니다. 노동조합 관료와 정치인들은 이미 너무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아직도 이 땅 ‘낮은 곳’에는 잘린 손가락에 신음하는 노동자들이 존재합니다. 아직도 성실히 일하고도 자식 공부시키기도 버거운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바라건대,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6월호에서는 ‘화이트칼라의 위기’를 집중진단합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기술의 발달로 일과 가정의 경계조차 없어진 채 업무에 시달리지만, 고용조정의 우선순위로 지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현실을 들여다봤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또 본격적 임단협 시즌을 맞아 올 임단협의 특징적 흐름을 점검해 봤습니다. 1사 다노조 사업장의 교섭 구조와 산별노조 문제는 복수노조 시대를 앞둔 고민 지점입니다. 교섭 자체를 회사에 위임하는 경향이 무엇 때문인지도 살펴봅니다. 또 절대악으로 받아들여지던 유연성이라는 명제가 다시 부각되는 속사정도 진단합니다.


더워지는 날씨 속에 <참여와혁신>이 여러분들의 동반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