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를 먹고 자란 원칙은 문화적 충돌도 무색케 한다”
“신뢰를 먹고 자란 원칙은 문화적 충돌도 무색케 한다”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5.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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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HP·후지제록스·AIG손해보험, 잘 나가는 이유 있었네

일본기업인 후지제록스와 미국기업인 한국휴렛팩커드는 비슷한 점이 많다. 두 기업 모두 경실련에서 시상하는 ‘바른외국기업상’을 수상한 경험이 있다. 이 상은 외국기업이지만 한국 경제의 일원으로 뿌리내려 공정거래·고용평등·산업안전·부가가치창출·윤리경영 등에 기여한 기업에 주어지는 상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두 기업 모두 최근 들어 최고의 실적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후지제록스는 지난 한 해 388억의 매출을 기록, 전년대비 216%의 성장세를 보이며 아시아·태평양 지역 본부가 전체 1위를 차지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휴렛팩커드의 경우 1999년 매출이 8971억이던 것이 2004년에는 1조4873억 원으로 뛰어올랐다.


가장 큰 공통점은 생산적인 노사관계가 정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후지제록스는 IMF 때도 인원감축 없이 위기를 넘겼고, 최근에는 3년 연속 무교섭으로 임금협상을 타결했다. HP는 최근 2년의 임금협상에서 보름 정도의 짧은 기간에 협상을 마무리했다.

 

 

 성공 키워드 1.

투명성 보장으로 원칙 지킨다


한국휴렛팩커드 : 인트라넷에 매월 경영정보 공개
한국후지제록스 : 분기별 경영실적 발표
 AIG손해보험 : 주주에게 공개하는 애뉴얼리포트를 전직원 공유

임금협상에서 노사모두 생산성을  기준으로 인정


두 기업의 노조 모두 임금협상을 빠른 시간 안에 끝내기로 유명하다. 임금협상에 대한 노사의 기준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후지제록스의 경우 매월 기업의 재무제표와 경영실적을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공개한다.


이 회사 노동조합의 이호성 위원장은 “평직원들이 대표이사만큼 경영실적을 알고 있기 때문에 회사가 거짓말을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직원들도 어느 정도의 임금인상이 적당한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노사관계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총무부 김인성 부장도 같은 생각이다. “정보가 투명하고 평등하게 공개되니까 중간간부들이 정보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는 오해 같은 게 없고 서로가 합리적 기준을 공유할 수 있어요.”


휴렛팩커드도 3개월에 한 번씩 전 구성원에게 분기별 경영실적을 공개한다. 임금협상의 기준은 경영실적과 성과다. 노동조합의 문제남 위원장은 “노동조합이 생산성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자료가 공개되고 이 자료를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보통 우리기업 노조가 생산성에 기반한 협상이 회사 논리인 것처럼 오해하게 된 것은 노조가 생산성을 기준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회사가 제시하는 경영 자료를 못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 문 위원장의 설명이다.

 

 

 성공 키워드 2.

사전 정보공유로 격차 축소


   한국휴렛팩커드 : 월 1회 노사대표 정례미팅
점심식사 후 노조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는 임원
  한국후지제록스 : 임금협상 전 사전협의

직원, 간부, 현장관리자 간의 토크 플라자
AIG 손해보험 : 월 1회 노사대표 정례미팅 실무자간 수시 미팅


신뢰에 기반한 신명나는 직장 문화 정착


                  

올해 최단 시간 내에 임금협상을 마무리한 외국기업에는 미국계 손해보험회사인 AIG손해보험도 빼 놓을 수 없다. 이 회사의 경우에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평소에 서로 간의 의견 격차를 줄일 수 있었다. 노동조합위원장과 인사담당 상무가 거의 매일 만나 현안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사장과 노동조합 위원장도 한 달에 한 번 정례 미팅을 갖는다.


경영진과 노조 간의 일상적 정보공유는 휴렛팩커드와 후지제록스에서도 마찬가지다. 후지제록스는 월 1회의 노사대표 정례 미팅 외에도 임단협 전에 사전교섭을 통해 교섭기간을 단축한다. 사장이 연 2회 노조 대의원대회에 참석해서 경영 실적과 환경을 설명하기도 한다. 또 현장 직원 중 150명을 선발해 경영진과 직장생활의 고충을 나누는 ‘토크 플라자’를 개최하고 생산공장 별로도 ‘소규모 토크 플라자’가 있다.


휴랫팩커드는 노동조합이 분임조 활동비용을 지원한다. 노동조합 최동군 수석부위원장은 “노사간의 의사소통 채널뿐만 아니라 구성원들 간의 의사소통도 활발해져야 ‘신명나는 직장문화’를 만들 수 있다”며 “구성원들이 조합원이기 이전에 직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공 키워드 3.

기업 경쟁력의 원천임을 자임하는 노동조합


한국휴렛팩커드 : 노동조합은 회사의 비즈니스 파트너
한국후지제록스 : 경영의 파트너로서 대표성 확보
 AIG손해보험 : 노동조합은 회사 정책의 대안세력


직원 삶의 질과 회사 경쟁력을 동시에

 

삼성의 계열사였던 삼성HP와 컴팩의 합병으로 탄생한 한국휴렛팩커드는 합병 당시만 해도 삼성의 무노조 정책에 익숙했던 삼성HP 경영진과의 불신이 있었다.

 

하지만 HP 본사는 ‘개인이 성장해야 회사도 성장한다’는 원칙 하에 노동조합이 직원들의 사기와 고충처리 등의 문제를 좀 더 잘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노조도 이에 화답했다. 현재 HP노동조합의 설립 목적에는 ▲ 신명나는 일터 형성 ▲ 직원의 인격과 가치를 존중하는 기업문화 창출 ▲ 회사의 진정한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역할 등이 명시되어 있다. 후지제록스 노동조합도 ▲ 경영의 파트너로서 대표성 확보 ▲ 경영성과 창출 노력을 통한 조합원 권리와 복지 증진 ▲ 조합원의 삶의 질 향상을 ‘미션’으로 제시하고 있다.


AIG손해보험 노조의 김홍헌 위원장도 “노동조합이 회사의 정책과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대안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공 키워드 4.

사라지는 편 가르기


    한국휴렛팩커드 : 조합을 신뢰하는 직원, 경영진을 신뢰하는 노조
  후지제록스 : 조직의 발전을 위해 긴장감을 불어넣는 노조
AIG손해보험 : 노동조합이 회사 발전의 균형추


세 기업의 경영진들은 노동조합을 선의의 경쟁자, 또는 직원들의 목소리를 더 가깝게 듣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한국에서 노측, 사측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왜 그렇게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 회사에는 노동조합 편, 회사 편이 없다.

 

우리는 모두 AIG편이고 AIG이즘의 창출을 위해 노력한다” (AIG 손해보험 게리 사장). “우리가 훌륭한 노사문화를 만들 수 있었던 데는 노동조합의 도움이 가장 크다.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신뢰하고 노동조합이 경영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한국 휴렛팩커드 임광동 부사장). “노동조합은 회사 발전을 위해서 ‘긴장감’을 불어 넣어주는 조직이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만 가는 조직은 별로 훌륭한 조직이 아니다. 모두가 ‘Yes’해도 소신 있게 ‘No’할 수 있는 노동조합, ‘강성’ 노동조합이 아니라 ‘강한’ 노동조합은 회사 발전의 핵심이다” (후지제록스 정광은 사장).

 

 성공 키워드 5.

눈치보다는 원칙을


신뢰와 동반자의식 성장, 불필요한 힘겨루기 해소

 

이들 기업에는 노사가 ‘내부 이해관계’의 눈치를 보느라 힘을 빼는 일을 대폭 줄였다. 올해 노동조합 위원장과 사장이 ‘독대’로 임금협상을 마무리 지은 AIG노동조합의 김홍헌 위원장은 “교섭단이 꾸려지면 일단 교섭 대표들 간에도 눈치 보기가 심하다”며 “회사 교섭 대표들도 각 부서의 눈치를 보고, 노조 대표단도 마찬가지여서 교섭기간이 쓸데없이 길어지기도 해 새로운 시도를 해봤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경우 한 사람의 ‘전횡’을 막을 수 없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노조위원장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데는 조합원들의 그만한 신뢰가 있었다. 김 위원장은 노사관계가 제대로 가려면 노사 간의 신뢰뿐만 아니라 조합간부와 조합원 간 신뢰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후지제록스의 노사도 무교섭으로 가기까지 진통이 많았다. 교섭을 하지 않으면 뭔가 ‘뒷거래’가 있을 것이라는 조합원들의 불신과 ‘어용시비’까지 겹쳐서 노사 모두가 초기에는 꽤나 진통을 겪은 편이다. 하지만 투명성과 신뢰가 쌓이기 시작하면서 이런 불신도 점차 가라앉았다.


이처럼 생산적 노사관계가 자리잡은 외투기업의 경우 ▲ 투명성과 정보공유 ▲ 노동조합의 기업가 정신 ▲ 편 가르기 배제 ▲ 눈치보다는 원칙 우선 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외투기업 노사관계 악화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한국적 노사문화와 외국문화의 충돌’은 적어도 이 세 회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뢰를 먹고 자란 원칙’은 문화 충돌을 충분히 뛰어넘게 해준다는 게 이들 노사의 공통된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