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에서 ‘좋은’ 일자리 만들자
중소기업에서 ‘좋은’ 일자리 만들자
  • 승인 2004.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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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들어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건물에는 ‘일자리 10만개, 중소기업이 만들겠습니다’라는 대형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그러나 유례없는 일자리 대란을 겪고 있는 구직자들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취업포털 ‘잡링크’가 지난 6월 1일부터 7월 5일까지 신입구직자 2,54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구직자의 30.8%가 대기업, 23.5%가 공기업을 선호했으며 외국계기업이 22.4%로 뒤를 이었다.
일자리 만들겠다는 중소기업, 중소기업은 못가겠다는 구직자, 신규채용 계획이 없다는 대기업. 일자리 대란만큼이나 일자리를 둘러싼 ‘동상이몽’도 심각하다.

 

외환위기를 전후해 대기업의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줄면서 중소기업 중심으로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위기 극복 과정에서 구조조정 대상이던 30대 대기업 집단에서는 약 23만개, 공기업 5만개, 금융업에서 5만개의 일자리가 줄어 총 33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반면 중소-벤처기업의 일자리는 1997년에 비해 2002년 기준으로 약 16만개 이상 늘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04년 5월 현재 우리나라 전체 중소기업은 195만개, 고용은 1039만명으로 전체 고용의 86.7%를 차지하고 있다. 고용비중을 볼 때, ‘일자리 없는 성장’의 해결책이 중소기업 육성에 있다는 주장은 언뜻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대기업의 ‘좋은’ 일자리가 직접적으로 중소기업에 흡수됐다는 증거는 없다. 금융연구원의 신용상 박사는 “대기업에서 사라진 일자리들은 대부분 해외로 옮겨갔다”며 “중소기업 고용비중이 압도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중소기업 경영난이 심화되면서 이들마저 일자리 창출력을 잃고 있다”고 지적했다.

 

굳어지는 ‘나쁜 일자리’ 양산 구조
문제는 이러한 일자리 위기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과거 우리경제는 수출증가=내수증가의 공식이 잘 먹혀 들어가는 구조였다. 중소기업의 67%가 대기업에 부품이나 소재를 납품하는 구조에서 수출 증가는  곧 내수경기를 떠받치는 중소기업에게 ‘호시절’을 의미했다.


그러나 수출구조가 IT산업 위주로 재편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IT산업은 부품과 설비를 대부분 수입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기업의 해외 이전과 글로벌소싱 증가는 납품 중소기업의 동반진출을 수반하거나 그나마 있는 일거리마저 앗아가고 있다.


일자리 창출력이 큰 내수 및 경공업 위주의 중소기업은 침체되고 대기업 위주로 수출과 성장이 주도되면서 고용시장 불안이 가중되고 있는 것이다.
일자리의 ‘양’만 문제가 아니다. 중소기업 채산성 악화는 곧바로 일자리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지난 4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중소기업 CEO 336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답변업체의 35.7%가 임금을 체불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소기업 일자리는 ‘나쁜 일자리’의 대명사가 됐다.

 

 

상전 눈치 보느라 기술투자 뒷전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양극화 질주에 제동을 걸 브레이크는 과연 없을까. 일선 현장의 중소기업인들은 불공정한 하도급 구조 개선을 우선적 과제로 꼽는다.
현재 48개 대기업이 2633개 중소기업과 하도급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2, 3차 하도급 업체까지 포함하면 대기업과 종속관계를 맺고 있는 중소기업은 최소 10만여 개 (전체 중소기업의 67%)에 달한다. <박스기사 참조 : 제조업 하도급 실태>


문제는 대-중소기업 간 관계가 대부분 수평적 협력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하청관계라는 점이다. 중소기업연구원의 송장준 박사는 “하도급 구조의 정점에는 여지없이 대기업의 횡포가 있다”면서 “대기업에서 떨어뜨린 물방울 하나가 2차, 3차 하청 구조를 거치면서 중소기업을 집어삼킬 무서운 폭풍우로 번진다”고 지적한다.
불공정 하도급 구조→ 중소기업 채산성 악화→ 기술 및 인재개발 불가→ 중소기업 경쟁력 약화→ 일자리의 양과 질 하락의 악순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현장 경영인들이 체감하는 파급효과는 더 크다.


이동통신 부품생산업체인 S전자(재직 노동자 30명, 매출규모 100억원)는 최근 들어 원재료가는 20% 인상됐는데도 납품가를 15% 인하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이 회사 사장 L씨는 “대기업 스스로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합리화를 도모할 문제를 원재료가 인상, 납품가 인하 압력으로 풀려는 것은 장기적으로 양사 모두의 경쟁력을 갉아 먹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D공업 관계자는 “원청기업에서 납품가격을 맞추지 않으면 수입으로 부품을 조달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면서 “공장 문 안 닫으려면 손해 보면서 납품하는 수밖에 없다”고 울상을 지었다.

 

중소기업 기술지원 현실화해야
소재-부품산업의 기술을 높여 국산화율을 높이면 수출과 내수의 양극화는 물론 대기업-중소기업의 격차도 좁힐 수 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오는 2008년까지 OECD 기준에 맞는 고부가가치 중소기업 1만 개를 발굴한다는 계획으로, 이른바 ‘이노비즈(Inno-Biz)’로 불리는 기술혁신형 중소기업 육성사업을 확대했지만 선정기준과 지원절차를 놓고 원성이 높은 실정이다.


자동전압조정기를 생산하는 S시스템은 올해 초 이노비즈 기업으로 선정됐지만 보증기관에서 담보요구, 대출한도 기준을 종전과 동일하게 적용해 추가 신용보증 불가를 통보해 왔다. 이 회사의 사장은 “이노비즈 기업 선정 공고시에는 기업규모와 관계없이 기술력으로 보증한도를 설정한다고 해 놓고 실제로는 매출액 위주의 심사가 여전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기술혁신만이 중소기업의 살 길이라는 목소리는 높지만 현실 여건이 별로 뒷받침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연구원의 주현 박사는 “지금처럼 중소기업의 기술력이 낮은 상태에서 중소기업-대기업 상생 주장은 결국 대기업의 ‘시혜’를 의미할 뿐”이라며 “시혜가 아닌 협력을 위해서는 단기적 자금지원보다 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한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공동화 대책, 머뭇거릴 때 아니다
산업공동화에 대한 정부의 안이한 인식에도 비판이 쏟아진다. 일선 현장에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까지 모두 해외로 이전하는 ‘일자리의 대지진’이 일어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터치스크린을 생산하고 있는 I테크놀로지는 종업원 규모 20명의 소기업이지만 국내에서 2건의 특허를 획득하고 미국특허 1건을 출연중이다. 하지만 이런 기술을 전수할 인력이 없어 고민이다. 회사 관계자는 “중소기업 기피현상이 계속되면 결국 인력난 걱정이 없는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모기업이 이미 중국으로 이전한 기업들의 어려움은 더하다. 신도리코에 케이블을 납품하고 있는 K일렉트릭의 관계자는 “신도리코가 중국 청도 등 해외로 이전함에 따라 납품 중소업체들의 큰 피해가 예상된다”며 “일본은 자국 기업의 중국진출로 공동화현상이 나타나자 역으로 한국업체 유치를 위해 과감한 지원책을 선보였는데 우리는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실제로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제조업의 해외이전 계획도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 4월 기업은행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대상 중소기업 391곳 중 절반(51.2%)이 ‘1~2년 내에 해외로 진출하겠다’고 답했다. 또 해외 진출 시기를 3~5년 내로 잡고 있는 중소기업도 29.1%에 달해 조사대상 중소기업의 80.3%가 5년 내에 해외 진출을 결심하고 있는 셈이다.

 

소기업 강국의 공통점
지난 2000년 OECD 13개 국가를 대상으로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의 경제활동 전환 효과를 비교한 결과 가장 높은 성장률을 달성한 나라는 소기업으로의 경제활동 이전이 가장 활발했던 나라들이었다.


중소기업 육성에 성공한 이들 선진국들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간 경쟁-협력 관계(일본) ▲중소기업 자생력 강화를 위한 제도적 지원 (독일) ▲산업별 접근 방식이 아닌 클러스터별 접근(핀란드) 등이다. 특히, 일본과 핀란드에서 대-중소기업 관계는 단순한 하청관계가 아니라 자본, 자금, 기술, 정보 등을 공유하는 상생관계다. 모기업 제품의 설계단계뿐 아니라 모델 구상에도 참여하는 중소기업 경쟁력은 튼튼한 산업 연관 구조를 낳았다.


7월 발표된 중소기업 육성 종합대책을 비롯해서 그간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인 중소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대책은 지나치게 많을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일선의 경영자들은 여전히 대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김용구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회장은 “이번 대책은 과거 보호 위주의 보편적 지원방식 보다 진일보 했지만 지원의 직접적 수요자인 중소기업의 자발적 참여 방안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특히 대기업 납품단가 인하 및 비용전가 문제는 중소기업 생존과 관련된 긴급한 것인데 이에 대한 대책은 거의 없다”고 꼬집었다.
김회장은 “대-중소기업간 공정거래 촉진, 협동조합 활성화, 소외기업에 대한 효율적 지원방안 및 정책대안 강구”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일자리 창출의 중심은 노사
기술혁신을 위한 지원이 정부의 몫이라면 일자리 창출의 중심에는 경제주체인 노사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난 2월 체결된 일자리 만들기 노사정협약의 55개 항목에는 ▲대기업의 하도급 단가 현실화 및 적기 지급 ▲자체 인건비 부담 하도급 업체 전가 금지 등의 합의가 포함됐다. 노사가 공동으로 중소기업 문제에 목소리를 낸 최초의 사례다.


민주노총 금속산업노사는 올해 중앙교섭을 통해 ‘산업공동화로 인한 국민경제 위축과 고용불안을 타개하기 위한 노사공동 연구팀 구성’에 합의했다.
또 민주노총은 지난 7월 12일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에 ‘산업공동화로 인한 고용불안과 산업기반 붕괴를 막기 위한 정부차원의 제조업 육성정책’ 마련을 촉구하기도 했다. 금속노조의 김성혁 조직국장은 “원청노조에서 회사의 불공정 거래 여부를 감시하고 하청 노동자들의 최소임금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등 의미 있는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노총 화학노련의 임준택 정책국장은 “몇 년 전만 해도 성과급 등 분배중심 요구가 대부분이던 임단협 경향이 최근 들어 고용 문제로 전환되고 있다”면서 “대기업 노사가 임금을 깎네 마네 하는 논쟁에서 벗어나 사회적 연대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선진국에서 이런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대기업의 노사가 나서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교육기구를 구성하고 지역사회가 이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위스컨신 지역의 ‘제조업 강화 프로젝트’는 우리 대기업 노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관련기사 24면>
이 지역에 일어난 변화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단가 인하의 수단이 아니라 생산성 향상의 파트너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대기업이 나서서 하청업체들의 공정을 현대화하고 생산성과 품질, 납기 및 비용을 챙긴 결과 완제품의 품질 향상과 하청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았다. 그 결과 중소 제조업을 중심으로 ‘질 좋은’ 일자리가 생겨났다.


우리 대기업은 비용 절감을 통한 경쟁력 향상으로는 더 이상 급변하는 경제환경에 대처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대기업 노사가 인건비 등 비용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동안 대기업의 경쟁력은 조금씩 금이 가고 중소기업 노동자의 삶은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납품단가 인하와 인건비의 전가로 경쟁력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 기술력 향상으로 승부해야 한다.


한국노동연구원 전병유 박사는 “산업진화와 고용의 선순환 관계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일자리 창출의 주체인 노사가 경쟁력과 일자리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대타협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지금 우리 경제는 ‘일자리 없는 성장’의 구원투수인 대기업과 노동운동의 역할을 주목하고 있다.

 

제조업 하도급 실태


최근 산업연구원과 산자부가 공동으로 조사한 ‘한국제조업의 하도급 실태’ 보고서는 하도급 관계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하도급업체의 거래구조는 단품 수발주가 50% 내외로 가장 많았고, 모듈화(시스템화) 수발주, 유니트 수발주 등 선진적 발주 형태는 매우 낮게 나타났다. 이는 하도급 중소기업의 기술력이 일천함을 나타내는 지표다. 특히 하도급업체 중에서도 부품·소재기업의 모듈화 수발주 비율은 9%로 매우 낮게 나타났다. <그림1>
부품업체의 설계참여도는 전체 응답기업의 70%가 참여도 20% 이하로 대-중소기업간의 기술 공유, 보완 관계는 매우 낮게 나타났다.
주거래기업과의 관계에 관한 조사에서는 부품기업의 62%, 조립기업의 57%가 비교적 협력적이라고 답했다. 부품기업이 조립기업에 비해 협력관계에 대한 평가가 높은 것은 그만큼 부품기업의 대기업 의존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위업체와의 거래시 불만 요인 1순위로는 ‘지나친 단가인하 요구’(57%)가 꼽혔다. 이어서 ‘지나치게 까다로운 제품 요구 조건’(13%) ‘대급지급 방법’(7%) 이 뒤를 이었다. <그림2>
거래 성공요인은 ‘상호신뢰와 의사소통을 통한 팀워크’ (부품기업 55%, 조립기업 66%), ‘비용수익의 분담’ (부품기업 21%, 조립기업 13%) 순으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를 지휘한 산업연구원의 강두용 박사는 “하도급 자체는 분업 구조라는 측면에서 불가피하며 긍정적 요인이 많다”면서 “협력적 하도급 관계가 성립되려면 자원과 인력, 기술의 대기업 집중을 해소해야 한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