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의 터널 벗어나 다시 ‘꿍따리 샤바라’ 외치는 방송인 강원래
좌절의 터널 벗어나 다시 ‘꿍따리 샤바라’ 외치는 방송인 강원래
  • 박석모 기자
  • 승인 2009.08.04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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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불편한 게 아니라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할 뿐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은 여전히 춤…꿍따리 유랑단 이끌고 세계 공연 떠나고파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땐 산으로 올라가 소리를 한 번 질러봐 나처럼 이렇게 가슴을 펴고 꿍따리 샤바라 빠빠빠빠”

해마다 여름이면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꿍따리 샤바라’의 첫 구절이다.
이 노래가 처음 나오던 96년 여름 무렵엔 누구나 줄줄 외고 다녔더랬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그때는 군대에서도 ‘꿍따리 샤바라’에 맞춰 삽질을 했다. ‘꿍따리 샤바라’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주문이었고 힘든 일도 흥겹게 해줬다. 단 한 곡만으로도 듀엣 ‘클론’은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강원래와 구준엽이라는 두 명의 걸출한 춤꾼들이 무대에 오르면 한바탕 신명나는 춤판이 벌어지곤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강원래는 사고와 함께 무대를 떠났고, 지금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에 서 있다. 그를 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못 걷는다고? 설마~

“꿈이요? 그런 건 없었어요. 그때는 그냥 욕심이었죠. 이번 앨범이 대박 나고, 가요프로그램에서 1위 하고,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는 것이 목표고 욕심이었지 특별히 꿈이 있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은 없어요.”

‘꿍따리 샤바라’가 한창 히트하던 시절, 하루 동안 부산에 두 번 내려갈 정도로 빡빡한 일정 속에서 꿈을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그에게 꿈을 꾼다는 것은 불필요했을 수도 있다. 당시 그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미래를 꿈꿀 여유도 없이 하루하루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2000년 11월 9일. 한창 잘 나가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사고가 닥쳤다. 갑작스런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것. 이 사고 후 강원래에게는 휠체어가 발이 됐다.

“그때의 심정은 계속 ‘설마’였어요. ‘설마 내가 못 걷기야 하겠어?’ 하고 생각한 거죠. 돈도 좀 벌어놨으니 외국 가서 수술 받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병실에 있을 때 아버지가 왜 오토바이를 탔냐고 그러시더군요. 그래서 ‘알았어요. 이제 안 탈게요’ 그랬어요. 완쾌되고 다시 걷게 되리라고 생각한 거죠.”

처음 사고가 났을 때 다른 보통사람처럼 그도 자신에게 다가온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현실을 부정했다. 이듬해인 2001년 3월까지도 그랬단다. 그러다가 서서히 자신이 당한 사고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이번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처음엔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고 욕도 많이 했다.

“처음 병원에 가서 수술대에 누웠을 때 간호사가 저를 알아보고 사인을 해달라기에 해줬어요. 수술 받고 나서 중환자실 갔을 때도 다른 간호사가 사인을 받겠다고 했죠. ‘예, 강원래입니다’ 하면서 사인을 해줬죠. 그런데 얼마 있다가 간호사가 와서 ‘어머? 강원래 씨 똥 쌌네’ 하는 거예요. 그러고는 간호사 둘이 더 와서 내 다리를 들고 똥을 치우는 거야. 손에 잡히는 것은 다 집어 던졌어요. 그러니까 이번엔 침대에 아예 묶더라고요. 그래도 욕은 계속 했어요. 입은 풀려 있으니까.”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욕설은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러다가 ‘이제 죽을 때까지 못 걷는다’는 말을 들었다. 한창 잘 나가던 그에게 더 이상 못 걷는다는 말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좌절이었다. 직접 겪어보지 못하고는 절대 알 수 없는 고통이기도 했다. 그는 그 고통과 좌절을 분노로 표출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그는 무던히도 간호사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유리창만 7장을 깼다.

“처음 사고를 당하게 되면 4가지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가장 처음은 부정하는 겁니다. 저처럼 설마 하고 생각하는 거죠. 그 다음 나타나는 것은 분노에요. 그게 콤플렉스 때문인데, 자기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없고 약하다고 생각하니까 행동은 거꾸로 세게 나가는 거죠. 저라고 특별했던 것은 아니에요.”

그는 요즘도 강연을 하면서 중도장애를 겪는 이들이 거칠게 행동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라고 이야기한다. 앞으로 걷지 못하게 되고 보지 못하게 되는데 그걸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고 괜찮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 그러면서 다른 이들도 다 그런 과정을 거친다고 위로하는 것이다.

한때 강원래 씨는 자신의 미니홈피에 욕설로 댓글을 달았다가 구설수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그는 그걸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잘못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한다. 당시 그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이런 자료가 남아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어떤 애가 제 미니홈피에 들어와서 ‘강원래 씨의 장애를 이해할 수 있어요. 저도 무좀이 심해요’라며 응원의 글을 남겨요. 그런 글을 보면 화가 치밀었어요. 그래서 댓글에다 이렇게 쓴 거죠. ‘그래? 그럼 발가락 10개 다 잘라. 그러면 내 심정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거야’라고. 그때는 그게 솔직한 제 심정이었어요. 그때 제가 ‘감사합니다. 무좀 치료 잘 하세요’라고 댓글을 남겼다면 구설수도 없었겠죠. 그런데 그게 잘한 걸까요? 만약 거기서 제 심정을 숨겼다면 아마 제가 더 힘들어졌을 겁니다.”

그의 이런 직설적인 표현은 미니홈피뿐만이 아니다. 한 번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만들 때 모 장애인단체에서 일일호프를 하는데 그를 초청한 적이 있었다. 주당들을 데리고 가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사회자가 귀빈 소개를 한다면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더란다. “오늘 장애인 같지 않은 장애인이 한 분 오셨습니다. 사실 장애인이라고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강원래 씨입니다.” 소개를 받고 무대에 올라간 그는 소위 ‘오바’를 했다. “장애인 차별 금지하자면서 왜 나는 차별합니까? 내가 장애인이 아니면 누가 장애인이라는 거죠?”

휠체어 타고 춤춘 ‘똘아이’

이토록 분노하고 절망했던 강원래 씨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우리 옆에 서기까지 힘들지는 않았을까? 의외로 그는 그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제가 사회에 다시 나오기까지 1년 반이 걸렸어요. 제가 분노하고 좌절하기는 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모습으로 사회에 나오는 것이 쉬웠던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연예인이었기 때문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죠. 장애인이 세상에 나오기 어려운 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이에요. 제가 옷 사러 동대문에 갔더니 몸도 불편한데 왜 나왔냐고 물어봐요. 그런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움츠려드는 거죠. 하지만 저는 이미 연예인으로 생활하면서 그런 시선을 경험해봤잖아요. 두려움이 덜했던 겁니다.”

그를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내 김송 씨의 헌신적인 사랑과 친구 구준엽의 우정은 여러 차례 보도되기도 했다. 그와 같은 처지였던 장애인들의 도움도 컸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도움이 당시 세브란스 재활병원장의 “강원래 씨에게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 한마디였다. 그가 재활병원장에게 “다시 걸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기적은 아니고 휠체어 타고 춤출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단다.

“처음엔 제 스스로 휠체어 타고 춤추면 진짜 ‘똘아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절대로 그 일은 못하는 겁니다. 제가 가진 편견 때문에 제가 더 힘들었던 것이죠. 하지만 결국 그 말을 들은 지 딱 4년 만에 휠체어를 타고 춤을 췄다는 것이죠.”

ⓒ 꿍따리 유랑단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불편하다

춤 얘기가 나온 김에 강원래 씨에게 춤이 어떤 의민지 물었다. 별 망설임 없이 ‘가장 잘하는 것이고 유일하게 칭찬 받았던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가 중학교 때 마이클 잭슨이 추는 ‘문워크’를 보고 따라서 연습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하루 만에 되더란다. 학교에서 그걸 보여줬더니, 아이들이 열광하더라고 이야기하는 그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그 전까지는 한 번도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나.

“저는 지금도 음악 나오면 신나요. 클럽에 가서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춤추는 걸 보면 같이 움직이고. 그들보단 내가 춤을 잘 추는데 그런 생각이 있어요. 거기서 제가 포기하진 않으니까요. 그런 문화를 계속 보면서 지식이 쌓여가고, 제가 안무를 짤 수 있고 구성할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춤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강원래 씨는 요즘 라디오 DJ로, ‘클론 댄스 스쿨’의 대표이자 안무가로, 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겸임교수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다. 교통사고는 그에게 하반신마비라는 장애를 가져다주었지만,  그는 그것을 극복하고 이제 생활인으로 우리 곁에 섰다. 작년부터는 ‘꿍따리 유랑단’을 결성해 전국의 소년원이나 교도소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데 장애가 불편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문을 던졌다. 이내 현답이 돌아온다. 장애인들이 불편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불편하다는.

“우리 휠체어 탄 사람들끼리 이야기 많이 해요. 왜 장애인을 불편하다고 생각할까? 왜 멀리 할까? 제가 장애 때문에 화가 나면 제일 많이 하는 얘기가 ‘난 죄 지은 것도 없는데’라는 말이에요.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장애인을 죄인 취급하고 불편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옮는다고까지 생각하는 시선이 불편한 거죠. 못 날아서 불편하세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날아다니면서 못 날아서 불편하냐고 물어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거하고 똑 같아요. 못 걸어서 불편하냐고 묻는 것이 짜증나고 불편할 뿐이에요.”

이런 그에게 최근 꿈이 생겼다. 이전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많지 않았다는 그는 최근에 꿍따리 유랑단을 이끌고 죄수들을 만나고 소년원 아이들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관객을 위한 ‘쇼’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단다.

내친 김에 그는 꿍따리 유랑단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었고(책은 8월쯤 나올 예정이다), 이제는 뮤지컬로 만들어보고 싶단다. 무대 위를 휠체어에 앉아 날아다니는 ‘판타스틱’한 뮤지컬을 만들어보겠다는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꿍따리 유랑단이란 공연으로 세계 공연을 떠나는 것이 꿈이에요. 그런 욕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어요. 장애인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직업이에요. 그들은 이런 것을 부러워해요. 솔직히 제가 특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단지 예전의 강원래로 돌아온 것뿐이에요. 예전보다 수입은 적어졌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좋은 것이죠.

장애인들에게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직장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직업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더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는 요즘 매일 단원들에게 꿈 한 번 이루자고 다그친다. 죽기 전에 자신이 가진 꿈을 꼭 이루고 싶기에.

그는 얼마 전 다섯 번째로 시험관아기를 시도했다. 여러 번 기대와 실망을 반복했다. 그는 “지금 젊었을 때 우리를 닮은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때까지 도전해보자는 게 아내의 생각”이었단다. 요즘은 특별히 욕심은 없다지만 그가 조만간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길 기대해본다.

ⓒ 꿍따리 유랑단
어느 날 법무부 직원이 강원래 씨를 찾아온다. 보호관찰을 받고 있거나 소년원 생활을 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장애인들로 구성된 문화공연을 준비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강원래 씨는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를 되뇌며 팀을 구성하고자 끼 있는 장애인들을 뽑는 오디션을 진행한다. 그 오디션에는 한 손 마술사, 한 팔 없는 무에타이 챔피언, 안면장애 가수 등 장애인들이 나와서 자신의 장기를 펼쳐 보인다. 마지막으로 등장했던 모든 이들이 ‘꿍따리 샤바라’를 하면서 막이 내린다.

‘꿍따리 유랑단’과 함께하는 신나는 예술여행의 줄거리다. 강원래 씨는 꿍따리 유랑단 구성을 위해 라디오 DJ를 하면서 눈여겨봤던 장애인들을 불러모았다. 충분히 끼를 가지고 있음에도 장애의 벽에 가로막혀 빛을 보지 못했던 이들이 그렇게 모였다. 이 공연을 연출한 기홍주 씨도 당뇨병 때문에 시력을 잃은 시각장애인이다.

“사실 단원들이 연기를 무진장 못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감동적이죠.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연했을 땐 앞줄에 앉아 있던 머리 희끗희끗한 죄수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요. 관객들이 감동하는 게 배우들이 실제 자신의 이야기로 오디션을 보러 온다는 것 때문인 것 같아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바닥에서 휠체어에 올라앉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줘요. 그걸 보고 눈물을 흘리는 거죠.”

네 꿈을 펼쳐라

실제 배우로 출연하는 안면장애 가수 심보준 씨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또래 아이들의 놀림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소년원에서 공연할 때 인터뷰했던 원생이 공연을 보기 전에는 “불쌍하다”고 하더니 공연을 보고 나서는 “꿈이 없는 제가 불쌍해 보이네요”라고 답하더란다. 놀렸던 자신들은 바닥에 앉아 있고 놀림 받던 보준 씨는 자신들보다 높은 무대 위에서 멋진 꿈을 펼쳐 보이더라는 것이다.

꿍따리 유랑단은 지난해 4월 결성돼 6월부터 법무부의 후원을 받아 전국의 소년원과 보호관찰시설, 구치소 등을 돌며 공연을 펼치고 있다.

강원래 씨는 이 공연을 통해 ‘꿈과 희망을 잃지 않으면 기적을 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꿍따리 유랑단 하면서 저도 많이 바뀌고 있고 단원들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진짜 우리가 뭔가를 보여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됐죠. 이젠 단원들도 계속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 친구들이 정말로 잘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