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분노에 눈감는 어른들
아이들의 분노에 눈감는 어른들
  • 김종휘 하자작업장학교 교사
  • 승인 2005.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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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짓말’과 ‘방법 없음’을 알고 있다

김종휘
하자작업장학교 교사
최근의 언론 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지금 폭발 직전의 아노미 상태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진회 사건으로 학내의 경찰 상주 등 강경한 대책 위주로 흐르던 사회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교육부의 대입 내신 강화 방침과 서울대 등 소위 명문대들의 논술형 본고사 방침 사이에서 방황하는 고등학교 1학년 이하 청소년들의 절규와 분노가 첫 번째이고요, 학교의 강제적인 두발 제한 조치 때문에 머리칼이 흉측하게 밀리거나 처벌을 받은 청소년들의 집단적 반발이 두 번째입니다.


두 가지 사건 모두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도심의 청소년 촛불집회로 이어지고 있는 모습에 기성세대의 마음도 착잡하게 하는 것 같더군요. 아니 착잡하다는 표현보다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예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냥 당황하고 있는 눈치라고 해야 정확할 것 같군요.


 
정부도 학교도 가정도 ‘갈팡질팡’

 

솔직히 교육부의 관료를 비롯해서 일선 학교의 교사들은 물론이고 각 가정의 부모들조차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어떤 입장이든 일관되게 주장하고 합리적으로 방법을 강구하는 어른들이 거의 없어 보이니 정말 큰 문제입니다. 


정부와 대학의 상이한 대입 방침에 분노하는 부모들도 학교의 두발 제한에는 찬성하는 편이라고 하더군요. 머리 기르고 하다보면 내 자녀가 공부에 전념하지 못 할까봐 제한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는 것이지요. 같은 논리로 체벌도 찬성하게 되지 싶네요.


교육부는 내신 강화 방침의 본래 뜻을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해명과 홍보에 나설 뿐이고, 대학들도 꼭 본고사를 부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입시 전형을 다양하게 하겠다는 말이라며 변명을 할 뿐입니다. 청소년들이 피부로 느끼는 문제는 과장되었다는 뜻이겠지요.


한 마디로 이 모든 어른들의 반응을 보면, 청소년은 그냥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두발 제한 잘 따르면서 대입을 위한 공부에만 전념하라는 메시지로 요약됩니다. 청소년들은 단지 오해했고 흥분했을 뿐이니까 자제하라는 말이지요.

 

아이를 ‘눌러 놓고’ 대화에 나서는 어른들


이런 모습은 이미 익숙한 것입니다. 집에서 아이가 평소와 달리 난리를 피우거나 목소리를 높이면 부모는 일단 아이를 제압하는 일부터 신경을 씁니다. 아이의 행동이 부모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아이의 흥분이 정당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부모는 우선 그렇게 아이를 눌러놓는 일부터 하게 되지요.


아이를 차분하게 만든다고 아이의 기운을 쪽 빼고 나서야 대화라는 것을 합니다. 그런데 이 대화라는 것도 자세히 보면 부모의 일방적인 해명과 변명으로 채워지기 쉽습니다. 오해라고, 이해 부족이라고, 부모로서 어쩔 수 없었다고, 너도 어른이 되고 나면 알게 될 것이라고. 이런 말들을 많이 하지요.


그렇게 해서 아이가 다시 평소대로 얌전하게 돌아오면 그때서야 어른들은 안심을 합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이지요. 반면에 이런 일을 거듭 경험할수록 청소년은 더욱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참고 참다가 비명을 질러 보아도 결국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옳을까요?

 

부모님이 불쌍하고, 선생님이 가여워서…


아이들은 이미 어른들의 거짓말을 잘 알면서도 그냥 따라주고 있었지요.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 들어가면 된다는 거짓말은 이미 대학 졸업한 수많은 선배들의 삶과 고통을 보면서 다 아는 거짓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냥 공부밖에 할 방법이 없어서, 부모님이 불쌍하고 선생님이 가여워서 시키는 대로 해 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마저도 어른들의 무책임과 고집불통에 더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가 없어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고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어른들이 그 비명이라도 그대로 들어주고 “너 많이 아팠구나” 위로의 맞장구라도 제대로 쳐주고, “실은 우리 어른들도 마땅한 방법이 없구나”라고 솔직하게 말이라도 하면 훨씬 나았을 겁니다.


어른들의 거짓말, 어른들의 방법 없음에 대해 아이들이라고 모를까요? 정말 무책임한 태도는 어른들의 솔직하지 못한 말에서 시작됩니다. 그게 아니라고, 실은 이런 거라고, 너희가 잘못 생각한 거라고 하는 말들.
어른이라고 해서 아이들의 모든 질문과 문제에 정답과 해법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대입 제도와 두발 제한과 기타 온갖 일들을 통해 아이들은 어른들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두려운 일은 ‘내 부모가, 내 담임이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구나’ 하는 느낌을 주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젠 아이들 앞에서 정직해지자


아프다고 눈물을 흘리는데, 이것만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하소연을 하는데도, 그 아이들 앞에서 “미안하다, 잘못했다, 용서해라” 하는 말부터 꺼내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당황해서 억지를 부리고 권위를 앞세우며 제압부터 하려고 든다면, 아이들은 아마 어른들의 말을 영영 믿지 않게 될 겁니다.


집에서든, 교실에서든, 어떤 모임에서든,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 실수한 것에 대해서, 설명과 도움이 부족했던 것에 대해서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런 태도와 모습으로 다가가는 것을 우습게 여기고 온갖 말과 행동을 보여준들 아무 소용이 없지요.


제발이지, 아이들이 뭘 모른다고, 어려서 그렇다고, 지각이 부족해서라고, 그런 식으로 어른들의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는 생각만이라도 깨끗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모르긴요. 아이들은 다 압니다. 다만 어른들보다 덜 뻔뻔하기 때문에, 그렇게 당하고도 부모와 교사가 시키는 대로 한 번 더 따라가 줄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