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구속일까? 자유일까?
노동은 구속일까? 자유일까?
  • 최영순_ 중앙고용정보원 선임연구원
  • 승인 2005.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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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타임즈> 일의 부속품 아닌 ‘주인공’이 되고픈 ‘꿈’을 위하여

최영순
중앙고용정보원 선임연구원
우리는 왜 ‘일’을 하는 것일까요? 먹고 살기 위해서,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 사회구성원이라는 소속감을 얻기 위해서,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하는 것을 돈을 받고 일하는 유급노동, 즉 직업을 갖는 것과 동일시함으로써 단순히 즐기는 ‘여가’와 구분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고 즐기는 취미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노동이 되는 순간 행복감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요리하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것과 매일 똑같은 요리를 수십 번 만들어 내야 하는 요리사가 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일테고, 드라이브를 좋아한다고 모두 운전기사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일을 하는 이유, 또는 수많은 직업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이유야 어찌되었건 만족하고, 행복해 하며 부족하지 않는 소비를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행복한 베짱이를 꿈꾸던 초심은 사라진 채 일 없이는 살 수 없는 개미가 되어 있거나 일에 끌려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본인을 발견하곤 하는 것이 우리 평범한 노동자일 것입니다.


7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명작


일, 노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있다면 바로 찰리 채플린이 감독·주연한 <모던타임즈>입니다. 1936년에 제작되었으므로 70여 년이 흘렀지만 모던, 포스트 모던을 지나온 지금에 다시 보아도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 있어 보이는 명작으로 기억됩니다.


<모던타임즈>는 자동화·기계화로 인간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리고 소외된다는 자본주의의 태생적 문제를 웃음과 슬픔을 통해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떠돌이’는 철강회사에서 하루종일 나사 조이는 일만 되풀이하는 노동자입니다. 분업화된 컨베이어 벨트에 서서 하는 반복작업은 결국 그를 노이로제에 걸리게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만듭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떠돌이’는 얼떨결에 시위대의 주동자로 몰려 이번에는 교도소로 들어가게 되고 출옥 후 어느 선착장에서 빵을 훔친 소녀를 돕게 되고 그 인연으로 두 사람은 함께 도망을 갑니다.


다시 직업을 갖기 위해 백화점 야간 경비원, 철공소 노동자, 카페 웨이터 등을 전전하면서 새 출발을 다짐하지만 안정된 일자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아 감옥 밖의 노동자로서의 삶, 실업자로서의 삶이 감옥 생활보다 더 비참해짐을 깨닫습니다.

 

테일러·포드 주의 속에 부품이 되어버린 노동자


영화 속 ‘떠돌이’가 처음 일했던 공장의 조직과 작업방식은 테일러(F. W. Taylor)와 포드(H. Ford)의 관리이론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대규모 공장을 경영할 새로운 생산방식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테일러는 노동자들의 작업시간을 측정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양을 목표량으로 설정하는 과업관리를 통해 작업의 효율을 극대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테일러의 작업과 시간의 표준화를 바탕으로 포드는 대량생산체제를 위해 자신의 자동차 공장에 움직이는 조립라인을 설치하고 각각의 조립라인에서 노동자들은 움직이는 차체에 따라 단순작업만을 하고 생산에 도움이 안 되는 필요 없는 동작은 줄이도록 하였습니다.


영화에는 ‘떠돌이’가 아무 생각 없는 표정으로 반복적으로 나사를 조이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작업과정을 놓치면 모든 전원을 차단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므로 자동으로 움직이는 작업대 앞에서는 얼굴에 벌레가 날아 와도, 재채기가 나려 해도 손을 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화면을 가득 채우는 시계에 이어 우르르 출근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처럼 노동자들은 점심식사를 하러 갈 때나 화장실에 갈 때도 작업카드를 통해 엄격한 시간통제를 받습니다. 시간은 곧 생산량을 의미하는 것이고 돈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한 치의 틈도 허용되지 않는 살벌함과 삭막함 속에서 노동자는 더이상 일의 주인공이 아닌 부속품이 될 뿐입니다.


영화 속 곳곳에는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30년대 미국사회의 혼돈, 즉 노동자들의 실업, 파업, 시위, 범죄가 묻어나지만 떠돌이 찰리 채플린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또 비록 기계와 같이 취급당하는 비인간적인 사회라 하더라도 ‘꿈’을 저버리지는 않습니다.

 

노동을 한다는 건


일을 한다는 것, 노동을 한다는 것은 구속일까요, 자유일까요?


<모던타임즈>에서 묘사하는 일과 노동은 비록 희망을 품게 한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구속입니다. 그러나 일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기쁨, 행복, 성취감을 생각한다면 일은 자유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실업자는 단 하루라도 맘 편한 휴가를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일을 한다는 것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래의 보다 더 행복한 삶을 위해, 혹은 현재의 행복한 삶을 위해 노동을 하고 직업을 가지는 한, <모던타임즈>가 그려내는 노동의 성격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