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보다는 일리의 힘을 믿는다
진리 보다는 일리의 힘을 믿는다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5.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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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공사노조 홍기업 조직국장

노동조합의 조직국장은 대개 ‘마당발’로 통한다. 조합원들 간의 결속력 강화와 조직 확대를 목표로 활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일상이다. 그만큼 사람들 간의 의견조정과 의사소통 능력이 중요한 자리이기도 하다.


주택공사노동조합의 홍기업(41) 조직국장을 두고 동료들은 ‘친화력이 강한 사람’ 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작 본인은 ‘별 비법이랄 게 없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그의 친화력에는 오랜 현장 활동 속에서 쌓인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다.

 

01 잘 듣는 것이 최고의 고충처리다


조합원이 3천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조직을 이끌다 보면 외부의 이해관계보다 내부의 이해관계 조율이 더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럴 때 홍 국장은 ‘듣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조합원이 3천명 가까이 되는데 요구사항이나 불만을 다 해결해 줄 수는 없어요. 하지만 고충이나 불만을 들어주는 것은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입이라도 떼어 봤으니까 속은 덜 답답할 거 아니에요.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충처리가 절반은 된다고 봅니다.” 


여러 조합원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는 ‘모두의 의견이 진리는 아니지만 일리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진리라는 것도 ‘일리’가 모여서 되는 거 아닌가요. 사람들의 말을 듣다보면 모두 ‘일리’가 있는데 이 ‘일리’들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다 보면 ‘진리’에 조금은 접근할 수 있죠.”

 

02 대중들의 정화력을 믿는다


전국 사업장의 특성상 홍 국장은 지역본부나 분회를 방문해 사업을 설명해야 할 일이 잦다. 지역본부마다 현안이나 특성이 모두 달라 본조의 결정 사항을 놓고 찬반이 엇갈리는 것은 다반사.  조합원들 간에 의견이 충돌하거나 본조의 결정사항에 반대가 있을 때 홍 국장은 본조의 입장을 무리하게 전달하기보다는 충분히 토론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같은 말도 내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랑 이해당사자들이 스스로 토론하는 속에서 나오는 말은 그 무게가 다르거든요. 의견을 말하기에 앞서 사람들이 활발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스스로의 역할을 축소하죠.”


원래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라서 토론 중에 나서고 싶은 마음을 누르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그는 대중들 스스로 토론하는 과정에서 해답을 찾아내고 나쁜 것은 걸러내는 ‘정화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03 결과보다는 과정을 설명한다


조합활동을 하면서 그가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때가 있다면 현장의 목소리와 지도부의 뜻이 맞지 않을 때다. 아무리 ‘듣는 입장’에 선다고 해도, 지도부 결정 사항과 사업의 추진 일정이 있기 때문에 모두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일을 추진해야 할 때도 있다.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노사 한마음 문화제’만 해도 3년 전 시행 당시에는 지역본부나 분회 조합원들의 반발이 심심치 않았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차라리 하루 쉬는 게 낫다’는 불만이 많았던 것.


이 때 홍 국장은 ‘모두가 서울로 올라와야 한다’는 결론보다는 ‘왜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문화제를 열자는 결정이 나왔는가’라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 사람들을 설득했다.


“결과만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면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저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대화를 많이 해요. 하나의 결정이 나오기까지 어떤 측면을 고려했고, 어떤 논의를 거쳐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됐는지 설명하다 보면 의견차를 좁히기가 훨씬 쉽습니다.”

 

04 사소함 뒤의 절실함을 본다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홍 국장이 가지고 있는 원칙이 있다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문제라도 당사자에게는 절실하고 급박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의견충돌이나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등은 상대방이 가진 문제를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데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홍 국장은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이라며 “각자의 위치에서 느끼는 고민과 고충 등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당사자에게는 큰 걸림돌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현장의 사소한 불만도 그냥 쉽게 들어 넘기지 않는다.

 

05 조직적 결정에 있어서는 ‘연민’을 배제한다


이렇게 사람들의 얘기를 하나씩 다 듣다보면 결정이 지연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홍 국장은 나름대로 결정 과정에서의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조직적인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 개인적 연민에 이끌리지 않는다는 것과 누군가 조직의 결정에 관해 물어올 때 떳떳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 노동조합의 도덕성에 관해서 말이 많잖아요. 저는 도덕성이나 대중성도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완전무결하다고 도덕성이 빛나는 것도 아니고, 수천 명 수만 명이라는 소위 ‘쪽수’를 가지고 대중성을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죠. 누구에게나 떳떳하게 설명할 수 있고 거기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그게 도덕성이고 대중성이라고 생각해요.”


홍기업 국장은 스스로를 ‘연결고리’라고 말했다. 집행부이기는 하지만 ‘지도부’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 지도부와 현장의 조합원을 연결하고 이들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말하는 그의 귀는 오늘도 활짝 열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