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에겐 이름이 없다. 우린 김씨, 이씨일 뿐…”
“노가다에겐 이름이 없다. 우린 김씨, 이씨일 뿐…”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5.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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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치고, 다치고’ 삶의 무게 짓눌러도 ‘노동기본권’은 실종
건설 일용 노동자의 하루

솔직히 나는 근로기준법을 모릅니다. /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법에만 있는 것이었지 현실은 꽝입니다. / 먹고, 씻고, 쉬고, 일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밥알보다 모래를 더 씹어야 하는 점심 도시락입니다. / 비가 오면 빗물에 말아먹는 꼴입니다 우리는 돈을 더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 인간답게 생활하고 좀 더 인간답게 일하고 싶은 것입니다. / 화장실 한 번 당당하게 가 보자는 것입니다. / 먼지구덩이 쇳가루라도 털고 퇴근하고 싶습니다. / 국민 3대 의무가 교육의 의무,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라고 합니다. / 이 가운데 우리가 안 지킨 게 무엇입니까? / 노동자 기본권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것입니까? / 기본권이 원래 그런 겁니까?      

- 4월 30일, 노동절 전야제, 건설 일용직 노동자의 연설 中

 

새벽이나 밤늦은 시각의 전철 안, 미처 흙가루를 털어내지 못한 옷차림에, 커다란 가방 하나 들쳐 메고 땀 냄새를 풍기며 졸고 있는 이를 마주친다면 그는 십중팔구 ‘노가다’다.


노동부 추산만 180만 명에 이르는 건설 일용직 노동자들. 한때는 ‘선진 한국 건설의 역군’으로, 맨손으로 대규모 공단이며 아파트를 일궈낸 ‘산업화의 주역’으로, ‘대접’은 못 받아도 ‘천대’는 받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들의 땀으로 빚어진 건물은 점점 높아지고 화려해지지만 사람들의 시선이나 일하는 환경은 제자리걸음이다.


건설경기가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도 마다 않고 뛰어드는 사람도 많아졌다. 건설업자 입장에서는 굳이 처우를 개선해 주지 않아도 일할 사람이 넘치는 형국이 됐다. 2005년의 한국에서 70년대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는 건설 일용직,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봤다.

 

“일당요? 창피하게 왜 물어요”

 

국내 굴지의 건설업체들이 시공사로 참여하고 있는 안산종합운동장의 건설현장. 토요일인데도 180여 명의 일용 노동자들이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대부분 시공사가 직접 고용한 것이 아니라 시공업체가 하청을 준 ‘전문건설업체’에 고용된 사람들이다.


공사장 청소나 정리정돈 등을 도맡는 ‘잡부’로 일을 하는 왕한식(50)씨는 일당이 얼마냐는 질문에 입을 굳게 다문다. “창피해요, 창피해…” 라며 말끝을 흐리고 마는 그의 일당은 5만원. 일이 많을 때라고 해도 한 달에 20일을 채우기도 힘든 편이라서 수입은 늘 100만원을 넘지 못한다. “연봉으로 치면, 천오백 벌기도 힘들죠. 약 먹어가면서, 아픈 거 참아가면서 하면 간신히 채울까…, 그나마 나는 나은 편이에요. 파견업체 통해서 나가는 사람들은 하루걸러 하루 노니까.”


그는 계속해서 ‘창피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목수로 11년, ‘일용 잡부’로 5년, 아이들이 고등학교 3학년, 1학년이 되도록 그 일로 가정을 꾸려온 사람이다. 부족해도 거짓말하지 않고 땀 흘려 번 돈으로 한 가정을 이끌어 온 것이 무에 그리 창피한 일일까.

 

“햇빛 가리개라도 만들어 줬으면…”

 

적은 임금에는 이미 이골이 날만큼 났다. 하지만 요즘 그는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만이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아침 7시부터 저녁 5시까지 꼬박 10시간을 일하지만 점심시간 한 시간 외에 정해진 휴식시간이 없다. 휴식시간이 없으니 휴게 공간이 있을 리 만무하다. 봄이나 가을에는 한 구석에서 담배를 피워 무는 게 유일한 휴식이지만 한여름에는 그나마도 쉽지 않다.


4만 평 부지에 화장실과 식수 공급대도 단 1곳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작은 일’은 현장 아무데서나 해결하고 ‘큰 일’은 참을 때까지 참아본다.


쌓여있던 목재들을 나르느라 분주하던 일용직 노동자 K씨는 “그래도 여기는 식당이랑 씻는 곳은 있으니 나은 편”이라며 “예전에 일하던 곳에서는 직영 노동자만 샤워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어서 퇴근길에는 늘 목욕탕을 들르곤 했다”고 말한다. 흙투성이 작업복을 입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크레인과 지게차, 사람들이 한데 엉겨 분주한 현장 한 구석에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현장사무소에서 관리자인 듯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서는 K씨의 옷매무시를 만진다. “이봐, 좀 단정하게, 거 사진 찍는 데 옷도 좀 똑바로 입고, 안전모 끈도 조이고 말이야…” 사람들의 마뜩찮은 시선에 머쓱해진 그가 발걸음을 돌리는 사이 한 노동자의 푸념이 들려온다. “일당 잡부 거기서 거기지, 만진다고 나아지나….”


그러고 보니 직영 노동자들과 달리 하청업체에 고용된 사람들은 작업복을 입지 않고 있다. 여기저기 구멍이 난 티셔츠와 청바지가 이들의 작업복이다.

 

흙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

 

12시가 되자 사람들이 일제히 식당으로 향한다. 공사장 입구 가건물 ‘함바’는 다닥다닥 붙어 앉으면 80명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다.


“만땅이여! 만땅” 50대로 보이는 한 사내가 식판을 들고 식당 밖으로 나온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여기도 먹을 데가 없구만” 볼멘소리를 하며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들어간 지 10분도 채 못 돼서 그가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손에 식판이 들려 있지 않다. 그새 밥을 다 먹은 것이다. “어느 세월에 꼭꼭 씹어 삼키남, 그냥 후루룩 마시고 10분이라도 더 자야지” 식판의 반찬들을 대충 섞어 ‘후루룩’ 마신 그는 ‘아시바’(철골 작업대) 밑에 넓은 판자를 하나 깔고 눕는다.


점심시간이 20분쯤 지나자 현장 여기저기서 아무렇게나 다리를 뻗고 잠을 청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휴게실은 관두고 햇빛 가리개라도 하나 만들어 주면 얼마나 좋아” 식당 옆 자갈밭에 다리를 뻗고 눕던 사내가 들으라는 듯 중얼거린다. 


“다들 잠이 부족해요. 안산에 사는 사람들, 안산에서만 일해도 괜찮지, 구리로, 의정부로 일 나가려면 네 시 다섯 시에 일어나서 가야 하니까 한 시간이라도 더 잘 거를 못자요.” 지난 99년에 안산시가 관급공사에 안산시민을 50% 이상 고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시 발주공사가 다단계 하도급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역 노동자보다는 업체에 속한 일용 노동자들로 공사현장이 채워지고 있는 설명이다.

 

공사판으로 흘러들어 온 자영업자들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도 달리 쉴 곳이 없어 그냥 흙바닥 여기저기에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앉아 잡담을 나눈다. 장시병(49)씨는 휴게시설이나 적은 임금보다도 ‘노가다’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 힘들다고 했다. 


“옛날에 보면 못 배우면 노가다나 해먹는다는 식으로 사람들이 얘기를 했잖아요. 그런데 요즘엔 아니에요. 여기 현장만 봐도 옛날에 사업하다가 망한 사람, 공무원 하다가 퇴직하고 일 나오는 사람, 다 배우고 살만큼 살던 사람도 많아요. 그래도 사람들 시선은 여전하죠. 하긴 뭐, 노가다가 다 노가다지.”


사실 장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조그만 사업을 하던 자영업자였다. 사업이 휘청하면서 길거리로 나앉고 얼마간은 아무 일 없이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살기도 했다. 아내와 대학생 딸이 있지만 지금은 함께 살지 않는다.


휴게시설이나 샤워시설 등은 그래도 부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공사현장은 다른 곳에 비해 중대 산업 재해가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도 일용직들은 대부분 공상으로 처리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다. 실제로 지난 3월 노동부가 건설현장 1026곳을 대상으로 안전점검을 벌인 결과, 전체의 96%인 984곳이 안전보건 조치 위반 사업장으로 드러났다. 매년 국정감사 때면 건설현장의 산업재해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렇다 할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냥 내 몸은 멍청이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일을 못하니까. 내 몸은 멍청이라서 아픈 것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거 삼일도 못합니다.” 여기저기 햇빛에 그을려 작은 상처 정도는 눈에 띄지도 않는 김재연(55)씨는 이미 체념했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점심시간이 끝나고 사람들은 ‘끙’ 소리 한 번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거대한 시멘트, 철골 구조물 속으로 총총 사라졌다.

“우리는 이름 석 자가 없어요. 굳이 이름이 있다면 ‘씨’라고 할까요. ‘어이~! 김씨 이것 좀 빨리 하지. 박씨! 왜 그렇게 손이 느려, 이씨! 이리 좀 와봐’ 오야지(십장)가 아들뻘이든 조카뻘이든 그냥 우리는 ‘무슨무슨 씨’ 라니까요.”


흙먼지 날리는 건설현장, 김씨, 이씨 박씨들의 어깨에 내려앉은 뽀얀 먼지는 털어 내도 털어 내도 가벼워지지 않는 삶의 무게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