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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지’와 ‘보지’를 허하라
부끄러운 것과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들
[0호] 2009년 09월 09일 (수) 하승립 기자lipha@laborplus.co.kr
   
▲ 하승립 lipha@laborplus.co.kr

분명 사전에조차 버젓이 올라가 있는 표준어인데도 차마 입에 올리기는커녕 글로 쓰기에도 민망해 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남녀의 성기(性器)를 지칭하는 ‘자지’와 ‘보지’가 대표적이지요.

우리는 이 단어를 입에 올리지 못해 ‘거시기’부터 시작해서 숱한 우회적 단어들을 동원합니다. 어문학적으로는 공식적으로 허용을 받았음에도 사회적 또는 도덕적 굴레에 갇혀버린 셈입니다.

그런데 이 ‘민망한’ 단어들의 어원은 대체 뭘까요? 이와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이항복이 퇴계에게 묻다

조선 왕조 14대 임금인 선조 때의 일이다. 퇴계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선조의 부름으로 다시 입궐을 하게 되었는데 퇴계를 맞이한 백관들은 입궐하기 전에 퇴계를 남문 밖의 한가한 곳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퇴계에게 성리학에 대한 온갖 현학적인 질문을 하였다.

그들이 좌정하고 있을 때, 어린 소년 하나가 성큼 들어와 퇴계에게 절을 하고 말했다.

“소생은 이항복이라 하옵니다. 듣자하니 선생께서는 독서를 많이 하여 모르시는 것이 없다고 하기에 여쭈어 볼 말씀이 있어 이렇게 왔습니다.

우리말에 여자의 소문(小門)을 ‘보지’라 하고, 남자의 양경(陽莖)은 ‘자지’라 하니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퇴계는 이항복의 질문을 받자 얼굴빛을 고치고 자세를 바로 한 후, 찬찬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소문(小門)은 걸어다닐 때 감추어진다고 해서 걸음 ‘보(步)’ 감출 ‘장(藏)’ 갈 ‘지(之)’ 세 자로 보장지라 한 것인데 말하기 쉽도록 감출 장(藏)은 빼고 ‘보지’라 하는 것이요, 남자의 양경은 앉아 있을 때에 감추어진다고 해서 앉을 ‘좌(座)’ 감출 ‘장(藏)’ 갈 ‘지(之)’ 세 자로 좌장지라 한 것인데 이것 역시 말하기 쉽도록 감출 장을 빼고 좌지라 한 것인데 잘 못 전해져 발음이 변해 ‘자지’라 하는 것이다.”


축축하거나 마르거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욱 민망한, 비속어에 속하는 단어에 대한 얘기로 이어집니다.

이항복이 다시 물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보지를 ‘씹’이라 하고, 남자의 자지를 ‘좆’이라고 하니 그것은 또 무슨 까닭입니까?”

퇴계가 다시 대답했다.

“여자는 음기(陰氣)를 지녀 축축할 ‘습(濕)’자의 발음을 따라 습이라 한 것인데 우리말에는 되게 소리를 내는 말이 많아 ‘씁’자로 된소리가 되었고, 이것이 발음하기 편하게 변해 ‘씹’이 된 것이요, 남자는 양기를 지녀 마를 ‘조(燥)’자의 음으로 조라 한 것인데 이것 역시 된소리로 ‘좆’으로 변한 것이다.”

“말씀을 듣고 나니 이치를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항복은 이렇게 말하고 천연덕스럽게 나갔다. 이항복의 거동을 지켜보던 백관들은 어이없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뉘집 자식인지는 모르나 어린 아이가 어른들 앞에서 발랑 까져서 그런 싸가지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필경 버린 자식일 거요.”

퇴계가 이 말을 듣고 엄숙한 목소리로 이렇게 나무랐다.

“당신들은 어찌 그 아이를 함부로 ‘싸가지 없다. 까졌다’ 하시오? 모든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날 때 이미 ‘자지’와 ‘보지’를 몸의 일부분으로 타고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요, 또 말과 글을 빌어 그것들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 당연한데,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이 무슨 잘못이라 말이요? 다만 음과 양이 서로 추잡하게 합하여 사람 마음이 천박해지는 것을 꺼리는 까닭에 그런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지, 순수한 마음으로 말할 적에야 백 번을 부르기로서니 무엇을 꺼릴 게 있겠소. 그 소년이 나를 처음 보고 음양의 이치부터 물은 것을 보면, 그 소년이 장차 이 나라의 큰 인물이 되어 음양의 조화와 변화에 맞게 세상을 편안히 이끌어 나갈 사람이라고 생각되오.”

하여 다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다.


퇴계면 어떻고 율곡이면 어떠리

사실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그다지 높지는 못합니다. 질문을 하는 이항복이 아이였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기방 출입을 일삼다가 어머니 조씨의 꾸지람을 듣고 나서의 일이라는 얘기도 있고, 또 대답을 하는 이가 퇴계가 아니라 율곡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결국 이항복이나 퇴계, 혹은 율곡의 명성을 빌어 민망한 이야기를 우스개로 삼거나, 혹은 천연덕스럽게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어문학적으로 볼 때도 ‘장’자가 축약되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또 다른 어원설로는 ‘자지’의 경우 아이 즉 자식을 낳는 나무요, 또 가지를 치는 것이라 하여 아들 ‘자(子)’ 가지 ‘지(枝)’ 자를 써서 ‘子枝’라 이르고, ‘보지’의 경우 자식을 담아 기르는 보배스런 못이라고 하여 보배 ‘보(寶)’ 자와 못 ‘지(池)’ 자를 써서 ‘寶池’가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역시 한자를 써서 그럴듯하게 뜻을 갖다붙이기는 했지만 그다지 신빙성이 높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어 남녀근 명칭 어원고’에서 남성 성기는 ‘자재(自在)’, 여성의 성기는 ‘습파(濕婆)’라는 인도어에서 유래됐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명확한 근거를 가졌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오히려 중국어 발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제법 그럴 듯 합니다. 근세 중국어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기 모양을 재미있게 본떠 ‘烏子(냐오즈)’, ‘八子(바즈)’라고 표현했는데, 烏의 다른 발음인 댜오를 차용해 ‘댜오즈’와 ‘바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것이 변해서 지금과 같은 표기가 되었다는 거지요.

지금도 우리가 남녀의 성기를 일컬을 때 영어를 쓰기도 하는 것처럼, 당시에도 차마 입에 올리기 부끄러우니 중국어 발음을 차용했다는 설입니다.

참 민망한 단어이기는 하지만 ‘씹’의 경우는 ‘습(濕)’에서 유래됐다는 설과 함께 ‘씨입’설도 있습니다. 씨가 들어가는 입, 혹은 씨를 심는다는 뜻이라는 거지요. 또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옛한글 자음인 반치음 ‘ㅿ’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ㅿ’이 ‘ㅇ’과 ‘ㅅ’으로 나뉘어 이른바 두 ‘입’ 중 위쪽의 진짜 입은 ‘입’으로, 아래쪽의 성기는 ‘십’으로 분화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십’은 경음화를 통해 ‘씹’이 됐다는 거지요.

사실 현재로서는 어떤 설이 맞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기를 칭하는 ‘유사’ 단어가 많은 것처럼 그 어원에 대한 설도 많다는 것만 확실합니다.

감추거나 퍼붓거나

우리가 남녀의 성기를 표현하는 단어들을 대하는 태도는 극단적 두 갈래로 나타납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해 온갖 은유적 표현들로 대신하거나, 사전에서 용인하는 수준을 넘어선 단어들을 거침없이 쓰고 심지어는 그 단어들 없이는 말을 할 수 없거나.

전자는 이 단어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양인’이라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단어라고 생각하지요. 해학적으로, 또는 유식한 척 ‘거시기’ ‘똘똘이’ ‘페니스’ ‘조개’ ‘대음순’ ‘버자이너’라고 에둘러 말하거나 아예 말 하는 것 혹은 표현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합니다.

후자는 철딱서니 없는 거지요. 주로 학창 시절 군중 심리에 휩쓸려, 혹은 영웅 심리에 온갖 욕설을 입에 달고 살면서 말끝마다 ‘좆나’를 외칩니다. 나이 들어서까지 그런다면 사회부적응자이겠지요.

따라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전자에 해당할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지’와 ‘보지’가 더러운 것, 추한 것, 부끄러운 것 취급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음지의 단어여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요.

잘 알려진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우리 말로 풀어 쓰면 ‘보지의 독백’ 쯤 됩니다. 지난 수 년 간 유명 여배우들이 이 연극에 출연해 그간 입에 담으면 안 되는 것으로 알았던 ‘보지’라는 단어를 내내 내뱉습니다. 숨겨서 더 음습해진 것을 드러내서 밝고 건강한 것으로 만들자는 취지일 겁니다.

‘실용’은 ‘허튼 삽질’?

이렇게 부끄러워하거나 배척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 되어버린 단어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느새 ‘실용’은 ‘허튼 삽질’ 정도로 여겨지고, 친구를 뜻하는 정겨운 단어였던 ‘동무’는 ‘빨갱이 말’로 낙인찍혔습니다.

특정한 집단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사관계에서 금기시되는 단어들을 볼까요? ‘합리’나 ‘협력’은 ‘어용’의 다른 표현쯤으로 여겨집니다. ‘선명성’은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조직보다 돋보이기 위한 강경 노선’으로 뜻풀이됩니다. ‘참여’는 ‘참견’ 내지는 ‘경영권 침해’로 읽히지요.

‘생산성’이나 ‘경쟁력’ 같은 단어는 ‘자지’나 ‘보지’와 다를 바 없이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단어쯤으로 치부됩니다.

물론 밑도 끝도 없이, 입에 달고 사는 욕설처럼 내뱉는다면야 문제겠지만, 그렇지 않고 꼭 필요한 때 쓰인다면 이 단어들을 부끄러워하거나 배척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퇴계 혹은 율곡, 아니 우리 선조들의 그럴듯한 뜻풀이가 없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결정이나 행동에 대한 원칙과 일관성마저 없는,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들'이 문제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갇혀버린 단어들의 사용을 허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강은 그저 유유히 흘러가거나,
강은 ‘우리’가 함께 헤쳐가거나...

그 강을 거슬러, 혹은 강을 따라
이곳 저곳을 떠도는 장사치들이 잠시 머무는 곳.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뱃사공의 굵은 노동의 팔뚝이 잠시 쉬어가는 곳
더 큰 바다로 떠나기에 앞서 내일의 희망을 불태우는 곳.

그 어떤 사연이라도 좋다.
그 누구도 가리지 않는다.
다만, 강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때는 해질녘이 좋겠다.
동틀녘의 활기찬 설레임도 좋겠지만, 너무 비장하다.
한낮의 왁자한 활력도 좋겠지만, 너무 분주하다.
넉넉하게 쉬어갈 수 있는 해질녘의 고즈넉함이 어울린다.

날이 밝은 다음 제 갈 길을 떠나도 좋고,
그냥 며칠 더 눌러앉아도 탓하지 않는다.

강나루해질녘,
소주 한 잔 나눌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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