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하고 싶으면 그 일에 미쳐라”
“잘 하고 싶으면 그 일에 미쳐라”
  • 하승립 기자
  • 승인 2005.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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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하고 격려해주면 그게 ‘자신감’이 된다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부드러움에서 나온다
영원한 ‘4번 타자’ 장종훈

어느 분야에서건 이름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 인기의 무게, 실력의 무게, 그리고 성실의 무게까지 같이 갖춘 이름을 우리는 ‘전설’ 혹은 ‘신화’라고 부른다. 한국 프로야구계에도 그런 이름이 있다.


이제는 선수라는 호칭이 아닌 코치라고 불리는, 그러나 영원한 ‘4번 타자’ 장종훈(한화 이글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사람들은 이제 홈런 하면 이승엽(일본 롯데 지바 마린스)을, 통산기록은 양준혁(삼성 라이온즈)을 떠올리지만 그는 언제까지고 한국 프로야구 ‘대표 타자’다.


청주 용담초등학교에서 유도를 하던 장종훈은 ‘창문 너머 보이는 야구선수들이 너무 멋져 보여서’ 다음날로 덜컥 야구선수가 된다. 세광고 시절 ‘팀에서 나름대로 한다고 했던’ 장종훈이었지만 고1 때 키 168cm 58kg에 불과했던 이 선수는 끝내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야구가 너무 하고 싶어서’ 86년 빙그레 이글스에 연습생으로 입단했다. 공도 줍고 배팅볼도 던져주던 이 ‘고졸 연습생’은 20홈런을 갓 넘기고도 홈런왕이 되던 시절, 최초의 40홈런의 주인공이었고, 전광판의 선수 타점을 기록하는 칸이 두칸 밖에 없을 때 최초의 100타점 이상을 올린 선수였다.


‘고졸 연습생 신화’ 장종훈은 프로 선수 시절 한 대학으로부터 입학 제의를 받는다. 학교에 나올 필요도 없이 이름만 올려놓으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들은 저를 고졸신화라고 말합니다. 칭찬으로 하는 말이지만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저로서는 그 별명이 좋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원하지 않았어도 전 고졸신화가 되어버렸습니다. 근데 제가 대학에 입학한다면 고졸신화는 사라지는 겁니다. 혹시 모르잖아요. 자신의 학력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희망일지도…. 전 그런 사람의 희망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은퇴하고 2군 코치의 길을 가고 있는 장종훈을 대전 야구장에서 만났다. 막 2군 경기를 마친 그는 그라운드에서 뛴 선수마냥 땀에 절어 있었다. 장종훈의 ‘땀의 세월’ 이야기를 그렇게 들었다.

 


“게임에 나가는 게 가장 소중하다”

 

- 이제 코치라는 호칭에 좀 익숙해졌는지?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웃음) 프로생활 20년째 하다가 은퇴를 하게 되니까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결정을 하고 나니까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마음이 상당히 가벼워진 상태다."

 

- 여러 기록들 중에서 ‘이것만은 달성하고 싶었다’는 아쉬움이 남는 기록도 있을텐데.


"400호 홈런, 2000게임 출장이 제일 아쉽다. 2000게임과 1900게임은 다르니까. 선수생활 때는 가장 애착이 가는 기록을 무조건 홈런이라고 얘기했는데, (선수생활이) 끝나는 시점에서는 게임 나가기가 그렇게 힘들더라. 나가더라도 대타로 나가고 그러니까, 주전으로 나가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지금은 게임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다 출전 기록이 가장 의미가 있다. 게임에 나가야 새로운 기록이 나올 수 있는 거니까."

 

- 양준혁 선수가 본인의 통산 기록을 하나씩 깨트려 나가고 있는데.


"기록 때문에 야구하지는 않았다. 하다 보니까, 오래 하다 보니까 기록들이 세워진 거다. 의식은 안 한다. 오히려 빨리 좀 깼으면 좋겠다. 미국이나 일본 야구에 비해서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다 보니까 기록들이 많이 처진다. 양준혁 선수뿐만 아니라 좋은 후배들이 많이 나와서 우리도 미국이나 일본 야구 기록에 필적할 수 있는 그런 기록들이 많아 나왔으면 좋겠다."

 

“잘하고 싶어서 죽기살기로 연습했다”

 

- 다른 선수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 연습생으로 프로에 입단했는데.

 

"지금이야 고졸 출신들이 많지만 그 때(86년)는 유망한 선수들은 다 대학 갔다. 당시 대학 가서 태극마크 달아보는 게 최고 목표였는데. 야구는 정말 하고 싶고, 부럽기도 했다. 어렵게 빙그레 이글스에 들어왔는데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너무 좋았다."

 

- 연습생 생활이 쉽지 않았을텐데, 중간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


"야구를 계속 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대학도 못 갔는데 그보다 한 차원 높은 프로에서 통할 수 있겠냐는 생각 때문에 1년만 해 보고 안 되면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코칭스탭이나 선배들이 격려의 말을 너무 많이 해줬다. 처음에는 ‘어린 놈 데리고 장난 하나’ 싶었고, 약 올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진심이더라.

 

자꾸 격려하고 칭찬해주니까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자신감이 되더라. ‘어, 해보면 되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처음에는 1군 시합을 따라다녔다. 배팅볼 던져주고 잡일 하다가 후반기 들어가서 2군에 합류해서 연습했다. 그런 자신감들이 생기다 보니까 그 때부터 죽기살기로 연습을 했다. 너무 재미있었다."

 

- 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면 재미있게 하기 힘든데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팀에서 한다면 했는데, 대학진학이 좌절이 되고 나니까 야구를 정말 하고 싶고,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싶더라. 그래서 열심히 훈련해보자 생각했다. 당시 한창 스타들이 이만수, 김재박 이런 사람들이었는데 그 선수들처럼 되기 위해서 야구에 미쳤었다. 지나고 보니까 그런 과정이 좋았던 거 같다. 정상에 있는 것보다 그 과정에 올라가면서 야구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즐거웠다."

 

“선수생활 20년 했으니까 지도자도 20년”

 

- 김인식 감독이 ‘바닥에서 시작해서 제일 위까지 가봤기 때문에 지도자 잘 할 것’이라고 했는데 어떤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라고 생각하나.


"대부분 처음 코치를 하는 사람들은 의욕이 넘쳐서 선수들보다 너무 앞서간다. 그러면 선수들이 못 따라간다. 큰소리치는 지도자는 되고 싶지 않다. 선수들과 같이 얘기를 많이 나누면서 하고 싶다."


- 지금 2군 선수들과 나이 차이가 상당히 나는데, 세대 차이는 안 느끼나.


"분명히 있을 거다. 하지만 선수 간 선후배 관계보다 코치와 선수 사이가 더 가까울 수 있다. 하다 보면 눈에 거슬리는 것도 보이고 그렇지만 반대로 나도 선수 때 그랬을 거라 생각하니까 편해진다. 큰 문제는 없다.

 

지금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너무 부드러운 거 아닌가. 그래 가지고 선수들이 따라 오겠나. (웃음)
선수들도 착각하면 안 된다. 부드러움이 어떻게 보면 더 무서울 수 있다. 소리치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서 무서운 게 있는 걸 원한다. 그렇다고 한 없이 하면 안 되겠지만. (웃음)"

 

- 지금까지 많은 지도자를 겪었는데, 그들의 장점은 뭔가.


"배성서 감독은 믿음을 가르쳐줬다. 그 때 당시 생각을 해보면 실수도 많이 하고 삼진도 많이 당했는데도 한 번도 빼버린 적이 없다. 어린 선수들한테는 그게 자신감과 연관이 있으니까 그런 게 필요하다. 김영덕 감독은 야구를 정말 잘 안다. 야구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해준 분이다.

 

강병철 감독한테서도 상호신뢰를 배웠다. 야구라는 게 심리적인 운동이다보니까 저 사람이 나를 믿고, 내가 저 사람을 믿는다는 관계형성이 크게 작용한다. 쉬운 것 같지만 힘들다. 김인식 감독은 오래 같이 하진 않았는데 무섭게 하는 게 카리스마가 아니구나 하는 걸 느꼈다. 유머스러운데도 뭔가가 있다. 그런 부분은 다른 감독과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 나중에 감독이 된다면 어떤 스타일의 감독이 되고 싶은지.


"선수를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부작용이 많이 생긴다. 그건 많이 바뀌어야 한다. 선수들도 우리 세대와 다르고, 부족함이 없이 커왔기 때문에 예전 방식으로 안 된다.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부드러움에서 나온다. 그렇게 해보고 싶다. 선수 생활 20년 했으니까 감독도 20년 채우고 싶다."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다”

 

- 은퇴를 선언했을 때, 수많은 팬들이 ‘당신과 함께 한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는 릴레이 글을 남겼다. 그걸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나.


"진짜로 이렇게까지 호응이 클지 몰랐다. 한국 선수들의 현주소가 그렇다. 선배들이 은퇴할 때 발표하면 끝이었다. 나도 그게 끝인줄 알았다. 그런데 엄청난 팬들의 호응을 보면서 전성기가 다시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팬들의 그런 모습 보면서 너무 감동 받아서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내가 좀 하긴 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

 

- ‘좀’ 한 정도가 아니지 않나. (웃음)


"일반 선수들은 올스타전에 팬투표로 나가는데 나는 더 특별하게 팬들에 의해 출전했다. 정말 너무 많은 사랑을 받은 것 같다."

 

- 야구 선수라는 직업이 가족들한테 좋은 점수 받기 힘들텐데.


"시즌 중에는 야구에만 신경 쓰니까 가족들에 미안함을 가질 겨를도 없다. 한 달 넘게 전지훈련 하고 할 때는 아내한테 정말 미안하다. 아내와 애들한테 할 말 없다. 남편으로서는 0점이었다. 10년 결혼 생활 동안 설거지 딱 한 번 해준 적 있다. 애들이 한창 놀 나인데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해줬다. 요즘은 좀 한가해져서 많이 어울리려고 하는데 아직은 쉽지 않다."

 

- 애들이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지.


"집에 트로피가 참 많은데 봐도 아직은 모른다. 큰 놈은 2학년인데 친구들 오면 트로피 보여 주면서 은근히 자랑한다. 얼마 전에 ‘올해 아빠 홈런 몇 개야’라는 질문에 1개라고 했더니 ‘에이’ 하더라. 그런데 최근에 스포츠뉴스에 올해 만루홈런이 많이 나온다는 보도를 하면서 ‘홈런 340개를 친 장종훈 선수도 만루홈런이 6개 밖에 안 된다’ 이걸 듣고는 ‘오~’ 그러더라. (웃음)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다. 잘 할 때는 칭찬해주고 못 했을 때는 따끔하게 혼도 내주고 싶다."

 

“희생타가 야구의 진짜 매력”

 

- 선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데뷔 첫 타석 선발 출장해서 2루타를 친 순간, 그리고 99년도에 팀이 우승한 순간. 그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었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 선수 생활을 돌이켜 볼 때 이 순간은 바꿔놓을 수 있다면 싶은 순간이 있나.


"한참 야구할 때는 지금에 비해 연봉이나 돈은 적었을지 모르지만 팬들의 열정적인 야구사랑은 훨씬 더 컸다. 그래서 그 팬들의 열정은 바꾸고 싶지 않다. 다만 바꾸고 싶은 건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다면 그 혜택을 다 받았을텐데 (웃음) 우리 때는 혜택을 못 받았다. 후배들도 그런 걸 알았으면 좋겠다. 지금 받는 혜택은 선배들이 하나씩 쌓아온 것이 바탕이 됐다는 걸."

 

- 선수단 내에는 다양한 연령대가 있고, 야구가 단체 경기이긴 하지만 개인의 성적이 중요하기 때문에 관계 형성이 쉽지 않을텐데.


"사고 없이 한해를 보내는 것도 기술이다. 서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들은 갖고 있다. 서로 격려해주고 하는 모습들이 좋다. 빙그레의 전성기 시절 네임밸류로 볼 때 아마추어 때 수퍼스타는 없었지만, 우리가 보더라도 너무 강했다. 개개인이 잘하자는 의욕이 모여서 팀이 잘 된다.

 

단체운동이지만 개개인이 잘해야 강해지는 게 야구다. 선수들이 욕심도 많고 분위기도 좋았다. 전력만 놓고 보면 역대로 삼성이 최고고 매년 우승만 해야 했는데, 야구는 전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팀워크도 맞아야 되고 분위기도 맞아야 하고, 코칭스탭과의 조화도 필요하다."

 

- 우문일 수도 있지만 야구의 매력은 뭔가.


"진루타, 희생타 같이 남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는 9회말 역전 홈런이라고 하지만, 그건 쉽지 않은 것이고. 야구는 다른 종목에는 없는 희생타라는 게 있다. 서로 돕고 상부상조해야 한다. 투수가 아무리 잘 던지더라도 타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되고, 타력이 아무리 터지더라도 투수가 무너지면 이길 수 없다."

 

-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꿈은.


"거창한 꿈은 없다. 우승 몇 번 하고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치우치는 지도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선수들이 야구에 조금 더 열정을 갖고 잘할 수 있게끔 옆에서 도와주고 싶다. 가르친다는 표현보다는 선수 스스로 커야 하고, 코치는 서포터 역할을 해야 한다."

 

장종훈이 곧 역사

장종훈은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답게 수많은 기록을 갖고 있다. 그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역사가 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 수상경력 : 골든글러브 5회(1988, 1990, 1991, 1992, 1995), MVP 2회(1991, 1992), 최다안타 1회(1991), 홈런왕 3회(1990, 1991, 1992), 타점왕 3회(1990, 1991, 1992), 득점왕 2회(1991, 1992), 장타율 4회(1990, 1991, 1992, 1995), 출루율 1회(1995)

 

한국 프로야구사를 통해 볼 때 장종훈은 2세대 간판스타라 할 수 있다. 1세대로는 이만수, 김성한 등이 있었고, 3세대는 이종범, 양준혁, 이승엽으로 이어진다.

 

비록 41홈런을 기록한 92년 시즌 이후 부상으로 2년간 고통을 겪기는 했지만 20년의 선수생활 동안 꾸준히 제역할을 해줬고, 따라서 프로야구 타자 부문 통산기록은 거의 다 장종훈의 이름이 가장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장종훈의 은퇴 전후 양준혁이 통산 최다안타, 통산 최다2루타, 통산 최다사구 등의 기록을 차지했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장종훈의 20년 선수생활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