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자는 보호대상? NO!
고령자는 보호대상? NO!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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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 경력개발과 재교육 통해 건강한 노동력 유지

 

몇 해 전 노인의 성과 사랑을 정면으로 다룬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70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그것도 만년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정신적 동반자를 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육체적 기쁨을 만끽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무엇이 노인의 성생활을 가로막는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지금 우리 생산현장의 고령 노동자들은 묻는다.
‘무엇이 우리의 일할 권리를 가로막는가’

 

 

무병장수는 모든 인류의 오랜 꿈이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너무 오래 살아서’ 큰일이란다. 고령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보고서와 서적이 쏟아지고 청와대에는 고령화 문제를 다룰 특별 태스크포스팀이 꾸려질 만큼 국가적 중대 사안이 됐다.왜 그런가. 고령사회가 몰고 올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 때문이다.

 

저출산으로 인해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고 그나마 일을 할 수 있는 인구마저 점점 늙어간다.
연금제도 개선과 사회복지 확충이 하나의 대안으로 논의된다. 그러나 연금 고갈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됐고 노령인구를 부양할 젊은 세대는 점차 감소하고 있다.

 

20대의 건강한 노동력을 쭉~
“경제 참여인구를 유지하고 국가의 노인부양 비용을 줄이는 방법은 나이든 사람에게 노동의 기회를 확대하는 방법뿐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02년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발표한 ‘고령화의 경제적 영향과 대책’이라는 보고서의 결론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고령화로 인한 경제성장 저하의 해법으로 고령인구를 ‘비생산적’ 인구에서 ‘생산적’인구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고령화 대비에 들어간 선진국들도 나이든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생산현장에 묶어두려고 정년연장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와 달리 우리 기업들이 고령자의 고용이나 정년연장을 기피하는 이유는 고령자의 생산성이 낮다는 생각 때문이다. 특히 노동집약적 성격이 강한 주력제조업의 경우 단순 반복 작업으로 인한 근골격계 질환 등 건강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기업들은 ‘고령자=비용’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노동자의 건강 악화는 육체적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 외에도 작업 환경의 영향이 크다. “컨베이어 생활 20년에 약봉지를 달고 사는 신세가 됐다”는 노동자들의 푸념처럼 단순반복적인 장시간 노동과 직장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 등은 인간의 노동력을 일찍 쇠잔시킨다.


노동력이 빨리 소모될수록 오래도록 일할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진다. 젊은 시절에 체력과 정신력을 다 써버린 노동자는 기업에게는 당장 생산성 저하와 의료비 부담의 증가로, 노동자 개인에게는 고용불안으로 다가온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지경 연구원이 낸 ‘은퇴자의 은퇴사유 및 은퇴후 소득 원천’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은퇴사유를 묻는 질문에 ‘본인의 건강문제’라고 답변한 비율이 46.9%로 1위를 차지했다.


경제구조 자체가 고령화되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젊은 시절에 노동력을 다 쥐어짜내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건강한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경직된 작업구조와 권위적 직장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다.

 

다기능화 통한 숙련향상과 노동만족도 증대
일에 대한 불만족도 건강한 노동을 해치는 한 요소다. 단순작업의 반복은 육체적 쇠락 뿐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를 더한다.
유럽의 기업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서로 다른 업무기능을 통합하는 ‘다기능화’를 추진해 왔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한 다임러크라이슬러 모터 공장의 경우 단순 반복 작업에 물류, 검사업무까지 포함시켜 순환 업무를 실시하고 있다. 제도가 도입되자 하루 종일 컨베이어 라인에만 머무르던 노동자들이 라인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20% 가량 늘어났다. 이 결과 동일한 근육의 반복 사용으로 인한 직업성 질환의 발생률이 떨어지고 노동자들의 일에 대한 만족도가 월등히 증가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컨베이어 라인 작업자들이 자율적으로 로테이션을 실시하는 경우가 조금씩 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같은 직무 내에서라도 자리를 바꾸어 지루함과 피로도를 덜기 위한 자구책일 뿐 직접작업과 간접작업 간의 순환은 아니다.
한림대학교 사회학과 박준식 교수는 “단순 반복작업의 강도 강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은 고령화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생산방식”이라며 “생산현장의 시스템과 조직운영을 유연하게 바꿔 고령자들의 장점인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생산직 노동자의 다기능화를 실현할 경우 작업자의 숙련도 증가하게 된다. 노동자의 숙련 증가는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져 숙련-생산성-임금간의 선순환 구조를 마련할 수 있다. 동아대학교 경제학부 강신준 교수는 “단순 직무를 복합 직무로 재설계하면 숙련 및 생산성 향상을 기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경영악화로 강제 고용조정이 필요한 시기에도 노동자를 숙련향상 기구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해고를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증대하고 있는 고령노동자들을 경쟁력 요소로 바꾸기 위해서는 작업방식 전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작업방식의 전환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훈련이 필수적이다. 특히 고령자들이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 및 조직 환경에 적응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청년기에 쌓아온 경력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지속적인 재교육의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대우자동차의 한 노동자는 “3개월이면 초보자나 왕고참이나 수준이 똑같아지는 컨베이어 작업에서 새로운 재미를 발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지속적 교육 훈련을 통한 새로운 기능의 학습은 노동자의 숙련뿐 아니라 만족도 향상에도 큰 역할을 한다. OECD는 ‘21세기에 진입하는 데 있어 평생학습은 필수적이며 모든 사람은 평생학습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만인을 위한 평생학습’을 선언했다.

 

생산성-임금 간 격차 극복해야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2002년 현재 우리나라 기업의 78%가 근속연수가 늘어남에 따라 임금이 자동적으로 증가하는 연공급 체계를 가지고 있다. 경제 시스템의 고령화 속에서의 연공급제는 자연적으로 인건비의 증대를 초래해 기업이 고령자 고용을 기피하도록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현재 우리나라의 300인 이상 기업의 평균 정년연령은 56.6세지만 심지어 30대도 명예퇴직대상이 되는 이른바 ‘삼팔선’ ‘오륙도’ 붐이 일고 있는 것은 연공급 체계와 무관하지 않다. 때문에 월급을 많이 받는 사람일수록 구조조정 1순위로 몰리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기업들이 비정규직이나 아웃소싱 등을 선호하는 원인 중 하나도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 경쟁력에 있어서 생산성을 초월하는 임금 상승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D조선의 인사팀 관계자는 “조선업의 경우 통상  40세 가량에 생산성이 최고조에 이르는데 이미 노동자 평균 연령이 45세에 이르고 있어 생산성 저하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임금이 오르는 만큼 생산성이 함께 올라준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며 “중고령자의 소비규모를 고려할 때 무조건적으로 임금을 문제 삼기보다는 임금이 오르는 만큼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 방안을 적극 모색할 필요도 있다”고 제안했다. 


고령자의 경제활동 주기를 늘리기 위해서는 연공급 중심의 임금 구조에 대한 전략적 검토도 필요하다. 금속산업연맹의 노재열 정책실장은 임금체계의 개편 필요성에 관해 “나이가 들면 힘이 떨어지니까 노동시간을 줄여야 하는데 시간급 노동자들의 경우 노동시간이 임금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노동자 스스로 일을 줄이지는 않는다”면서 새로운 임금체계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고임금화 추세 속에서도 고용과 성장을 함께 달성하기 위해서는 생산성에 상응하는 임금체계 변경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지속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