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 승인 2004.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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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여름, ‘지역’이 들썩들썩, 시끌벅적하다.
지난해 12월 통과된 지방분권특별법과 국가균형발전특별법, 산자부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산업단지 클러스터 조성사업, 교육인적자원부가 추진하는 지방대학 혁신역량강화사업,전국경제인연합회가 제안한 기업도시 조성까지 경제·사회 주체들의 지역에 관한 관심은 가히 건국 이래 최대 수준이라 할만하다.

 

지역에 대한 관심은 세계 각국에서는 이미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세계화 확산 초기에는 지역경제가 급속히 붕괴할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세계 각국에서 특성화된 지역의 발전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에 비춰 세계화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경제 단위로 ‘지역’이 떠올랐다. 유럽연합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한 자금 적립, 지역경제 발전모델의 발굴과 확산이 경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지역발전의 중요성은 경제적 성장에만 있지 않다. 세계화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로 인한 고용불안, 복지축소에 따른 사회불안 등을 심화했다. 노조 조직력의 저하, 노사대변기구의 분권화, 노사간 힘의 불균형 또한 소득격차와 지역노동시장의 불균형을 심화하는 요인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 들어 노동시장 정책이 국가를 기반으로 한 접근에서 지역에 기반한 접근법으로 이동하고 있다. OECD 지역개발국은 지역파트너십에 기초한 지역노동시장 정책추진을 세계화의 불균형 해소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할 유용한 방법으로 적극 추천하고 있다.

 

지역혁신의 꽃 활짝, 꽃술은 어디갔나

우리나라에서도 김대중 정부 후기부터 지방분권과 지역혁신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시작됐다. 특히 지난해 12월 지방분권특별법과 국가균형발전특별법 제정으로 지역혁신에 관한 논의는 탄력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지역에서 혁신논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창원지역은 지난 6월 발표된 산업단지 혁신클러스터화 추진방안에서 ‘첨단 기계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됐다. 하지만 지역 노동계는 별로 달갑지 않은 눈치다. 통일중공업 노동조합 신천섭 지회장은 “전통 기계산업의 쇠퇴와 공장의 해외이전으로 노사가 치고받고 난리인 상황에서 ‘첨단기계클러스터’라는 거창한 말이 눈에 들어오겠냐”고 반문한다.

 

신지회장은 “수십 년 동안 지역 경제의 뿌리역할을 했던 기계산업이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새 산업 들여와서 지역경제를 살린다니 답답한 노릇”이라며 지역 노사의 현안이 반영되지 않은 혁신사업을 비판했다. 이어 그는 “첨단산업은 고용창출 효과가 미미한데 남들 다 간다고 첨단으로 가면 그동안 기계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과 지역민은 어떻게 할 거냐”며 우려를 표했다.


지역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대기업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대자동차는 올해 들어 울산 오토밸리 추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설립된 자동차부품혁신센터에 담당자를 파견했다. 하지만 기대치는 높지 않다. 현대자동차 부품 개발부의 한 관계자는 “오토밸리에 참여할 동기가 부족하다”고 말하고 “기업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통해 어떻게 기업의 이익을 보장할 것인가 인데 이에 대한 논의보다는 대기업이니까 돈 좀 내놓고 얼굴도 내밀라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고 꼬집었다.


울산오토밸리 프로젝트는 지난 2002년부터 추진된 부품산업 집적지 조성 사업으로 ‘완성차와 부품업체간의 협력강화와 경쟁력 동반상승을 도모, 세계적 자동차부품 단지를 조성한다’는 청사진을 그리며 출발했다.


하지만 정작 울산지역의 자동차부품업체는 해외 진출을 앞두고 보따리 싸기에 바쁘다. 울산 지역 내 자동차 관련 업체의 중국 투자규모는 지난 95년 이후 지난 2002년 말까지 모두 11건, 285억9840만원으로 서울에 이어 전국 2위를 기록했다. 2003년 한해동안 중국투자 금액만도 약 53억4600만원에 달하는 등 지역 부품업체의 ‘짐싸기’는 빠르게 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1차 부품업체인 S공업 노동조합의 한 임원은 “공장이 중국으로 몰려가기 바쁜데 건물 몇 개 더 짓는다고 기업이 남아있겠냐”면서 “경쟁력 있는 사업을 유치한다는 화려한 주장에 오히려 소외감만 느낀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지역신문과 경제단체에서는 “자동차 산업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오토밸리에 첨단 IT 벤처기업을 유치해 신산업을 육성하자”는 의견마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부품·소재 혁신단지로 선정된 반월시화지역은 중소기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중소기업 인력난과 기술력의 부족은 혁신단지 구성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산업기술대 현동훈 교수는 “지역 혁신의 성패는 고급의 노동력에 달려있다”고 전제한 후 “대기업의 연구소 유치와 노동력의 교육훈련이 부족한 현재의 상황에서는 지역 경쟁력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31면>

 

‘지역 인재’가 경쟁력이다

지역단위의 경제 활성화를 통해 ‘자본의 떠남’을 막고 경쟁력과 지역구성원의 삶의 질을 함께 높인 외국의 사례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 위스컨신지역의 ‘훈련파트너십’과 영국의 ‘노조학습기금’을 매개로한 지역노사파트너십은 지역노동시장의 숙련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고급 노동력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숙련연구 ▲생산과정 혁신 ▲구직자 및 실업자 지원 ▲신규노동력 발굴 등이 두 지역의 공통된 사업이다.


도요타시티로 유명한 일본 아이니치현의 노사정은 고도의 기술과 노사협력을 바탕으로 고임금 및 고용안정을 유지하는 하이 로드전략을 채택했다. 이 지역의 경쟁력과 고용안정을 위한 노사정 삼자 회의는 ▲노사정고용협의회와 ▲근로자복지추진위원회로 구성되어 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는 노동조합의 전략적 선택이 지역을 살린 경우다. 90년대 초 지역 경제가 위기에 빠지자 노동조합은 비용절감으로 경쟁력 향상을 꾀하는 기업의 태도에 비판을 가하고 생산성 모델로의 전환을 제안했다. <관련기사 32면>
네 지역의 경제환경과 기업-노사 문화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성공에는 공통점이 있다. 지역혁신의 필수요소로 인력양성과 기술개발을 꼽았다는 점이다. 지역전략산업과 인적자원개발 및 직업훈련사업 간 연계 강화가 성공의 열쇠였다.


또 다른 공통점은 노동조합의 역할이다. 노동조합은 프로그램의 기획에서 실행까지 지역기업과 대등한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노동조합의 참여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구조조정과 산업구조 혁신이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도록 만들었다.


지역의 산학연 간의 연계가 강조되고 있지만 품질향상과 인력개발의 한 당사자인 노동자의 참여는 거의 보장되지 않는 우리 실정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지역혁신의 싹이 트고 있다

국내에서도 의미 있는 실험은 시작되고 있다.
지난해 11월과 지난 3월 포항지역의 노동계, 사용자단체, 시민단체는 ‘철강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고용안정,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주제로 두 차례의 포럼을 열었다. INI스틸 포항공장 노동조합 최영민 지회장은 “철강산업이 당면한 위기를 기업만의 위기가 아닌 노동자와 지역사회의 생사여부로 인식하고 공동 대응을 만들어 가자”고 주장했다.


현재 포항지역 노사공포럼은 철강산업경쟁력 강화와 지역 일자리 창출을 위해 ▲지역 철강산업 및 노동시장 구조 ▲노사관계 및 지역 내 직업훈련 시스템 ▲문화실태 및 주민 의식에 관해 공동의 연구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지방분권운동 포항본부 김동억 기획실장은 “각각의 이해 영역에만 머물러 있던 노사가 지역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공동의 의제에 관해 공론화를 시작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출발”이라고 평가했다.


울산에서도 지역혁신을 위한 민간기구인 시민포럼이 구성됐다. 이 포럼은 오토밸리의 비전과 실행력 담보를 위해 지역 노사를 비롯해 시민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울산 지역경제의 발전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공동협약(가칭)’을 제안했다.
울산대학교 사회학과 조형제 교수는 “오토밸리 사업이 공단조성이나 건물 신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운영할 경제주체들의 혁신능력 배양에 초점을 둬야 한다”며 “노동자의 재교육과 직업훈련 등 지역혁신의 열쇠인 인력개발에 집중하려면 노사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일터와 삶터의 발전을 위해

이런 의미 있는 실험이 싹트기 시작했지만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단계에서 형성된 대부분의 지역산업단지는 오늘날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노동비용을 둘러싼 노사의 갈등, 지역민의 반기업-반노동정서 확산은 지역공동체의 공존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 화섬산업의 메카로 불리던 구미, ‘경제의 혈액’을 공급하는 여수 석유화학산업단지에서는 공급과잉과 경쟁력 저하에 따른 산업구조조정과 노동비용을 둘러싼 노사간의 갈등이 이미 폭발했다.
여수경실련의 박효준 사무국장은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번 사태를 통해 그간 노동문제를 지역문제와 별개로 생각해 왔던 것을 반성하고 있다”며 “여수산단의 파업사태는 한 대기업의 노사분규가 지역 경제와 안정을 뿌리째 흔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며 걱정했다.


한국노동연구원 임상훈 박사는 “현재의 지역은 하나의 대기업 노사의 이기심과 비용싸움이 절대적으로 관철되는 ‘기업왕국’에 불과하다”며 “지역 노사 모두가 기업이 만든 섬 안에서의 혜택 확대에 주력할 것이 아니라 지역과의 공동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일자리 없는 성장과 경제 체질 저하는 더 이상 노사 어느 한 쪽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노동자의 삶과 기업, 지역공동체 모두의 운명을 좌우한다. 한때 번영을 구가하다 탈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몰락한 선진국 도시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지역사회 주체의 혁신능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