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일터? ‘만나고’ ‘만들면’ 된다
행복한 일터? ‘만나고’ ‘만들면’ 된다
  • 권석정 기자
  • 승인 2009.11.1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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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그 사람이 자신의 뜻을 이루는 데 내가 도움을 주는 것’
‘조금 나이 든 청년’ 주철환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80년대 초중반, 반마다 별명이 ‘꿈동산’인 녀석들이 한둘씩은 있었다. ‘꿈동산’들의 공통점은 모두 머리가 크다는 거였다. 연기자가 인형 탈을 쓰고 나와 가분수처럼 머리가 컸던 <모여라 꿈동산>의 영향이었다. 그 시절, 존스턴 매컬리 원작의 탐정 소설을 극화했던 ‘검은별’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까불거리는 목소리의 성우 배한성이 탐정 바베크 역을, 중후한 중저음이 매력적인 성우 박일이 악당 검은별 역을 했던 ‘불후의 명작’이었다.

80년대 후반, 대학생들의 퀴즈 대결 <퀴즈 아카데미>의 열풍도 대단했다. 학교 혹은 지역 대항전의 열기를 만들어냈던 고교생 대상 <장학퀴즈> 이후 내리막을 걷는 듯 했던 퀴즈 프로그램의 인기를 단숨에 끌어올렸던 <퀴즈 아카데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우승자에게 내건 유럽 여행권이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엄마가 보고플 때 엄마 사진 꺼내놓고…’로 시작되던 노래를 기억하는가. 시커먼 얼굴에 획일적인 군복을 입은 ‘군인’들도 결국 인간이었음을 보여줬던, 노래 한 구절만으로 60만 군인들을 눈물짓게 만들던 그 프로그램, 바로 <우정의 무대>다.

30대 후반, 40대 초반 독자들의 성장과 궤를 같이 했던 이 프로그램들을 만든 이가 바로 주철환(55)이다. 이 외에도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일요일 일요일 밤에>와 같은 프로그램을 성공시키며, <느낌표>의 김영희, <무한도전>의 김태호보다 앞서 최초의 ‘스타 PD’로 불렸던 주철환.

그의 인생은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에서 방송사 예능 PD, 대학 교수를 거쳐 방송사 CEO까지 쉴새 없이 달려오더니 이번에는 불쑥 음반을 내놨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열혈 ‘장년’을 만났다.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그는 쉰다섯 ‘청년’이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자연인’ 주철환

수많은 ‘경력’ 탓에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순간, 그는 헝컬어진 머리칼에 청바지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명함 대신 자신의 음반을 건넸다. 음반 커버에는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로 보이는 ‘20대 청년 주철환’이 웃고 있었다. 사진 속 미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주철환은 자신의 음반에 사인을 해주며 말문을 열었다.

“(음반 커버사진을 가리키며)대학교 2학년 때 사진이에요. 지금의 나와는 너무 다른데, 30년도 더 된 사진이니까. 이게 75년 사진인가 그럴 거예요. 앨범에 제가 직접 만들었던 퀴즈아카데미, 모여라 꿈동산 주제가도 넣었어요. 내 청춘의 기록이니까.”

그는 최근 자신이 직접 만든 노래 10곡이 담긴 앨범을 발표하고 지난 9월 26일에는 단독공연까지 가졌다. 작사·작곡에 노래까지 소화해냈으니 엄연한 ‘싱어송라이터’다. 중·고등학교 국어선생님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방송국 PD, 대학교수, CEO 등을 거치면서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온 주철환. 그렇다면 ‘가수’는 그에게 다섯 번째 직업일까?

“음반내고 공연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어요. 정말 너무나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꿈을 이룬 것 같아 대단히 만족스러워요. 근래에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일 같아요. 지난 2월 16일 OBS 대표이사직을 그만두고 올해는 저에게 안식을 취하는 해라고 볼 수 있는데, 노래는 직업이라기보다는 안식의 일환이에요.”

그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장례식 때 이 노래들을 틀어달라고 당부했다며 웃었다. 1983년 방송국에 입사한 이래 ‘재미있는 TV’를 위해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온 주철환. 55세에 맞은 안식의 해에 그는 그동안 가슴 한 켠에 간직해온 자신의 꿈을 실현시켰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그가 여러 직업을 통해 추구해온 꿈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재미’가 기준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주철환은 이제까지 네 개의 각기 다른 직업을 거쳐 왔다. 교사, 방송국 PD, 교수, CEO 등 매번 새로운 직업을 선택할 때마다 그에게 기준점이 되었던 것은 다름 아닌 ‘재미’였다. 안정된 직업인 교사에서 PD로 이직을 한 이유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또 교수에서 방송국 CEO으로 옮겨간 이유도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는 주철환. 그가 생각하는 일터에서의 ‘재미’란 도대체 뭘까?

“총괄적으로 얘기하자면 젊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가장 큰 재미였어요. 교사를 할 때는 아직 여물지 않은, 완성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꿈을 넣어준다는 것이 재미있었고, PD는 말할 것도 없죠. 대중들이 미처 몰랐던 김건모, 신승훈, 이휘재 같은 친구들의 어렸을 적 꿈에 대해서 이해하고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도록 해주는 일이었으니까요.”

그가 말하는 ‘재미’란 기본적으로 ‘소통으로 인한 사람 간의 작용·반작용’이다. 더 나아가서는 상대방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끌어내고 또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직업을 자주 바꾼 것 같지만 사실 무대만 바뀌었을 뿐 일하는 방식이나 추구한 바는 같았다. 결국은 꿈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자 한 것”이라고 말한다.

 

꽃바람 부는 대로 흐르는 세상 뭐 신나는 게 없을까

가는 대로 버려두긴 아까운 날들 멋지게 살아보세

어린 시절에 꿈을 꾸었지 오 내 친구야

이제는 떠나야지 꿈들을 찾아 퀴즈 아카데미로

 - 주철환 작 <퀴즈 아카데미> 주제가 中 -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행복한 일터’는 서로를 만들어가는 것

사실 재미에 대한 기준이 저마다 다르듯, 모두가 주철환처럼 일터에 재미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최근 직장인들의 고민은 “직장이 재미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대해 그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에 대한 그만의 해석을 꺼내놨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을 보면 포도청이 감옥이잖아요.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감옥살이를 한다는 것인데 비참한 일 아닌가요? 하지만 행복한 일터는 만들기 나름이에요. ‘어디서 일하느냐’보다 ‘누구와 만나서 일하느냐’가 중요하죠.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누구를)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관계를)만드는 것’이에요.”

일터에서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세종대왕’을 언급했다.

“사실 행복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장을 이끄는 리더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요. ‘창조적 리더십’이 중요하다고들 이야기하는데 예를 들어 세종대왕 같이 창조적이면서 아랫사람의 아이디어를 끌어낼 줄 아는 리더를 만난 집현전의 학자들은 매우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리더를 못 만났다면 한탄한지 말고 그런 리더를 만들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해요. 뛰어난 인재들끼리 만난다고 해도 결국 서로를 만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일터에서 서로가 모자란 부분에 대해서 보완을 해주고 조언도 해줘야 하는데 마음에 안 든다고 ‘이건 아니다’라며 상대방을 무시해버리고 내버려두는 것은 나약한 행동 아닌가요?”

즉, 우리가 일하는 현장의 수장들이 ‘세종대왕’이 아니고 우리 또한 ‘집현전의 학자’들이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서로를 만들어나가려는 노력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렇다면 ‘CEO 주철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교사 때부터 이어져온 그의 소통에 대한 노력은 OBS 경인방송 대표이사 시절에도 쭉 이어졌다. 그는 OBS 경인방송 당시 전 직원 250여 명의 이름을 외우고 직원들에게 수시로 이메일을 직접 보내거나, 때로는 직원들과 호형호제(呼兄呼弟)를 시도하는 등 ‘유별난 사장님’으로 유명했다.

“경인TV에서의 내 역할은 기본적으로 경영을 하고 수익을 올리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보다도 나는 프로그램 만드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나의 아이디어를 전해주고 같이 고민도 하고, 이런 작업들이 너무 재미가 있었어요. 결국 저는 일터라는 공간에서 인간을 만난다는 것 자체를 즐겨온 거죠. 사람들한테 내 생각을 얘기하고, 내가 그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그들도 변화되고 나도 변화되고, 같이 성장하고 그런 것들이 재미있고 의미가 있는 일이었어요.”

주철환은 이상주의자?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OBS 경인방송 대표이사 시절 주철환 ‘사장’이 만들고자 했던 일터는 바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일터, 회사 구성원들이 서로로 인해서 함께 성장해나가는 일터, 그리고 창의적인 일터였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일터’를 만들기 위해 직원들과의 친목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다.

“직원들과 동등하게 눈높이를 맞추면서도 리더로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어요. 3년, 5년 후의 OBS를 제시했죠. 직원들에게 ‘지금 우리가 월급도 적고 노동 강도가 센 것은 어쩔 수 없다. KBS, MBC에 비해서 후발주자고 인원도 그들의 5분의1, 10분의1 정도이니까 그들을 이기려면 일을 몇 배로 많이 해야 한다. 게다가 월급은 더 적지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진 미래가 올 것이다’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생각지 못한 걸림돌이 많았죠.”

PD로 살아온 그에게 있어서 ‘경영’이라는 것은 녹록치 않은 ‘관문’이었다. 결국 주철환은 자신의 본래 임기보다 조금 일찍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에 대해서 조심스레 묻자 그는 “‘현실은 냉혹하다’지 뭘”이라며 운을 띄웠다.

“‘현실은 냉혹하고 난 대단히 낭만적인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막상 대표이사로 가보니 현실은 정말 내가 생각지 못했던 난관들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것을 내가 다 풀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죠.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왜냐? 최선을 다했으니까. 난 손을 놓거나 넋 놓고 있지 않았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어. 난 우리 직원들에게 희망을 버리지 말자고 항상 얘기했어.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항상 심어줬고 그들의 손을 잡아 주었으며 그들과 동고동락을 했어요. 그런 면에서는 전혀 후회가 없어요. 결국 당시 경험을 통해서 나도 성장했고 회사도, 직원들도 함께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OBS 경인방송에서 주철환은 직접 진행을 맡은 ‘주철환 김미화의 문화전쟁’을 비롯해 ‘진실과 구라’ 등 참신한 프로그램들을 다수 기획해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OBS는 지역 민방이라는 한계, 광고수주 등의 문제로 인해 적자운영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적지 않은 직원들이 ‘경영자 주철환’을 그리워한다고 한다. 왜일까?

“내가 직원들을 사랑했으니까. 그것은 확실해요. 사랑은 여러 가지 있는데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랑은 ‘그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자신의 뜻을 이루는 데 내가 도움을 주는 것,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정의내립니다. 그들이 잘되기 위해서 참을성을 가지고 길게 지켜봐주는 것, 직원들을 사랑한 것이죠.”

주철환은 이임식이 있던 날에도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띄웠다. 그는 직원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안에 <다 지나간다>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보탰고, 훗날 그 시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를 만들었다.

 

한숨도 근심도 눈물도 웃음도 다 지나간다

사랑도 이별도 성냄도 시샘도 다 지나간다

슬픔도 기쁨도 박수도 갈채도 햇살도 빗물도 바람도 구름도

안개도 이슬도 무지개마저도 다 지나간다 다 떠나간다

 - 주철환 앨범 <다 지나간다> 中 다 지나간다 -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사장님? 교수님? 나는 주철환 PD다

주철환은 요즘 기업이나 공공기관, 대학 등에서 인기강사로 활약 중이다. 여전히 바쁘지만 틈만 나면 그는 TV를 켠다. TV 속에서 배울 게 너무 많다는 주철환. 그에게 TV는 ‘책’과 같다.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을 PD로 살아온 그. 다시 한 번 ‘TV’라는 책을 엮어내고 싶지는 않을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PD는 꼭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은 일이에요. 굳이 예능PD를 고집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지금의 젊은 PD들과 겨뤄서 내 존재감을 나타내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나는 젊은 피디들이 못하는 것을 해야지. 나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언젠가 또 보여주고 싶어요. 주철환이 80~90년대 PD인데 2015년에 다시 프로를 가지고 화려하게 돌아오는 거야. 괜찮지 않아요?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나를 가리켜 ‘변화를 즐기는 삶’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맞아요. 평탄하게 살고 싶지 않아. 여전히 내 자신이 변화를 원해요.”

주철환과 얘기를 나누면서 든 생각은 ‘주철환은 주철환이다’라는 거였다. 그를 굳이 교사, PD, 교수, 사장으로 규정지을 필요는 없었다. 이 ‘조금 나이든 청년’을 굳이 호칭으로 얽어맬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저 지금껏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주철환답게’ 살아갈 것이기에.

어쩌면 그가 꿈꾸는 세상은 ‘좀 젊은 청년’이던 주철환이 만든 <모여라 꿈동산>의 주제가 속에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세상에는 ‘아무라도 좋’다. 그곳엔 ‘담장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는 지금껏 ‘재미있는 세상’을 꿈꿔왔고, 여전히 그 꿈을 ‘짓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짓다’를 ‘재료를 들이거나 섞어 만들다, 시, 소설, 편지, 노래 가사 같은 글을 쓰다, 한데 모여 줄이나 대열을 이루다, 논밭을 다루어 농사를 하다, 꾸미다’라고 풀어놨다. 딱, 주철환이다.)

숲길을 따라 구름을 타고 꿈동산에 왔어요

새들은 날아 꽃들은 피어 노래하는 꿈동산

하늘 아래 땅 위에 모두가 친구죠

아무라도 좋아요 꿈동산엔 담장이 없으니까요

 - 주철환 작 <모여라 꿈동산> 주제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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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의 관계 개선? ‘부흥회’를 해라

주철환은 현재 군복무 중인 아들과 ‘절친’이다. 이번에 낸 앨범 중 한 곡은 아들이 노래를 불렀고, 공연에는 휴가 나온 아들이 직접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아들뿐만 아니다. 아들의 친구들과 같이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여친’을 집으로 데려와 같이 밥을 먹는다.

‘비법’을 물었더니 ‘즐거운 스폰서’가 되란다. 아이들이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냐며, 그리고 매일 보는 것도 아닌데 한번씩 만날 때마다 자녀와 친구들이 먹고 싶어 하는 것을 사주란다. 굳이 아이들 대화에 끼어들지 않더라도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것을 듣고만 있어도 즐겁단다. 모르는 얘기가 나오면 물어보면 된단다.

‘출발선’이 다른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가깝게 지냈다면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 아이와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하고 해보려고 하면 쉽지 않다고. 그랬더니 종교 가진 사람들의 ‘부흥회’를 한번 생각해 보란다.

눈물도 흘리고 한 번 극적인 모멘텀이 필요하단다. 어떤 계기를 만들고, 그런 다음에 ‘그동안 바빴고, 대화도 부족했고, 아빠 역할 못했는데,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내가 달라지려고 한다. 쑥스럽지만 아빠가 달라졌다고, 미쳤다고 생각하지 말고 받아들여 달라’고 말해야 한단다.

그리고 시간 없다는 것은 변명일 뿐이라고 단호한 어조로 강조했다. 아이와 대화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사랑을 하되 표현하지 않는 것은 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