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은행 임금협상에 노사는 없었다?
국책은행 임금협상에 노사는 없었다?
  • 김관모 기자
  • 승인 2009.11.1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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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평가와 예산승인권 목줄 쥔 정부
사 “개별교섭이 유리” VS 노 “산별교섭이 해법”

ⓒ <참여와혁신> 포토DB

2009년 9월 30일 저녁, 추석 연휴를 앞두고 한 호텔 회의실에서 국책은행인 산업·기업·수출입은행의 은행장들과 노조 위원장들이 마주했다. 이날 회의의 주제는 은행직원 임금삭감이었으며 이들은 서로 배수진을 친 채 반드시 결론을 내겠다는 각오로 새벽까지 이르는 마라톤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10월 4일 3개 국책은행은 전 직원 임금 5% 삭감과 25% 연차사용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한국은행과 기술보증기금, 신용보증기금 등 국책금융기관들도 차례대로 임금삭감과 연차의무사용 등을 발표했고 하나은행 등 시중은행들도 임금반납결정을 밝혔다. 금융기관들은 ‘자발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경제위기 극복노력 및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에 동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위원장 양병민, 이하 금융노조)은 이번 교섭이 산별교섭을 무시한 명분 없는 임금삭감이라며 부당노동행위 고발조치 및 쟁의행위 등을 전개하고 있어 노사갈등이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임금삭감은 정부의 뜻?

올해 초 금융노조는 사용자단체에게 임금동결 등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사업을 제안했고 노사는 산별중앙교섭을 통해 합의문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조인식 직전 일부 금융공기업 기관장들의 반대로 노사합의는 결렬됐고, 수차례의 노사중앙위원회 및 노사대대표회의 등을 통해 노사가 의견을 개진해왔음에도 8월 20일 은행연합회가 교섭위임권을 개별 기관장에게 돌려주면서 산별교섭은 끝내 합의점을 찾는데 실패했다.

노동계는 산별교섭 결렬과정에서 정부의 개입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 정부에서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 등을 이유로 기존직원 임금 5% 삭감과 신입직원 임금 20~30% 삭감을 지시하고 있어 금융공기업 입장에서 이에 어긋나는 노사합의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후 정부에서 금융공기업에 9월 말까지 반드시 처리하지 않으면 별도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리면서 임금삭감을 둘러싼 갈등은 더욱 본격화됐다. 실제로 지난 9월 정부의 한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 “정부로서는 금융공기업의 기존직원 임금삭감이 제대로 진행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필요하다면 예산삭감과 기관장 경영평가 등의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은행지부 조성훈 정책국장도 “지난 8월 말 금융위원회가 금융공기업 부기관장들과의 회의에서 9월 말까지 임금삭감 등의 합의를 마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국책은행의 인건비예산 승인권을 금융위원회에서 쥐고 있어 대립각을 세우기 쉽지 않은 문제”라고 토로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책은행도 자체적으로 노동조합과 직원들에게 설득작업을 진행해 왔다.

금융노조 수출입은행지부 이지언 부위원장은 “김동수 수출입은행장이 기획재정부 차관 출신이다 보니 직접적으로 압박이 들어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회사에서는 이미 합의하기 6개월 전부터 은행장과 임원들이 직원 교육 등을 통해 임금삭감의 당위성을 설득해왔다”고 말했다.

산업은행지부 김명수 위원장도 “인사부 임원들이 자주 노동조합에 들러 고통분담을 이야기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정부의 압력이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지난 9월 29일 금융감독원 노사가 임금삭감에 합의했다는 보도가 알려지자 국책은행 노사의 움직임은 더욱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국책은행노조의 한 관계자는 “금감원장과 국책은행장들이 노사합의를 같이 하는 것으로 입을 맞췄는데 금감원에서 먼저 선수를 쳐서 국책은행장들이 당황해했었다”고 전했다.

노동조합들도 서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대표자회의 등을 통해 상황파악과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10월 1일 산업·기업·수출입은행 노사 대표자 모임이 계획되었을 때도 노조위원장들은 금융노조를 방문하는 등 사태수습을 고심하기도 했지만 결국 임금삭감을 피해가지 못했다.

이번 국책은행의 임금교섭 과정은 노사간 자율 교섭이 아니라 정부의 임금삭감 정책이란 울타리 안에서 노사가 시한부 줄다리기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다.

ⓒ 금융노조 기업은행지부

임금삭감, 타협은 없었다

이에 대해 사용자단체는 답답하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이번 노사교섭에서 금융노조가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은행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사용자단체의 요구를 금융노조가 반대만 하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밝혔다. 실제 8월 20일 중앙노사협의회에서 은행연합회 신동규 회장은 “협상에 진전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산별교섭은 무의미하다”며 “교섭위임권을 개별 기관장과 은행장에게 돌려주겠다”고 발표했다.
일부 은행들이 이미 연차 의무 사용과 임금 반납 등을 시행하고 있는 시점에서 산별교섭을 이어가는 것보다 개별 금융기관 노사가 협상을 하는 것이 더 나은 것 아니냐는 입장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임금삭감만은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의제였다. 한 국책은행 노조위원장은 “임금삭감에 최초로 사인한 집행부로 남고 싶은 위원장이 어디 있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IMF사태 때도 임금반납으로 마무리 지었던 금융권에 처음으로 임금삭감이 언급된 것이다. 한 노동조합 간부도 “아무런 명분도 개런티도 없는 무조건적인 동의를 조합원들에게 설명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임금문제와 관련해 하나은행지부 김창근 위원장은 “임금은 삶의 질과 관련돼있기 때문에 민감한 사안”이라며 “조합원들도 회사가 임금삭감을 해야 할 분위기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정도로 성숙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투명성이 보장되고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조합들은 이번 임금삭감에서 투명성이나 소통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번 금융공기업의 임금삭감 과정에서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했다기보다 선조치 후논의의 순으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노사가 진전 있는 대화보다 기싸움의 형식으로 대립해온 셈이다.

이는 지난 10월 1일 국책은행장들과 노조위원장들의 회의 진행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수출입은행지부 이지언 부위원장은 “은행장들이 더 이상의 임금삭감은 없을 것이란 입장을 정부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노조위원장들은 문서나 확실한 근거 없이 믿을 수 없다며 반발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기관장들이 임금삭감을 반대해도 금융위원회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결국 노사간 맺은 임의적인 협의사안도 공염불이 될 공산이 크다. 또한 기획재정부는 이번 임금삭감에 대한 노사합의 과정에서 차후 보상책을 마련해주는 이면계약을 맺을 경우 CEO 해임 등 중징계에 처할 방침을 세웠다.

즉 노사가 임금이나 단체협약을 자율적으로 채워갈 가능성은 이미 배제된 상태에서 임금삭감이란 카드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임금삭감, 아직 끝이 아니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올해 국책은행 임금삭감을 시작으로 금융공기업의 임금삭감 및 연차의무사용은 마무리단계에 들어갔다. 노동조합과 사용자 단체들도 각 현장 조합원들과 직원들에게 이번 임금삭감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며 상황 수습에 들어간 상태다.

김명수 위원장은 “고통분담 차원에서 사측이 계속 제기해왔던 만큼 힘들지만 임금삭감을 결정해야 했다”며 “이번 기회를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로 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조성훈 국장도 “임금삭감으로 정리되기는 했지만 올해 한국노총 차원에서 투쟁 중인 복수노조와 전임자임금 관련 문제가 끝나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부의 공기업선진화방안과 경제전망에 대한 불투명성이 계속 은행원들을 죄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지언 부위원장은 “애초에 정부가 요구하던 임금삭감은 20%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작년에도 임금동결로 고통 분담했는데 올해는 임금삭감이다. 또다시 무엇을 내달라고 할지 조합원들이 불안해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금융공기업과 은행을 바라보는 여론의 시각도 문제다. 이번 정부의 금융정책이 금융기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여론의 힘을 등에 업었다는 것이 노동계의 지배적인 평가다. 언론들은 그동안 국책은행은 물론 공적자금을 받고 있는 은행들의 기관장 임금과 은행원의 평균 임금을 거론하면서 정부의 임금삭감정책에 지지를 보냈다.

한 언론은 사설을 통해 “직원 임금 동결이 아닌 마이너스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며 “금융노조가 노사관계 자율성을 운운할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못 박기도 했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들은 2008년 산별중앙교섭에서 임금동결에 합의했고 올해도 임금동결을 통해 일자리 나누기 사업에 동참할 계획이었다며 반발했다.

수출입은행지부 김관 위원장은 “수출입은행의 경우 노사합의로 2년 연속 임금동결을 했고 체제도 개편하면서 직원과 팀도 10%나 줄인 상황”이라며 “매년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이미 임금삭감이나 다름없는데 외부적인 시선마저 좋지 않다보니 조합원들은 피폐해진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시중은행노조의 한 관계자는 “올해 초 일자리나누기를 계획했지만 정부에서는 임금과 인원은 줄이면서 신입직원이 아닌 인턴채용만 강조하고 있다”며 “아버지를 잘라서 아들을 일용직에 고용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산별교섭 복원으로 노사교섭 책임성 강화하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노조에서는 결국 산별교섭이 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용자단체를 법인화하고 산별교섭을 강화한다면 자율적인 노사교섭 아래 보다 책임성 있는 노사합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간 금융권 노사는 임금동결을 통해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고통분담 및 고용안정 사업과 비정규직 문제, 근무시간 정상화와 영업시간 변경 등의 성과를 산별교섭에서 이뤄냈다.

하지만 현재 산별중앙교섭은 극심한 혼란 속에 빠져있다. 은행연합회가 개별 기관에 위임권을 돌려준다고 발표해, 2000년 금융산별교섭을 시작한 이후 10년 만에 산별교섭체제가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금융노조는 은행연합회와 교섭해당 금융기관장들을 부당노동행위로 중앙노동위원회에 고발하는 한편, 개별교섭에 따른 임금협상에 대해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계획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산별체제가 다시 회복되기까지 적잖은 진통이 예상된다.

산별교섭을 둘러싸고 국책은행노조와 시중은행노조간 입장차도 문제가 되고 있다. 시중은행은 노사교섭이지만 국책은행은 노정교섭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다보니 연대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앙금으로 남을 수 있다. 국책은행노조의 한 간부는 “시중은행노조가 먼저 개별교섭을 통해 임금반납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국책은행노조가 버틸 방법이 없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시중은행노조도 불만이기는 마찬가지다. 실제로 금융노조 조합원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산하 지부 수로 보면 37개 지부 중 10개도 채 되지 못해 자신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금융노조가 국책은행을 비롯한 금융공기업들의 입장에 더 치중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하지만 금융노조는 산별체제만이 개별교섭에 따른 불이익을 해소하고 공공성에 대한 명분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금융노조는 10월 8~9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고 한국노총의 복수노조·전임자임금과 관련한 대정부투쟁에 참가해 정부를 압박하고 산별교섭체계를 복원시킬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노사 모두 아쉬운 ‘자발적 합의’

이번 국책은행 임금교섭 상황은 노사의 자율 교섭이 아닌 정부의 개입과 노사간 대립적 구도 속에서 양측 모두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사용자단체들은 정부의 금융정책을 이유로 아무런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고, 노동조합은 3월의 교섭 결렬 이후 임금삭감이란 난제에 묶여 발 빠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반년 동안 노사의 줄다리기는 정부의 최후통첩 앞에 사실상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셈이다.

금융산별교섭 역시 많은 숙제를 안게 됐다. 이번 산별교섭을 통해 노사의 대표성과 산별의 효력이 여전히 미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개별기관들이 산별교섭에 집중하지 못하고 느슨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금융노조와 사용자단체들이 각 기관들의 개별현안에 대해 산별교섭에서 어느 정도 실효성 있는 기준과 책임성을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

2009년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금융권 노사들도 대부분 임금 및 단체교섭을 마무리 짓고 있지만 누구도 이것을 끝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자발적 합의’라는 말이 실은 그들이 얻어야 할 화두가 되어버린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