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도, 놀이도 아이들 것으로 돌려주자
공부도, 놀이도 아이들 것으로 돌려주자
  • 송종대_ 놀이전문가
  • 승인 2005.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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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성공, 놀이=실패’의 철옹성에 갇힌 아이들

얼마 전,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머리를 싸매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애 터지게 공부를 가르친 보람도 없이 아들의 시험 점수가 엉망이라고 했다. 점수를 물으니 90점이 넘는 과목이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아들을 위해 공부를 가르쳤는지, 자신을 위해 가르쳤는지? 아내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공부를 철저히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식보다 ‘지혜’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펴며 아내와의 입씨름에 물러서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책 읽을 줄 알고 학교 잘 다니는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한데 아내는 공부 잘하는 아들을 원하니 열을 받을 수밖에….


아내의 화는 그날 밤 에베레스트 산 정상 부근에 남겨진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는 엄홍길 대장의 이야기를 다룬 TV프로그램을 보면서 가라앉게 되었다. 욕심에 대한 스스로의 인정은 아닐지라도 인간의 ‘주검’을 보면서 느끼는 ‘허무’는 잠시나마 ‘삶’을 생각하는 자극이 되어 주었다.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아이들

 

나 역시 아들의 시험지에 100점짜리가 있으면 기분이 좋다. 그리고 경쟁사회에 도태되지 않는 아들딸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아들딸이 나의 꿈을 대신해 줄 대리인이 아니며 나의 지난 과거 속에 쌓여 온 ‘피해의식’을 충족시켜 줄 또 하나의 내가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 지금의 부모들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 가며 미래전쟁에 낙오되지 않는 ‘전사’로 아이들을 훈련시키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은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필자가 일하고 있는 체험학교에 온 아이들의 행동을 보며 도대체 우리 사회가 무엇을 교육시키고 있는지 의문을 가질 때가 많다. 
“선생님 물 먹고 싶어요.” “선생님 화장실 가고 싶어요.” “선생님 머리 아파요.”
자신과 관련 된 사소한 일까지도 ‘판단의 서비스’를 받길 원하는 수동적 아이들을 보며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사회가 아이들에게 짓고 있는 죄를 생각하게 한다.


어린 시절, 해가 질 때까지 실컷 놀고 집으로 들어간 나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날천날 놀기만 하면 나중에 인간이라도 되겠나?”


‘공부=성공, 놀이=실패’ 라는 어머니의 생각이 곧 사회적 가치가 되었고 이제는 철옹성과 같은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 우리의 어린 시절보다 더 많은 교육적 정보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이들의 능동성은 축소되고 외부 의존성은 늘어만 가는 것일까?

 

놀이는 인간을 만드는 과정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공부’의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닐까? 얼마 전, 체험학교에서 생겼던 일이다. “선생님 에어컨 리모콘이 없어 밤새 추워 죽는 줄 알았어요.” “코드를 뽑지!?” “아, 맞네!!” 현재의 교육현실을 상징적으로 비유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리모콘을 사용하는 기능은 배웠지만 에어컨이 전기로 움직인다는 상식을 알지 못해 리모콘이 없으면 바보가 되어버리고 마는 반쪽 공부….


다른 하나의 의문. ‘놀이’가 인간을 만든 과정은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을 돌아보니 술래잡기를 하며 다리 근육을 키웠고, 비석치기를 하며 공간에 대한 지각력을 키웠고, 팽이를 만들며 손 조작능력을 키웠고, 고누를 두며 머리를 굴렸고, 팔자놀이를 하며 경쟁심을 키웠고, 많은 놀이들을 통해서 규칙을 훈련하며 형들과 동생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사회성을 기르기도 했다. (우와~!)


위에서 열거한 순기능적 효과들을 전제하고 논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라도 되겠나’라는 어머니의 꾸중이 무색할 정도로 인간을 만드는 중요한 과정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아들의 출세를 위한 어머니의 바람 속 ‘공부’가 대부분의 아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고, 아들의 인간되기를 방해했던 ‘놀이’가 오히려 인간을 만드는 과정이었다면 이제 우리사회는 어머니의 꾸중과 바람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는 고백을 허용할 시기가 되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아이들의 공부와 놀이가 아이들의 것이 되어야지 어른들의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한편으로는 사회 한편에서 놀이의 순기능적 효과만을 강조하여 시대적 가치인양 포장시켜 또 다른 교육과 상품의 형태로 아이들에게 강요되고 있다는 점, 아이들의 놀이 세계와 놀이자발성을 회복하지 않는 가운데 방법과 기능만이 난무하는 ‘박제화(생명력이 상실)된 놀이’로서의 왜곡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