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앞에서 팬티를 내리는 게 이들 뿐일까?
카메라 앞에서 팬티를 내리는 게 이들 뿐일까?
  • 이현우_TV평론가
  • 승인 2005.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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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주의 판치는 세상의 엉터리 엄숙주의가 낳은 ‘해프닝’
‘내용’은 내팽개치고 ‘스타일’만 좇는 행태로는 해법 없다

모르긴 해도 요즘 MBC 관계자들은 울고 싶은 심정일 게다. 1년 동안 일어날까 말까한 ‘사건’들이 한달 새 마치 신들린 듯 꼬리를 물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최문순 사장 체제 출범 이후 MBC는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로웠다. 거의 비슷한 개혁과 변화의 이미지로 출발했지만 정연주 사장의 KBS가 연신 삐걱댄 것에 비하면 MBC는 심지어 임금 삭감 노사합의까지도 잡음 없이 마무리 지었다. 아무래도 ‘외부인’ 정연주 사장에 비해 ‘내부인’ 최문순 사장에 대한 거부감이 덜했기 때문일 것이다.

 

울고 싶은 MBC?


7월까지만 하더라도 ‘금순이’, ‘삼순이’에 더해 ‘문순이’까지 ‘3순’이가 MBC를 살린다는 콧노래가 나왔다. 그러나 전세의 역전은 한순간이었다. 초대박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이후 후속타를 내놓지 못한 채 ‘굳세어라 금순아’ 한 편만이 시청률 톱10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드라마에서의 부진이 일회성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대장금’의 이병훈 PD와 김영현 작가가 SBS로 옮겨가 ‘서동요’를 9월부터 방송한다는 소식에 더해, 이번에는 MBC 드라마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김수현 작가의 ‘사랑과 야망’이 SBS에서 리메이크 된다는 소식이다. 김수현 작가는 MBC에서 방송된 바 있는 ‘청춘의 덫’을 SBS에서 리메이크해 성공을 거둔 전력이 있다.


오락 프로그램에서의 부진도 부담스럽다.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를 예능국장으로 전격 발탁한 이후 스타 MC들을 ‘싹쓸이’ 하면서 오락 프로그램의 약진을 기대했지만 새롭게 신설한 ‘토요일’은 물론 기존의 ‘일요일 일요일 밤에’까지 시청률 부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신설 코너는 일본 프로그램 표절 의혹에 시달리는 중이다.


뭐니뭐니 해도 결정타를 한 방 먹인 것은 이른바 ‘성기 노출’ 사고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한 인디밴드 멤버들의 돌출적인 행동은 한동안 인터넷은 물론 각 신문, 방송에 요란한 소재거리를 제공했다.


결국 이 ‘해프닝’은 방송위원회로부터 시청자사과, 제작진 징계, 프로그램 중지 등 동원 가능한 모든 징계를 동시에 받는 ‘기록’을 남겼다. 여기에다 여론은 이들을 ‘또라이’ 내지는 ‘범죄자’로 확정짓고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숨막히는 엄숙주의


자, 그 광풍이 한바탕 지나갔으니 차분히 복기를 한 번 해보자. 이번 사건이 과연 그렇게 ‘광분’할 일이었는가. 분명 문제가 있는 ‘사고’임에는 틀림없다. 이른바 전문가들의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이들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문제는 이번 사고의 경중이다. 모든 이들에게 개방돼 있는 TV에서 옷을 벗었다는 점, 그리고 그 이후 이들의 행보에서 보자면 욕을 먹어도 싸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하지만 나라가 들썩거릴만한 그런 사건은 결코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엄숙주의’를 본다. 그것도 겉과 속이 다른 ‘가장된 엄숙’ 말이다.


정말 선정적인 장면들은 TV 속에 널려 있다. 주시청자가 중고생 중심이라는 주말 버라이어티쇼들은 여름이면 천편일률적으로 수영장을 배경으로 연예인들의 갖가지 게임을 ‘여름특집’이라며 방송해댄다. 수영장이나 해변이라는 배경은 노출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카메라는 수영복, 혹은 그에 버금가는 옷차림의 연예인 몸매를 훑기에 바쁘다.


정말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장면들은 뉴스 속에 널려 있다. 부도덕을 넘어 파렴치한 사건들을 좀더 자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상식을 휴가 보낸 이들이 ‘지도층’이라는 이름으로 연일 헛소리를 해대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런 TV를 ‘이 때다’ 하면서 까대고 있는 신문도 별반 다르지 않다. 종이신문에서는 근엄한 척 하지만 인터넷판은 자극적인 내용의 기사를 항상 메인에 올리고, 온갖 종류의 ‘성인용’ 사진과 글들이 난무한다.


이번 사건의 결론은 철없는 두 사람의 치기어린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혀 한 번 끌끌 차고, 이들은 그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지면 된다. 그런데도 온 사회가 나서 한바탕 떠들썩한 난리를 치르고, 이들은 구속됐다. 이 사건이 과연 인신구속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일인가.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폭넓게 인정되어야 한다. 다만 그에 대한 합당한 책임을 물으면 될 일이다.

 

표현의 ‘겉멋’만 좇는 이들


수용자의 입장에서 그렇다 하더라도 ‘생산자’의 관점에서 곱씹어 생각해봐야 할 문제도 많다. 이번에 ‘사고를 친’ 그들은 ‘펑크 밴드’라고 한다. 이쪽 방면에 대해 과문하기에 음악 칼럼니스트 김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들에게 펑크란 라이프 스타일이다. 음악은 그 안의 일부다. … 펑크의 기본 이념(?)은 ‘DIY(Do It Yourself)’와 ‘FSU(Fuck Shit Up)’다. 70년대 후반, 끝이 보이지 않던 불황의 영국에서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노동자 계급 실직자 청년들은 스스로 모든 걸 해내고, 세상에게 ‘다 좇까라’라고 소리치며 거리로 뛰어나왔다. 그렇게 펑크는 태동했다.”고 설명한다.


펑크라는 게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행동을 옹호하는 게 정상적인 게 아닐까.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어쨌거나 그들은 잘못했다. 그것은 때와 장소도 가리지 못했을 뿐더러 대중의 정서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펑크의 원칙(?)으로 본다면 그들이 행동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들은 펑크의 정신은 내다버리고 ‘스타일’만 좇은 것이다.


펑크에 공감을 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성숙이 필요하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음악을 제어하겠다는 얼치기 군사문화를 타파하는 것도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펑크의 ‘겉멋’만 흉내 내고 그 속에 담긴 뜻은 내팽개치는 밴드로는 그런 세상은 요원하다.


과한 비유라고 욕을 먹겠지만, 지금의 노동운동에 대입해 보자. 속으로는 곪아 있으면서 겉으로는 원칙을 넘어 교조(!)에 이르고 있지는 않은가. 가끔 지금의 노동운동이 카메라 앞에서 팬티를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