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디 봐라”
“단디 봐라”
  • 권석정 기자
  • 승인 2009.12.08 10:06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적의 화질 찾아 전 세계를 발로 뛰다
“내 화질에 타협은 없다"
LG전자 김병노 화질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네가 신의 눈이냐?”

개발담당자에 따라 제각각이었던 TV 화질의 색감에 대해 LG전자 김병노 연구원(51)이 “화질의 표준을 잡아야 한다”고 지적했을 때 한 선배연구원이 쏘아붙인 말이다. “이제까지 잘 해왔는데 쓸데없는데 돈 낭비하지 말라”는 선배의 지적을 뒤로하고 최적의 화질을 찾아내기 위해 연구를 거듭해온 김병노 연구원.

어느덧 그의 회사(LG전자)에서 개발된 모든 TV는 김병노 연구원의 화질평가를 통과해야만 상품화가 가능할 정도가 됐고, 그의 눈을 거쳐 세상에 나간 제품들은 미국, 일본 유수의 회사들을 제치고 세계시장에서 ‘최고’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과연 어떤 노력이 현재의 ‘그’와 ‘명품화질’을 있게끔 했던 것일까?

화질에 대한 도전

김병노 연구원 일과의 대부분은 TV 화면을 쳐다보는 일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평균 9시간 동안 캄캄한 암실에서 TV 화질을 평가한다. 다양하게 조명을 바꿔가며 이상적인 화질을 연구하는 암실 생활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7년. 본격적으로 화질 평가를 전담하기 전 그는 약 20여 년간 직접 TV를 개발해왔다.

김병노 연구원은 84년 LG전자(당시 금성)에 입사해 TV설계실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동안 ‘흑백 로타리 TV’부터 시작해 칼라 TV, LCD, PDP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TV를 개발해 온 그는 지직거리는 화면만 봐도 무엇이 문제인지 바로 알아차릴 정도로 오랜 시간을 TV와 함께했다. 그런 그가 화질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약 8년 전 HDTV가 나온 뒤였다.

“HDTV가 나오기 전에는 지금처럼 TV의 화질을 많이 안 따졌어요. 예전에는 흑백에서 칼라로만 바뀌어도 대단해 했으니까요. 칼라 TV 시절에는 스테레오 기능이나 ‘다가가면 꺼지고 멀어지면 켜지는’ 시력보호 TV라든지 부가기능 위주로 발전해왔는데 근래에는 ‘얼마나 더 선명한 화질이 나오는가’가 관건인 시대가 됐습니다.”

좋은 화질을 만들어보겠노라고 결심한 김병노 연구원이 처음 발견한 문제점은 당시 회사에서 출시되는 TV 모델마다 화면 속의 사람 얼굴 색깔이 천차만별이었다는 것이다. 각 개발담당자마다 색에 대한 기준이 달랐던 것.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그는 “얼굴 색깔부터 맞춰나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색감 통일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시도하는 작업이었던 만큼 화질의 기준을 잡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김병노 연구원은 색과 화질에 대해 영화감독이나 디자인전문가들을 만나 의견을 구했다. 하지만 대부분 미술이나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들로 ‘공학’에 대한 개념이 전무해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대학원에서 직접 ‘색채공학’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화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색에 대한 공학적인 접근이 필요했어요. ‘뻘겋다’, ‘푸르스름하다’는 표현으로는 색의 기준을 잡는 작업이 불가능하죠. 색의 기준에 대해 베타각도 얼마, X좌표, Y좌표 등 공학적인 수치가 나와 줘야 색에 대해 일관성 있는 판단이 가능합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고화질 찾아 삼만리

당시까지 TV화질의 세계 선두를 달리는 나라는 일본이었다. 대학원에서 김병노 연구원은 일본에서 색체공학을 공부한 교수에게 이론적인 부분을 사사할 수 있었다. 또한 실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소니(SONY)의 연구원들을 통해 자문을 받기도 했다.

당시 김병노 연구원은 일본 연구원들에게 자문을 받으면서 세계최고의 기술을 가진 그들도 화질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는 “화질의 기준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이다”라고 생각하고 ‘화질표준화작업’에 매달렸다.

그는 기존에 TV 개발을 통해 습득된 기계적인 지식에 학교에서 배운 색채공학, 일본 연구원들에게 자문 받은 내용들을 접목함으로써 화질의 표준을 만들기 위한 기본 능력치를 쌓아갔다.

실제로 김병노 연구원은 자료 수집을 위해 전 세계 67개국을 발로 뛰며 색에 대한 연구를 해나갔다. 그는 색에 대해 확실한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면접조사까지 실시했다. 가령 미국사람들이 좋아하는 화질을 알아내기 위해 현지의 패널 200명을 직접 선정해 TV화면을 보여주며 그들의 취향을 분석했다.

김병노 연구원은 “당시 연구도 힘들었지만 회사를 설득하는 일이 훨씬 더 힘들었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당시 작업을 회상하며 “엄청나게 힘들었지만 당시 연구의 결실이 바로 지금 우리가 1등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단언했다.

“그 작업들을 통해 사람들이 원하는 색을 찾아낼 수 있었어요. 주위 사람들은 ‘무슨 성과가 있겠느냐’고 말렸지만 결국 해냈습니다. 미국, 브라질, 독일 등 그렇게 데이터가 쌓이면서 전 세계인이 선호하는 화질에 대한 표준이 정립되기 시작했죠. TV 한 대 ‘제대로’ 만들기가 정말 어렵더군요. 소비자 눈을 만족시키는 화질을 만든다는 것이 단순히 연구원인 제가 혼자 TV 화면만 뚫어져라 봐서 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조사를 통해 얻은 기준을 제 눈으로 익히고, 그것을 다시 표준으로 만드는 작업을 계속 반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이렇게 유럽인이 좋아하는 색, 아시아인이 좋아하는 색에 대한 표준화작업이 그 성과를 보일 무렵, LG전자에서 수출되는 모든 TV들은 각 나라의 문화에 맞게 화면이 조정돼서 나가기 시작했다.

이는 각 나라마다 색온도(色溫度)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김병노 연구원의 설명이다. 즉, 각 대륙마다 태양이 비치는 각도가 다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색과 빛에 대해 편안하게 느끼는 지점이 다르다는 것. 예를 들면 적도에 가까운 아시아들의 경우 대부분 조명으로 푸른 색 계통의 형광등을 쓰는 반면, 유럽 쪽은 불그스름한 전열등을 쓰는데 이는 각 나라마다 익숙한 빛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김병노 연구원은 “TV도 각 나라의 문화에 맞게 색을 다르게 맞추는 것이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김병노 연구원의 화질표준화작업이 있기 전에는 외국에 수출되는 TV의 화질이 모두 똑같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처음 문제제기를 한 사람도 바로 김병노 연구원이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LG전자의 제품들이 소니, 파나소닉 등의 기술을 제치는데 원동력이 됐다. 김병노 연구원은 “처음에 국내의 PDP, LCD 제품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수출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화질이 떨어졌었지만 지금은 어디에 내놔도 화질은 우리가 1등”이라며 “예전에는 우리가 덤핑을 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일본 제품들이 덤핑을 할 정도”라고 전했다.

이와 함께 최근 세계 각종 시상식에서 자사의 TV가 화질과 관련한 각종 상을 휩쓸고 있다는 낭보(朗報)가 그는 무척 반갑다. 개인적인 수상은 아니지만 자신의 기술이 인정받은 것 같아 뿌듯하다.

김병노 연구원의 화질표준화작업은 회사의 울타리를 넘어서 방송국까지 이어졌다. 그는 최근 약 2년 동안 KBS와 화질표준화작업을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방송국의 화질표준화작업이란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영상과 TV에서 구현할 수 있는 영상을 매치시키는 일이다.

김병노 연구원에 따르면 방송국에서 촬영한 화면이 TV로 전달될 경우 그 본래 색이 조금 왜곡돼서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방송국에서 촬영한 화면이 그대로 TV로 전달되게끔 하기 위해 방송국 직원들과 팀을 짜고 이상적인 색의 기준을 맞추는 작업을 진행했다. 의욕적으로 진행한 프로젝트였지만 현재 이 작업은 작년 KBS 정연주 사장 해임 이후 전담팀 직원들이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흐지부지됐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병노 연구원은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현재 세계 어디에도 방송국과 TV 간에 화질에 대한 표준이 없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것을 만들어내면 그것이 곧 세계표준이 되는 겁니다. 이 작업이 성공하면 우리는 더 좋은 방송을 볼 수 있게 됨과 동시에 전 세계가 우리의 기술을 따라오게 되는 거예요. 지금 막 우리나라가 화질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어서 서둘러야 하는 작업이죠. 지금도 당시 표준화작업을 같이 했던 방송국 직원들과 꾸준히 연락하면서 ‘언젠가 꼭 다시 하자’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색즉시공 공즉시색  

‘애물단지’였던 김병노 연구원의 연구가 성과와 함께 수익을 거두자 회사에서는 최근 제 2의 김병노를 키워내기 위한 후진양성에 나섰다. 현재 김병노 연구원은 그가 지닌 ‘유일무이한 심미안’을 후배들에게 전수하기 위해 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다.

“앞으로는 고화질입니다. 지금 화질이 PDP, LCD, LED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데 방송 자체도 2012년이면 아날로그 방송이 사라지고 고화질 방송시대가 오게 되요. 즉, 화질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해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때 가서 전문가 찾으려면 늦어요. 지금부터 화질개발에 대한 체계적인 투자와 교육이 필요합니다. 제가 언제까지 이 일을 전담할 수 없죠.”

부산이 고향인 그는 후배들을 교육할 때 항상 ‘단디 봐라’고 강조한다. ‘단디’는 ‘단단히’ ‘야무지게’ ‘빈틈없이’라는 뜻의 사투리다.

화질을 대하는 김병노 연구원의 철학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그는 후배들에게 “너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실제로 존재할 수 있고, 그것이 보인다고 실재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고 항상 이야기한다. 이는 단순히 일을 하는 자세에 대한 조언만이 아닌 과학적인 지적이다.

“간혹 눈이 오동작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 곳을 주시하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안 보이던 부분이 보일 때가 있어요. 또 주위의 조명이 살짝만 바뀌어도 색이 다르게 보이죠. 그렇기 때문에 항상 ‘단디 봐라’고 강조합니다. 이 일을 하려면 우리 눈의 특성에 대해서도 공부가 필요해요. 어떤 환경에서 우리 눈이 실수할 수 있는 지를 알아채야 하니까요”

이렇게 신중함을 강조하는 그는 화질평가를 할 때 공학적인 수치로 색을 측정한 다음 항상 자신의 눈으로 최종확인을 한다. 김병노 연구원은 “세상에 눈만큼 정확한 것은 없다. 아무리 기계가 발달해도 사람의 눈은 절대 못 따라간다”고 말한다. 색에 대한 그의 신중함과 자신감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