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노동자 위한 일터, 직접 만들었어요”
“산재노동자 위한 일터, 직접 만들었어요”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5.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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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손가락 한 개뿐이라도, 동료의 손가락이 되는 기쁨
산업재해노동자 자활공동체

매주 금요일이 되면 서울 구로구 구로동 주택가의 스무 평 남짓한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사무실에는 왁자함과 생기가 넘친다. 산업재해를 당한 이후 번번이 취업을 거부당했던 산재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직접 만든 ‘일터’로 출근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산재노협은 96년부터 노동조합이나 사회단체 등에서 우편발송을 위탁받아 재정을 꾸려 왔다. 그러던 것을 더 발전시켜 올해 5월 ‘산재노동자 자활공동체’를 출범시키고 정식으로 사업자등록을 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가 치료 후 일터로 복귀하는 비율은 40%를 넘지 못한다. 그나마 원직장 복귀보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야 하는 현실. 결국 산재노동자들은 점점 노동시장과 사회의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산재 치료가 종결된 노동자의 재활이나 재취업에 대한 정책이 취약한 속에서 언제까지 사회의 변두리에 웅크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 ‘일터’를 만들기로 했다. ‘자활공동체’는 산재노동자들이 공동소유와 자주관리를 운영 원칙으로, 산재노동자의 노동권 확보를 목적으로 삼아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다친 몸보다 직장 없는 게 더 힘들었죠”


민주노총 신문인 ‘노동과 세계’의 발송 작업이 있는 날, 오전 이른 시각부터 지하 사무실은 작업자들과 신문, 봉투들이 엉겨 부산하다.


보기에는 단순한 일이어도 작업자들의 역할은 체계적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입구에 서서 신문을 작업하기 좋은 분량으로 나누는 사람부터 신문을 4등분으로 접고 나르는 사람, 신문을 봉투에 담는 일과 봉투 입구를 붙이는 일, 운반하기 좋게 완성봉투를 나누어 담는 일도 다 담당자가 있다.


효율성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대부분이 수지장애(손가락·손목 절단 등으로 손을 쓰는데 불편함이 있는 것)를 가진 사람들이라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일을 찾아 역할을 나눈 것이다.


방바닥에 앉아 띠지(발송을 위해 신문을 감싸는 흰 종이)에 신문을 끼우고 있는 이용선(34)씨의 왼손에는 손가락이 하나밖에 없다. 91년 부천의 한 영세업체에서 철판 절단하는 일을 하다 손이 롤러에 말려들어가는 사고를 당한 것. 그 이후로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들 몇 명과 함께 우유 배달로 생계를 꾸렸다.

 

이씨는 정작 산재노동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육체적 고통보다는 다시 노동의 현장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아픈 몸보다도 직장이 없는 게 가장 힘들었죠. 특히 IMF 때는 시골 부모님 논 팔아서 쓰고…, 지금도 뭐 사는 게 즐거운 것 같지는 않아요. 즐겁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려고 애쓰죠.”


어엿한 직장, 같은 아픔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 해서일까. 몇 년 동안은 늘 주머니 속에 숨겨져, 살아있는 근육마저 무력하게 했던 이씨의 왼손은 이제 떳떳하게 세상 밖으로 나와 있었다.

 

 

개인사업도 사회적 편견에 부딪혀


신문이 담긴 봉투를 접착하고 있는 강송구(41)씨는 예전에는 먹고사는 데 걱정은 없다는 금형기술자였다. 계속되는 야근 중에 사출 기계에 손이 끼는 사고로 양손 모두가 자유롭지 않다. 손은 쓸 수 없어도 기계를 잘 다루기 때문에 다시 취업을 하려고 여러 번 노력을 했다. 하지만 도움을 줄 거라는 기대로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을 찾은 그는 아예 포기를 하게 됐다고 한다.


“직접 공장에 가서 기계를 봐야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어요. 특히 몸이 불편하니까 더 그렇죠. 그런데 공단 직원들은 구인 책자만 툭 던져 주고 ‘거기서 할 일을 찾아봐라’는 식이었어요. 결국에는 취직 생각을 접고 우유 배달을 시작했죠. 돈 좀 모으면 작은 장사라도 할 생각으로.”


그렇다면 산재 후 개인 사업을 시작한 사람들은 어떨까.
“다들 덥고 갈증 나죠? 이거 하나씩 먹어요.”
한입에 들어가도록 도막낸 오이를 들고 나와 사람들 입에 넣고는 다시 주방으로 종종걸음을 하더니 이번에는 냉커피를 내오며 분위기를 띄우는 박용식(38)씨. 93년에 밀링업체에서 당한 사고로 왼손을 아예 절단한 그는 사고 전 벌어 놓은 돈으로 장사를 했었다. LPG 장사에서부터 호프집, 단란주점까지 업종도 다양하다.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고달픔은 없었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편견 속에서 장사도 쉽지가 않았다. 실제로 산재 후 연금을 포기하고 일시불로 보상금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조그만 가게라도 차려 먹고 살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사업에 성공하는 비율은 10%도 안 될 거라는 게 박씨의 말이다. “장사도 다 주인을 보고 오는 건데,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아요. 월급쟁이 하다가 장사한다는 게 쉽지도 않고….”


‘배고파 죽겠다’는 사람들의 아우성에 다시 부엌으로 쫓겨(?)들어가는 박씨는 ‘수지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대해서만은 꼭 한마디 해야겠다며 말을 잇는다.


“우리나라 산업재해의 70%가 수지장애인데, 이중 절반 이상이 직장을 구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손을 못 쓰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이. 다리를 다친 사람은 휠체어에 앉아서 조립하거나 지하철에 가판에서 장사라도 하는데, 우리처럼 손을 다친 사람들은 일자리 구하기가 훨씬 힘들죠. 하지만 여기들 보세요. 다들 손이 불편해도 할 수 있는 일이 다 있지요. ”

 

 

정부대책 사각지대 속 영세사업장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영세업체 출신인데다 지금과는 연금 체계가 다른 십수 년 전에 사고를 당해 제대로 된 보상이나 생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손이 네 번이나 토막 나서 우리나라 최초로 접합수술을 했다는 양승섭(37)씨는 일당 5천원에 입사한 지 채 1년도 안 돼 사고를 당했다. 당시에는 산재환자에 대해 지급되는 연금이 휴업급여 형태로, 임금의 70% 수준이었다. 양씨는 “다친 것도 억울하지만 기본급이 적은 노동자들은 보상액도 턱없이 낮았다”며 “오래 전에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일수록 열악한 근무 환경 때문에 보상도 어렵다”고 말한다.


실제로 매년 10만 명씩 쏟아져 나오는 산업재해 중에도 더 심각 한 게 있다면 중소영세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사고다.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고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는데도 홍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사업주의 암묵적 압력이나 합의 하에 공상 처리하는 경우는 아예 산재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 실정.
그래서 이들은 일이 없는 날이면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다가 다친 사람들을 방문해 상담을 하고 영 세사업장 산재노동자를 위한 대책의 필요성을 알리는 활동도 편다. 현재 자활공동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 달에 가져가는 돈은 백만 원 남짓.

 

민주노총과 금속산업연맹의 신문 발송 외에는 대부분 정기적이지 않은 일거리다. 올해부터는 정식으로 사업자등록을 했기 때문에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서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돼  앞으로는 더 안정된 일자리를 만들 계획도 가지고 있다.

 

‘설움’과 ‘꿈’ 한데 담긴 일터


점심시간이 되자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피어오른다. ‘식구들’의 점심을 준비하는 박용식씨의 얼굴에는 연신 웃음이다. “형! 진짜 배고파 죽겠네!” “오늘 메뉴는 뭐에요?” 밉지 않은 타박을 던지며 너나할 것 없이 신문 더미를 한구석으로 미루면서 상을 편다.


서로서로의 손이 되어 밥을 퍼주고 반찬을 골라 주면서 간밤에 과음한 이야기, 노총각들 장가 보낼 걱정, 주말에 있을 산행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여느 가정이나 회사의 점심시간 풍경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다.


아직은 일감이 적어 일을 하는 날이 많지는 않지만 이들은 육체적 고통과 사회적 냉대 속에 받은 마음의 상처를 ‘노동’과 ‘동료’를 통해서 치유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잘 알아요. 사고 당사자의 고통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아픔까지. 그래서 여기 머물다 간 산재 노동자들은 자살하지 않아요. 마음을 치료했기 때문이죠.”


처음에 찾아오는 산재 노동자들에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지 말고, 떳떳하게 세상에 내보이며 다니라고 조언한다는 사람들. 잘린 손가락에 새살이 나고, 다시 짓무르고, 또 새살이 나 이제는 단단해진 굳은살처럼, 몸과 마음을 다치고 세상 한켠으로 밀려나 버렸던 이들이 온전히 제 힘으로 만든 일터.


신체적 치료가 끝나고 나면 아무 대책도 없이 방치되고 마는 산재 노동자의 설움이 굳은살처럼 앉은 자리에는 ‘노동’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사회와 대화하고 싶은 사람들의 꿈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