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증만 가득 남긴 '원장님'의 사퇴
궁금증만 가득 남긴 '원장님'의 사퇴
  • 안형진 기자
  • 승인 2009.12.1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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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충성 기관장, 부담으로 작용했을까?
'노사관계 선진화', '연구원 통폐합' 위한 계획?

 

▲ 직장폐쇄가 단행된 지난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9층 한국노동연구원 사무실 앞에서 전국공공연구노조 조합원들이 직장폐쇄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노동연구원 박기성 원장의 사퇴로 84일을 끌어온 노동연구원 파업 사태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됐지만 박기성 원장의 사퇴를 둘러싼 의문점과 향후 노동연구원 사태의 향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지난 2월 6일 사측의 단체협약해지 통고로 촉발된 노동연구원 사태는 결국 전면파업으로 비화됐으며, 최근 들어 직장폐쇄 조치와 노동연구원의 예산 삭감, 통폐합 논의 등 시시각각 급격한 상황변화를 겪었다.

51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소규모 노동조합의 파업이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국노동연구원’이라는 노사관계 '국책' 연구기관이 노사관계 파탄의 중심에 섰다는 점과 ‘노동3권 헌법 제외’ 발언으로 반노동의 심벌이 된 ‘박기성 원장’의 상징성, 그리고 2009년 공공기관노조에 불어 닥친 ‘단협해지’ 쓰나미의 중심에 ‘한국노동연구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먼저 의문이 드는 것은 “조합원들 다 짜르고 나는 학교에 복직하면 된다”고 외치며 직장폐쇄까지 단행했던 박 원장이 갑자기 사직서를 제출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점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공식적인 사퇴 사유는 ‘건강’상의 문제다.

노동연구원을 산하에 둔 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창의경영팀 권청재 팀장은 <참여와혁신>과의 통화에서 “박기성 원장이 사의를 표할 때 김세원 이사장과 직접 만나 관련된 사항을 논의한 것으로 안다”며 “건강 상 사유 외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현재로서는 알기 어렵다”고 답했다.

공공연구노조 노동연구원지부(이하 노동연구원지부) 이상호 지부장도 “(박 원장의 사퇴에 대해) 현재 각종 ‘설’들만 난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로 가득하다. 나 역시 사퇴 이유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 일신상의 이유라는 사퇴 이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과잉충성'으로 정부와 여당에 부담?

이에 대해 공공연구노조 이운복 위원장은 “노동계로부터 지속적으로 사퇴압력을 받았고, 노동연구원 내 연구위원들에게도 일정정도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대외적 명분을 상실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니겠는가”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그러나 단지 노동연구원 내 연구위원들이 박 원장을 흔들어서 사퇴했다는 이야기는 그동안 박 원장이 보여줬던 ‘신념’에 비하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의 ‘신념’을 좌절시킬 수 있는 것은 노동연구원 내가 아니라 청와대 혹은 정치권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실제 박 원장의 ‘노동3권 헌법 제외’ 발언의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노동계와 야권의 반발 뿐 아니라 한나라당 내에서조차 박 원장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발언 당시 박 원장은 한나라당 이사철 의원에게 “말을 조심하라”는 호통과 함께 “정말 안 될 사람”이라는 핀잔을 들었다. 같은 당 고승덕 의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노동3권을 헌법에 명시한 나라는 없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니 말을 조심하라”고 추궁했으며, 한국노총 출신의 한나라당 김성태 의원은 별도로 성명을 내 “차마 할 수 없는 대단한 망언”이라며 비난을 쏟아낸 바 있다.

여기에 장기간의 파업 과정에서 노사협상이 거의 타결되는 분위기였지만 갑자기 직장폐쇄에 들어갔던 행동도 한 몫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박 원장의 직장폐쇄는 노동연구원 고위직들도 미리 알지 못했던 점에서 박 원장의 '과잉충성'이 정부나 여당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돌발 행동으로 전환된 케이스로 볼 수도 있다.

결국 그간 과잉충성에 의한 돌발 행동으로 여론을 악화시킨 것이 정부나 여당에 부담으로 작용해 타의에 의해 옷을 벗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 국책연구기관으로서 처음으로 직장폐쇄가 단행된 지난 1일 한국노동연구원에서 한 관계자가 원장실 출입문을 닫고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원장’은 떠났지만 ‘소신’은 남은 이상한 상황

하지만 대내외적 여론 악화의 부담감이 사퇴의 주된 배경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미심쩍은 측면도 있다. 박 원장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이미 9월부터 석 달간 지속된 일이며 지난 1일에는 모든 부정적 여론을 개의치 않은 채 직장폐쇄 조치까지 단행했던 그였기 때문이다.

박 원장이 경제인문사회연구회에 사의를 표명했다고 알려진 지난 12월 11일,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 전체 51명에 대해 '업무방해 및 퇴거불응죄'를 적용해 영등포경찰서에 고발장을 접수했다. 같은 날 노동연구원 측은 조합원 37명을 같은 혐의로 고발했다.

한편 박 원장의 사퇴를 계기로 ‘조건 없는 직장복귀’를 선언하며 노동연구원의 정상화를 모색하던 노동연구원지부는 연구원측의 황당한 요구를 받았다고 15일 주장했다. 노동연구원지부 이상호 지부장은 “연구원 측이 직장폐쇄 조치를 철회하는 조건으로 노조에 ‘재파업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요구했다”고 전했다.

이상호 지부장에 따르면 문제의 ‘서약서’를 요구하며 직장폐쇄를 철회하지 않고 있는 것은 현재 원장직무대행직을 수행하고 있는 김주섭 연구관리본부장이다. 박 원장은 떠났지만 그의 ‘강경대응’ 소신은 그대로 남아 현장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비록 박 원장이 여론 악화로 인해 몸살을 앓았지만 박 원장의 ‘원칙과 소신’은 경제인문사회연구회와 정부의 구미에 맞아 떨어졌을 것이라 판단된다.

또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지난 12월 초 이사회를 통해 노동연구원의 예산 삭감과 통폐합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져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노동연구원의 원장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 둔 상태에서 추후 있을 통폐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포석을 놓았을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박 원장이 알려진 대로 “노동연구원이 없어지더라도 잃을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결국 노동연구원을 둘러싼 갈등과 박 원장의 사퇴는 정부가 원했던 ‘노사관계 선진화’와 ‘노동연구원의 통폐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계획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다.

이에 대해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권청재 팀장은 “이사회에서 통폐합 관련 사항이 논의 된 것으로 알고 있고, (조합원) 고발 건 역시 사실로 알고 있지만 이사회에서 오고 간 대화 내용은 기록도 없고 참여 인원이 이사진으로 제한돼 정확히 알 수 없어 밝히기 곤란하다”고 밝혔다.

결국 박 원장의 사퇴의 이유는 노동연구원을 둘러싼 갈등과 향후 노동연구원의 거취 문제가 결판난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