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행 노사 “함께 다이어트 했어요”
기업은행 노사 “함께 다이어트 했어요”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5.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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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효율적 업무 잡아내는 ‘불필운동’으로
효율성·근무환경 모두 UP!

올 7월 들어 기업은행 본점에는 수요일 저녁 근무가 사라지고 ‘가정의 날’이 실시되고 있다. 평일 야근이 일상화되어 있던 은행직원들에게 7시 이전 퇴근은 그야말로 ‘꿈만 같은 일.’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기업은행 노사가 올해 3월부터 실시한 ‘불필요한 일 없애기 운동’ (불필운동) 덕분이다. IMF 이후 진행된 금융권의 대규모 인력조정과 은행의 대형화·겸업화에 따라 은행원들의 장시간 근무는 어느새 ‘당연한 일’이 되고 있다.   


지난 6월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농협, 국민은행, 자산공사 등 금융기관 5곳 1234명을 대상으로 ‘실 근로시간 실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들의 하루 평균 근무시간이 11시간을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응답자 중 61.4%는 서류정리 등 밀린 업무를 하기 위해 초과근무를 한다고 답했다.

 


소모전 대신 객관적 근거와 설득

 

이런 사정은 기업은행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심화되어온 은행 간 경쟁은 뱅크워(Bank War:은행대전)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킬 만큼 정점을 향해 달리고 있다.  국책은행으로 비교적 경쟁 밖에 있던 기업은행도 최근 개인고객 유치, 소매금융 확대 등의 전략으로 출사표를 던진 상태다. 구성원들은 금융권의 경쟁 심화를 이해하면서 한편으로는 격무에 시달려야 하는 고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과도한 격무가 반드시 필요한 업무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업본부 간 과당경쟁, 일회성 캠페인의 남발, 부서 간 ‘눈치 보기’ ‘보여주기식 업무 처리’로 인해 일의 ‘질’보다는 ‘양’에 기대는 문화가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 것.


이에 따라 노동조합은 올해 초 노사가 함께 비효율적 업무를 찾아내 꼭 필요한 일은 효율적으로 하고, 불필요한 일은 과감히 없애자는 ‘불필요한 일 없애기 운동’을 제안했다. 이를 위한 첫 단계로 노동조합은 먼저 사업계획과 경영지표를 제시하는 본부조직의 비효율성을 찾아내고, 각 영업점별 애로사항을 모으기 위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여론 조사 결과 드러난 실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사업부제 실시 이후 팀별로 중복되는 업무가 많았다. 본부별, 부서별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 형식적 문서의 무분별한 양산과 타부서에 보여주기 위한 휴일근무도 많았다. 성과는 내지 못하고 매월 명칭만 바꿔 실시하는 캠페인 또한 직원들의 부정적 인식만 키우는 것으로 조사됐다.


3~4월 사이 여론 조사와 지방 영업점 방문 조사를 마친 후 노동조합은 경영진에 ‘불필요한 일 없애기 노사특별위원회’ 설치를 건의, 4월부터 노사협의회 형식의 논의가 시작됐다.


노사 각각 5인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의 논의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노동조합의 요구 사항 중에는 ‘과당 경쟁을 막기 위한 지역본부장의 정규직 전환’ 등 인사권과 관련된 요구도 있었지만 광범위한 현장 조사와 직접 인터뷰를 통한 객관적 자료가 근거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큰 마찰 없이 합의 사항을 하나씩 마련해 갈 수 있었다. 


금융노조 기업은행지부 김봉수 정책국장은 “불필운동은 노사 간의 소모적 논쟁이나 힘겨루기가 아니라, 경쟁력과 효율성을 강화하고 근무환경을 개선하자는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므로 노사의 이해관계가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회사측 위원으로 참석한 기업고객 2부의 남상석 부장도 “처음에는 오해의 여지도 있었지만 노동조합의 요구가 근무시간에 일을 덜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낭비를 없애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회사로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고 평했다.

 

업무 집중·효율화로 근무환경 개선


한 달여 진행된 협의 끝에 노사는 5개 주제에 접근을 이뤘다. 첫 번째가 ‘가정의 날’을 실시하는 것이다. 7월부터 매주 수요일을 가정의 날로 정해 7시 전 퇴근을 독려하고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가족과 저녁을 먹거나 자기계발에 투자하도록 한 것. 노사는 과거에도 이런 취지의 날을 실시했다 흐지부지 됐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노사합의 사항으로 명문화하고 분기별 설문조사를 통해 실시 여부를 점검하기로 했다.


두 번째로는 주5일 근무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휴일 근무를 금지한 것이다. 꼭 필요한 일의 경우에는 보충협약으로 명시했다. 노동조합은 휴일 근무를 없애기 위한 장치 중 하나로 현재 거의 무보수로 시행되고 있는 휴일 근무에 대해 시간 외 근무 수당 현실화를 요구했지만 이 문제는 2/4분기 노사협의회 안건으로 미뤄졌다.

 

이러한 두 가지 합의는 구성원들의 근무조건 개선의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것이지만 기존의 업무량을 그대로 유지하는 상태에서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런 합의가 가능했던 것은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노사의 전향적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불필요한 일을 없애기 위해 제시한 안건의 대부분을 회사가 받아 들여 이를 지도문서를 통해 시행해 나가기로 한 것이 세 번째 합의다. 이 합의는 조사 과정에서 드러났던 비효율적 업무를 없애고 일의 양보다는 질의 보장을 통해 업무 집중도를 높이자는 취지 하에 세부 실천 사항으로 구체화 됐다.

 

불필요한 일 없애기 - 신나는 일터 만들기 운동 전개 내용
▶ 본부 및 영업점의 회의 최소화와 막연하고 부적절한 지시·검토 금지
▶ 각종 보고서의 통합, 단순화와 전산화
▶ 문서생산 남발 방지를 위한 가이드 수립
▶ 교육 및 캠페인의 효율적 추진
▶ 보여주기식 보고자료 작성을 지양하고 내용 충실화
▶ BRP(업무재설계) 조기정착을 위한 현장의견 수렴·개선 신속화
▶ 전자결재 활성화방안 마련
▶ 지역본부의 핵심지표 위주 실적관리를 통해 과도한 실적독려 자제
▶ 본부와 영업점 간 커뮤니케이션 활성화를 위한 방안 마련
▶ 신속한 의견·아이디어 전달체계 구축
▶ 직원들의 여가선용 및 자기계발 노력 지원
▶ 경영상 불요불급한 휴일근무 지양
▶ 업무집중을 통한 불필요한 야근 근절 및 부점장 솔선수범

 

노사는 이를 통해 직원들의 업무부담을 해소하는 동시에 효율성과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네 번째로 영업점 지원이라는 지역본부 본래의 임무를 강화하기로 했다. 이는 그간 지역본부 간의 과당경쟁에 매몰돼, 영업점 지원보다는 실적 독려에 급급한 나머지 불필요한 일이 많이 생겨났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실제로 사업본부에서 이미 전사적 캠페인을 실시하고 있는데 지역본부 차원에서 유사한 업무독려 캠페인이 남발돼 실적은 없으면서 직원들의 부담만 키웠다. 이번 합의를 통해서 지역본부 자체의 캠페인이나 각종 프로모션을 지양하고 본부의 종합기획부에서 전체 캠페인을 일괄적으로 조정하기로 했다. 기업은행 경북지역본부 관계자는 “이번 합의에 따라 지역본부가 영업점 지원을 위한 고충처리나 섭외지원, 영업력 강화 방안 도출 등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게 됐다”고 반겼다.


다섯 번째 합의는 내부의 과당경쟁 방지에 관한 것이다. 그간 각 영업점의 여건과는 상관없이 획일적으로 모든 상품을 평가하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점주 여건에 맞는 선택상품을 선정하고 이에 가중치를 주어 환경에 맞는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사업본부 또는 본부 부서간에 경쟁적으로 문서를 만들어 내는 데서 발생했던 시간의 낭비를 줄이기 위해 검색어 하나로 관련문서 전체를 일괄 검색할 수 있는 지식경영시스템도 도입키로 했다. 그간 과도한 내부 경쟁으로 인해 조직 내부의 화합을 해쳤던 문제에 대한 개선책도 내놨다. 2006년부터 사업본부, 지역본부 및 본부부서의 경영평가 지표에 조직융화 노력 항목을 신설해 내부의 소모적 경쟁보다는 상호협력을 통한 외부 경쟁력 강화해 힘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금융산업 경쟁격화 속 ‘선택과 집중’


기업은행 노사의 ‘불필운동’에 따른 여러 합의는 본격적 시행에 들어간 지 아직 한 달이 채 못 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성과가 집계되고 있지는 않다. 첫 ‘가정의 날’ 실시 다음날 김동섭 노조위원장에게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너무 좋고, 가정에 대한 부담을 더니 일도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감사메일이 날아든 것이 눈에 보이는 성과라면 성과.


하지만 많은 직원들은 ‘불필운동’의 성과가 합의의 진행 과정에서 이미 나타났다고 말한다. 기업고객 1부의 K차장은 “사실 그간에는 업무가 일찍 끝났어도 상사나 타 부서 눈치를 보느라 퇴근을 하지 못하고 밤 늦게까지 앉아 있는 날이 많았다”며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해서 재충전을 하니 다음날 업무 효율이 높아지는 것을 체감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성과는 이번 일을 통해 노사 간의 신뢰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는 점이다. 자칫하면 소모전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이지만 노동조합이 주장을 앞세우기 전에 구체적인 근거 제시와 설득의 자세를 보인 점이 높이 평가 받고 있다. 기업경쟁력과 구성원의 삶의 질을 함께 고려한 경영진의 태도 또한 성과를 이끌어 내는 데 한몫했다. 


기업은행의 이경준 부행장은 “처음에는 사업 확대에 모두가 박차를 가하고 있는 와중에 괜히 찬물 끼얹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노동조합의 진심을 알 수 있었기에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기업은행 노사의 ‘선택과 집중’ 전략이 금융산업의 경쟁 격화 속에 노사가 상생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지 주목받고 있다.

 

 

미니인터뷰 _ 기업은행 이경준 부행장 (경영전략본부장)

- 노동조합의 ‘불필운동’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부서에서 수행하는 일이 꼭 필요한 일인지, 불필요한 일인지 따져보지 못하고 타성에 젖어서 또는 관행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한된 하루 일과 속에서 생산성을 높이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일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노조가 제의를 해와 흔쾌히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 ‘불필운동’의 진행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성과에 대한 평가는?

"불필요한 일을 구체적으로 찾아내는 데 있어서 노사간의 견해차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부서의 업무 자체가 불필요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논란을 벌였을 때가 좀 힘들었고, 특히 각 부서가 업무 추진을 위해 생산해 내는 많은 문서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결과적으로 노사가 합의하여 나름대로 불필요한 일을 없애는 데 기여했습니다. 작년에 노사가 사업부제 개선협의회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 데 이어 또 한번 공감대를 넓힌 것이 성과라고 봅니다."

- 은행 산업의 경쟁 격화 속에서 구성원의 삶의 질과 기업 경쟁력을 함께 높이기 위한 구상은?

"기업의 경쟁력은 구성원의 조직에 대한 만족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입니다. 일선 영업점의 일손을 덜어줄 수 있는 방안은 여러 면에서 시스템적으로 접근을 할 계획입니다. 또, 직원들이 여가를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선호도를 조사해 여가 선용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싶습니다. 금전적인 면도 중요하겠지만 정신적인 면에서의 만족도를 높여주면 이는 다시 직장에 대한 애착심으로 돌아와 경쟁력을 한층 향상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미니인터뷰 _ 금융산업노동조합 기업은행지부 김동섭 위원장
- 노동조합이 ‘불필운동’을 제의하게 된 배경은?

"금융기관 간의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금년 들어 “BANK WAR”라는 명목 아래 단기실적 위주의 비효율적인 업무가 급증했습니다. 이에 따라 조합원들이 만성적인 야근과 휴일근무로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고자 상반기 노동조합 핵심 추진사업으로 정하게 된 것입니다."

- 노동조합이 먼저 ‘효율성을 높이자’는 제안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효율적인 경영을 위해서는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이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함에도 금융기관끼리 양적 성장에만 급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조직과 구성원이 함께 퇴보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의 ‘효율화’는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 진행 과정에서의 어려움과 성과에 대해 평가한다면?

"불필운동 자체가 자칫 은행의 성장 동력을 저해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경영진과의 인식차이를 좁히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사전조사와 객관적인 자료수집 등을 근거로 시간을 두고 협의해 가는 과정에서 상호 이해의 폭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불필운동’의 가장 큰 의미는 금융기관 간의 무분별한 경쟁체제에 과감하게 제동을 걸고 그 심각성을 인식시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