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구멍’을 뚫는 게 전태일 정신
‘창구멍’을 뚫는 게 전태일 정신
  • 하승립 기자
  • 승인 2010.01.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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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사람들의 몫은 그 구멍을 넓히는 일
[신년특집 인터뷰] 전태일 40주기, ‘어머니’ 이소선을 만나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그렇지만 때로는 가슴 먹먹하고 눈물 고이게 하는 가장 슬픈. 포근한 고향 같은 그리움이지만 어떨 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이 모든 의미를 담고 있는 하나의 단어, 바로 ‘어머니’다.

그리고 ‘어머니’라는 호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이 세상 어느 어머니보다 많은 아들과 딸을 둔 사람, 그가 바로 전태일의 어머니이자 이 땅 노동자들의 어머니 이소선이다.

2010년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던 어린 누이들을 가슴 저미도록 사랑했던, 그리고 근로기준법이 존재함에도 기본적인 권리조차 누릴 수 없었던 노동자들을 누구보다 돕고 싶었던 청년 전태일이 스물 둘의 나이로 산화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예의 바르고 사려 깊던 청년 전태일은 산업화와 성장이라는 절대명제 외에는 어떤 것도 되돌아보지 못하던 우리 사회에 깊은 울림을 줬고, 그 이름만으로도 노동자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작은 선녀’에서 ‘어머니’로

하지만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전태일을 가장 사랑했을 ‘어머니’의 가슴에는 대못을 박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로 40년, 청년의 어머니는 이소선이라는 이름보다도 ‘어머니’로 불리며 거리에서, 노동자들의 아픔이 있는 현장에서 살아왔다. 아니, 살아냈다.

‘작은 선녀’(小仙), 누군가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딸이었던 이, 자신의 가장 든든했던 장남을 가슴에 묻은 이, 그리고 사연 많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전히 마주하며 자랑스러운 ‘어머니’의 이름을 얻은 이.

어머니의 작은 소망

처음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전태일재단 사무실을 찾은 날, 우리는 ‘놀라운’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3명의 상근자가 일하는 재단에 차량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얘기를 나누는 도중 어머니가 지인과 통화를 하면서 “어디서 중고 승합차를 구할 데가 없겠느냐”고 묻는 것을 듣고서야 알았다.

그날, 창신동 골목고갯길을 나서면서 동행했던 기자들이 장탄식을 내뱉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생산하는 노동자의 어머니가, 그리고 전태일 정신을 계승한다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존재하는 가운데 중고 차량 한 대가 없어서 여기저기 알아본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는 거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차량 문제는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노동자들의 힘(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이경훈 지부장 인터뷰 참조)으로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것은 없는지 못내 씁쓸한 기억이었다.

<참여와혁신>은 2010년 신년특집으로 ‘어머니’ 이소선의 인터뷰를 싣기로 했다. 그리고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오후 2시로 잡혀 있던 약속은 4시로 미뤄졌다. 그날은 노동관계법 개정을 둘러싼 노사정의 마찰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여의도에서 천막농성 중인 민주노총이 집회를 열기로 한 날이었다. 어머니는 그 집회에 다녀온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은 하필이면 올 겨울 들어 첫 맹추위가 찾아온 12월 16일이었다. 그리 춥지 않은 겨울 날씨가 지속되다가 영하 8도로 수은주가 뚝 떨어졌다. 밖을 나서는 것조차 쉽게 엄두가 나지 않을 추위였다. 그런 날씨에 팔순이 넘은 어머니가 바람 피할 곳조차 없는 휑한 여의도공원을 다녀온 것이다.

서울 창신동, 아직도 미싱 몇 대 놓고 40년 전 그 때처럼 봉제일을 하는 소규모 공장들이 밀집해 있는 그 좁은 골목길에 전태일재단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다. 어쩌면 전태일이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전태일이라는 이름의 무게감이 무색할만큼 허름하고 좁은 전태일재단.

그곳에서 만난 어머니는 우려대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이틀 동안 몸살을 앓아 오전에는 병원에도 다녀왔지만 젊은이들도 견디기 힘든 매서운 바람을 쐬고 난 직후니 그럴 수밖에.

숭늉마냥 컵 한 가득 담긴 커피를 마시며 어머니는 미안해했다. 먼 길 찾아왔는데 미안해서 어쩌냐며 다시 날을 잡잔다. 정작 미안한 건 우리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아가면서 지척의 어머니를 찾아뵙지 못한 아들의 마음일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찾아온 ‘손님’을 그냥 보내기 아쉬웠는지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놓는다. 곁에서 시중을 들던 아들 태삼 씨가 오늘은 그냥 쉬시라고 권해도 도란도란 시작한 이야기는 한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 곳에 어머니가 사신다

닷새 후 잡혔던 약속이 다시 한번 미뤄졌다. 좀체 회복이 쉽지 않은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다시 이틀 후인 12월 23일 오후로 약속이 잡혔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 날은 영하 10도까지 떨어졌다. 우려대로 재단 사무실에 어머니의 모습이 안 보인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전태일재단 오도엽 기획실장이 웬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들고 길안내에 나섰다. 재단 사무실에서 걸어서 5분 거리, 그 곳에 어머니의 집이 있다. 전형적인 이 동네 집이다. 하늘에 맞닿을 듯 꼬불꼬불한 골목길 좌우로 숱한 출입문들이 보인다.

어머니의 집은 거기가 거기인 듯한 골목 중간쯤 계단을 오르면 나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방 하나, 거실 겸 부엌 하나 있는 예닐곱 평 쯤의 공간이 드러난다. 자리에 누워있던 어머니가 우리를 맞았다.

보따리의 정체는 겨울 이불이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좀 더 두꺼운 이불을 챙겨온 것이다. 어머니는 괜시리 오도엽 실장을 타박한다. 그 짐을 손님들 들게 한 것 아니냐며 농 섞인 질책을 꺼내놨다. 편히 얘기를 나누라며 자리를 비키는 오 실장을 향해 먹을 것 챙겨가라는 얘기도 잊지 않는다. 고마운 마음과 정이 담긴 모자지간의 대화처럼 들렸다.

어머니의 집은 아들 태일과 함께 서울 생활을 했던 도봉구 쌍문동이다. 그 집에서는 지금도 태삼 씨와 손주들이 생활하고 있다. 어머니가 창신동으로 옮겨온 것은 2009년 6월로, 거동이 불편해서였다. 재단 사무실에서 주로 지내는데 쌍문동까지 오고가기가 녹록치 않아 아예 사무실 근처에 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슬쩍 집안을 둘러보며 지내기 불편하시지 않냐고 묻자 손사래부터 친다. 방이 얼마나 따뜻한지 아냐며, 노인네 혼자 지내기에는 충분하다며 혹시나 걱정할까봐 되레 걱정이다. 집을 얻을 때 재단 사무국 내에서 논란이 있었다. 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고령의 어머니가 불편할 것을 우려했지만, 어머니의 이 정도면 됐지, 한 마디로 정리했다.

고맙고 미안한 사람들

방 안 곳곳에는 세월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문익환 목사, 김수환 추기경,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의 오래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시대의 거목들과 나란히 시대를 살아낸 증거였다. 특히 2009년 세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각별한 인연들을 갖고 있다.

“(1970년) 11월에 전태일이가 죽었는데 추기경님이 연소 근로자들 다 모아 부르라고 해서 위안 잔치를 해줬어요. 그때부터 추기경님 알아가지고 (추기경님이) 여러 가지로 많이 도와줬거든요. 그래가지고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만나고 했지요.”

김수환 추기경과의 추억은 온통 조르러만 갔다고 했다. 어디 한 곳 기댈 곳 없던 그 시절 의문사 사건 등이 나면 항상 추기경을 ‘괴롭혔다’고 추억했다. 고맙고 미안한 사람이란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동지’였다고 회고했다. 대우조선 노동자 고 이석규 씨의 죽음 등 수많은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 했던 거리의 동지였다. “그 때는 ‘노무혀니’ 하고 같이 만날 싸우러 다녔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야당 시절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권력에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모임인 유가협 활동을 위해 돈을 만들어야 했을 때, 그림 전시회를 열고 남은 그림들을 들고 막무가내로 찾아가 사달라고 하기도 했단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억울한 죽음을 밝혀준 일에 대해 남다른 고마움을 표시했다.

어머니는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서 유가협 얘기를 유독 많이 했다.

“학생운동 하다가 죽으면 시체를 안주는 거라. 즈그 맘대로 아무 데나 갖다 묻어버리고 부모한테 연락도 안 하고. 그때는 하도 좌익이다 빨갱이다 (하는 말들에) 무서워 가지고 일가친척도 자기 아들 빨갱이하다 죽었다하면 나설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또 부모한테 연락을 해도 빨갱이하다 죽었다 하면 ‘야 이노무 새끼들아, 어떻게 공부 시켰는데 빨갱이하다 죽었는가’ 하면서 자식들 욕만 해샀고. 아버지가 아들이 죽었다고 올라와서 아무데나 하소연할 데가 없으니까 유가협 만들어서 싸움해야 한다고.”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아들의 기쁨을 위해 공부를 하다

이야기는 두서없이 흘렀다. 30년 전, 20년 전, 10년 전 이야기들이 마치 겨울밤 손주들에게 들려주듯 이어졌다. 때로는 독재자에 대한 육두문자, 그리고 때로는 자식 잃은 부모들의 동병상련이 끝없이 계속됐다. 하지만 이야기가 1970년 즈음으로 가자 중간중간 말들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평생을 가슴에 박힌 아픈 기억 때문이리라.

담배와의 인연

어머니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담배를 피웠다. 담배 피는 모습은 사진 찍지 말라면서도 담배를 내려놓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담배를 권한 이는 어머니의 시어머니였다. “전해에 태일이 아버지 죽고, 그리고 다음해에 바로 태일이 죽고, 못 견디겠더라고. 그때 시어머니가 ‘네 심정이 어떻겠냐’며 ‘술은 몸을 망치니까 차라리 담배를 피워보라’고 하대. 시어머니도 모진 세월 그렇게 견뎠다고.”

건강 생각해서 담배를 좀 줄이시는 게 어떻겠냐는 물음에 답은 바로 돌아왔다. “얼마 전에 병원에 갔는데 의사도 많이는 피지 말고 담배는 그냥 하라고 그러더라고.” 몸과 마음의 상처를 담배라는 벗으로라도 치유하라는 뜻이었을 게다.

그리고 어머니는 1970년 어느 날 얘기를 하는 그 순간, 줄담배를 피웠다. 아들을 병원에서 마지막 본 순간, 아들의 주검을 병원에 두고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끌려가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인 7200만원을 제의받는 순간을 얘기하는 내내 담배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한 어느 날, 아들 태일은 어머니에게 책을 한 권 사달라고 말한다.

“근로기준법이라는 책을 하나 살라하는데 돈이 없다고, 나한테 일수 좀 내서 책을 사달라고. ‘그 책 사가지고 뭐 할라고 일수까지 내 가지고 책을 사냐’ 했는데 두꺼운 책이야. 그래갖고 어떻게든 해주니까 그걸 갖다놓고 쉬운 건 나한테 가르쳐주고, 또 한문이 있으면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으면 참 좋겠대. ‘엄마 아는 사람 중에 대학생 아들이 있는 데를 아는가’ 하는데 무허가 판자촌에서 우리하고 가까운 사람 중에 대학생이 있겠는가. 그런데 동네 반장한테 물어보니까 이북에서 피난 와서 장사하는 아저씨가 옛날에 대학 나왔다고 하더라고.”

어머니는 아들의 부탁 때문에 그 대학 나왔다는 아저씨를 찾아갔다. 아들이 공부를 하는데 한문이 많이 나와서 좀 도와줄 수 있냐고 하자 그는 “태일이요? 인사 잘하는 그 태일이요?”라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아(애)나 어른이나 보면 깍듯이 인사한다고 동네에서 소문났어. 인사 잘하는 청년이라 그러면 다 안다고.” 그래서 태일은 근로기준법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어머니는 태일에게서 6개월간 근로기준법을 배웠다. “내가 근로기준법 배워다가 뭐하겠어요. 보따리 들고 다니면서 장사하는 내가. ‘근로기준법하고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 해도 ‘엄마 배우는 게 있어서 좋다’고. 그래서 밤에 일하고 와서 무허가 집에 살면서 풀밭에서 호야 있잖아 호야, 기름 심지 해놓고 풀밭에서 공부 배운다고.”

왜 공부를 했느냐는 질문에 어머니는 답한다. “나하고 태일이 하고는 무진장 사랑했거든. 그러니까 좋아하니까, 기뻐하는 걸 볼라고 나는 시키는 대로 하고 배웠다고.”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학교 문턱 한 번 밟아본 적도 없고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어머니는 그렇게 근로기준법을 배웠다.

“쌍문동 208번지 전태일이가…”

지금도 너무나 생생히 기억나는, 운명 같은 그 날,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닷새간의 금식 기도를 하고 있던 어머니를 모시러 막내를 보냈다. 집에 들어선 어머니는 아들의 다른 모습을 금방 눈치 챘다.

“집으로 오니까 만날 작업복만 입고 댕기더니만 (이날은) 작은 아버지가 사준 가죽 구두, 생전 안 신고 다니던 걸 신을라고 닦아놓고 이발도 했더라고. 큰집에 제사 지내러 갈 때나 입는 바바리도 다 다려놓고, 아주 어디나 가는 것처럼 채비하고 있더라고. ‘어디 가는 거냐?’ 했더니 ‘아니 별난 데 안 간다’고 그러대.”

두 시간이 넘게 강단 있게 얘기를 이어가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데군데 말이 끊겼다. 세월을 담은 눈동자도 따라 떨렸다.

“밥 먹자 그래서 밥 먹으러 앉아가지고 순옥이 머리를 만지면서 ‘엄마 말 잘 들어라, 엄마 말만 잘 들으면 절대로 이 세상 부끄럽지 않게 살 거다. 나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았는데… 살았는데… 내가 오빠 노릇해야 하는데 못해서 미안하다. 앞으로 돈 벌면 해줄 테니까 내가 올 때까지 엄마하고 잘 살아라’ 하는 거야.”

그제서야 어머니는 집안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 책은 지 책대로 다 노끈 사다 묶어서 따로 놓고, 일기장도 또 얼마나 여물게 싸서 묶어놨는지. 지 옷은 지 옷대로 끈을 잘 묶어놓고. 그래서 ‘너 어디 갈라고 이리 챙겼냐’ 했는데 바바리를 딱 입고 나서더니만 ‘엄마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는 거야. 한 시에 구름다리로 나오라는 거야.”

하지만 어머니는 차마 나가지 못했다. 상상조차 못했겠지만, 아들의 몸에 불붙은 그 모습을 보지 않게 하려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전봇대에 달아놓은 동네 소식 전달용 스피커에서 “쌍문동 208번지 전태일이가 휘발유를 (뒤집어)썼다”면서 자신을 찾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아들은 어머니의 곁을 떠나 세상의 중심에 섰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아직 ‘그날’이 오지 않았으니

정권이 바뀌고 지난 10년간과 다른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할 말도 많았을 것이다.

“노동자 서민이 인간답게 사는 날을 보기 위해서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싸움했어요. 학생들 데모하는 데도 가고, 여섯 번은 들어가 살다오고 수배도 많이 되고. 10년 동안 집에 한 번도 못 들어갈 때도 있었어. 그런데 이제는 서민들, 노동자들만 때려잡고, 기업인들하고 법조인들만 살 수 있는 현실이 됐어요. 그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는 다 가지고 있는데, 이제 점점 나빠지니까 너무 한심해요.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정말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2010년은 어머니가 ‘전태일 동지’로 부르는 아들의 40주기다. 어머니로서도 40주기에 대한 바람이 있지 않을까.

“40주기는 어떻게 한다고 그래샀더만. 내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 안하거든. 느그 양심껏 해야 될 것이다, 그러지. 그날을 지금껏 기다려도 아직 그날이 안 왔으니까. 그리고 옛날에는 욕도 하고 했지만 이제는 이런 말을 하나 써줬으면 좋겠어. 사람들이 나보고 같잖다고 하겠지만, 우리끼리 하는 소리로 이명박 대통령께서, 위대한 대통령께서 서민들을 벌거지(벌레) 취급하지 말고, 서민들도 이 나라 국민이다 (생각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있는 자만 사는 세상 만들지 말고 형평성을 가지고 잘 살펴서 국민을 국민답게 대접 좀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어머니가 말하는 아직 오지 않은 ‘그날’은 어떤 날일까.

“서민들도 노력한 만큼은 취직자리가 있어야 될 거 아니야. 우리 태일이가 죽으면서 ‘20년 30년 되면 소 팔고 논 판돈 가지고 공부 시켜도 절대 취직 안 된다’ 그랬거든. ‘왜 그러노?’ 했더니 ‘그 때는 권력자와 있는 놈들만 외국 가서 집사고 땅 사고 뭐하고 다 하고 노동자는 만날 쎄빠지게 일해도 노동자 아들 로 밖에, 대대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거라. 취직자리 없어서 눈에 불을 켜도 취직 못한다고.”

일자리를 못 구해 식구들 건사할 방법을 못 찾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 어머니가 꿈꾸는 ‘그날’은 그렇게 소박한 세상이었다.

어머니는 오늘도 창구멍을 넓힌다

어머니의 ‘동지’ 전태일은 한국 노동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여전히 회자된다. 어떤 노동조합도 전태일 정신을 잇는다는 대의를 거스른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전태일 정신에 대한 해석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생각하는 ‘전태일 정신’이란 무엇일까.

“다 같은 인간은 인간인데 노력하면, 열심히 하면 벌고, 잘 살 수 있잖아요. 그런데 노동자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몸에 병들고 다 못 산다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 그냥 있으면 안 되니까, 노동자랑 학생들이 합쳐서 정말 권리를 찾아야 하지 않나. 어떻게든지 ‘창구멍’이 나면, 그래서 그게 조금씩 조금씩 넓혀지면 캄캄한 암흑세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힘을 내서 권리를 찾을 수 있다고 (태일이가) 나한테 말해줬어.”

어머니에게 전태일 정신은 어둡게 막혀 있는 창에 작은 구멍을 내는 일이다. 그 창 너머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작은 구멍 너머로 빛을 보고, 그 구멍이 점점 커지는 것에서 희망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전태일 정신이었다.

새해가 밝았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2010년, 어머니가 대한민국 노동자들에게 건네는 한 마디다.

“그래도 우린 단결해서 같이 싸워야 된다. 정말 제대로 단결해서 안 싸워서 그래. 정말 단결해서 싸우면 저리 함부로 못해.”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식구들하고 미역국이나 먹으려고

어머니를 찾은 다음날, 크리스마스 이브였던 2009년 11월 24일(음력 11월 9일)은 어머니의 여든한 번째 생신이었다. 마흔 하나에 아들을 잃고 싸워온 사십 년 세월을 “참 못된 짓도 많이 했다”고 회고한다. 모질게 세상에 맞섰던 세월이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 몸에도 수없이 남았다.

“비만 오면 복숭아뼈에 물이 생겨가지고 병원 가서 물 빼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다 보면 ‘그놈’들한테 맞아서 살점이 떨어져 바지에 붙고 피가 치컥치컥 하거든. 혈액순환이 제대로 안 돼, 신경통 때문에. 최근 들어서는 지팡이 없으면 걷지도 못해. 그래도 내가 독해가지고 아직 안 죽고 산다고.”

2008년, 팔순을 맞아 어머니의 팔십 평생을 담은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가 출간됐다. 어머니는 그 책에 대해 ‘속았다’고 말한다. 시인이자 전태일재단 기획실장인 오도엽 실장이 몇 달에 걸쳐 어머니의 이야기를 녹취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손가락 하나만한 녹음기로 내 얘기를 다 녹음을 했더라고. 그래서 책 절대로 내면 안 된다고 두 달을 넘게 싸웠지.”

하지만 어머니는 이 땅의 수많은 ‘자식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책이야 그렇다치고 팔순잔치는 절대로 못하겠다던 어머니의 고집도 자식들이 꺾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부끄럽다고 말한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동안 조카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언니의 딸이건만 2007년에야 처음 만난 조카였다. 어린 시절 농민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일본군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작은 선녀’였던 꼬마 이소선은 급히 고향을 떠나오면서 언니와 생이별을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언니는 임종을 맞아 자식들에게 ‘내 동생 이름이 이소선이고, 고향은 경북 달성군 박곡리니 꼭 이모를 찾으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모와 조카는 그렇게 다시 만났다. 그 조카가 생일을 즈음해 문안 전화를 걸어왔다.

어머니는 조카에게 당부했다. 이번 생일에 올라와서 닷새만 있다 가라고. “이제 얼마 살지도 못할 거 질녀가 와서 옷 맞는 거 챙겨 가게. 내가 죽고 없으면 다 태워버릴 거 챙겨가야지. 올해는 식구들 모여서 미역국이나 끓여 먹세.”

담담한 목소리 속에 힘겨운 세월이 묻어나왔다.

어머니의 아들 전태일은 캄캄한 세상에 ‘창구멍’을 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이 뚫어놓은 그 창구멍을 조금씩 조금씩 넓혀왔다. 이제는 쉬고 싶다는 어머니, 하지만 더 오래 사셔야 한다. 아직 ‘그날’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