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보다 ‘마감’에 집중하라
시작보다 ‘마감’에 집중하라
  • 김관모 기자
  • 승인 2010.01.0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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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돌과 사랑 나눈 석공예 명장 백남정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세상에는 별의별 돌이 존재한다. 예쁜 돌, 매끈한 돌, 못 생긴 돌, 검고 구멍이 많은 돌, 크고 각진 돌…. 발로 차일만큼 세상에서 가장 흔한 것이 돌이다. 그런만큼 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친구였다. 처음 인류가 사냥이나 채집 등을 시작한 이래, 돌은 장난감부터 필수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인간과 함께 발전했다. 어쩌면 돌은 인류 예술의 시발점이며 역사의 산 증인인지 모른다.

그런데 최영 장군처럼 금보기를 돌 같이 보는 것이 아니라 돌보기를 금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올해 대한민국 명장에 오른 미술석재 백남정 대표도 이들 중 하나다.

모습이 아름다워 존재하게 하고
미소는 마음을 움직여 찾아오게 하며
보고 있으면 어느새 하나가 되어 있네
만지고 있으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꿈을 이루도록 용기와 힘을 채워주며
행복을 그리고 기쁨을 나누라하고


- 백남정 작 ‘짝사랑’에서 -

돌이 원하는 것을 아는 게 사랑

백남정 대표는 돌을 사랑이라고 말했다. 처음 그에게 돌은 일터이자 돈 버는 장소였다.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난 백 대표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16살 때 무작정 상경해 구리시 교문동의 대림석재에서 처음 석공업을 시작했다. 당시 형들이 ‘돌 일(석공업)’을 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1970년대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화강암은 좋은 질과 싼 가격으로 일본에 대량 수출되고 있어 돌 일을 하는 사업장이 많았다. 하지만 당시에 기계로 하는 현대식 작업은 상상할 수 없었다. 정과 망치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해야 했으며 주변 환경도 열악했다. 장갑도 부족해 몇 달 동안 기워서 껴야 했고 겨울에는 돌이 얼어서 정이 들지 않았다.

건설작업이나 큰 석물 작업 등 가릴 것 없이 하던 때라 작업량도 많아 오전 5시에 일을 시작하면 밤 10시까지 일이 이어지기 일쑤였다. 일이 끝나면 한두 시간 동안 다음날 작업을 하기 위해 기구들을 정비해야 했다. 기구들을 그저 갈고 닦는 것만이 아니라 대장간에서 하는 것처럼 불에 달구고 정으로 쳐서 쓰기 좋게 ‘다려놓지’ 않으면, 다음날 기구들이 무뎌져서 사용할 수 없을 지경이 된다. 돌을 다룬다는 것은 쓸 수 있는 돌을 잘 보고 기구를 잘 다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 무거운 돌을 옮길 때면 자칫 돌이 미끄러져서 손끝을 다치는 일은 많다. 그래서 백 대표의 손끝은 여전히 상처투성이다. ⓒ 봉재석 기자

“초년생이고 기술 배울 때는 실수도 많았어요. 화강암 같은 단단한 돌은 때려도 잘 안 나가는 거예요. 그러다 서투르게 결을 잘못 봐서 안 나가야 할 부분을 깨서 못 쓰게 만들기도 했지요. 지금으로 치면 20~30만 원짜리 나간 거죠. 스승에게 심하게 얻어맞을 때면 그만 두고 싶은 생각도 많이 했죠.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기술을 마스터하고 나서는 백남정 일 잘한다는 소리 듣게 된 겁니다.”

초등학교를 다닌 것 외에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던 백 대표에게 이 일은 싫어도 그만 둘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어려움을 딛고 나간 일이 나중에는 그에게 신바람을 가져다주었다. 1980년대에 결혼도 하고 일이 손에 익으면서 슬슬 일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그에게 실수는 없다. 다만 무거운 돌을 옮길 때면 자칫 돌이 미끄러져서 손끝을 다치는 일은 많다. 그래서 백 대표의 손끝은 여전히 상처투성이다. 하지만 상처투성이에 돌가루가 잔뜩 묻은 손을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미 돌 일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 자체가 된 것이다. 이제 자신이 생각하는 데로 정과 망치가 움직이고 돌이 모습을 찾는다. 끊임없는 돌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경지다. 백남정 대표는 어디를 가나 돌을 생각한다. 남들은 그냥 발로 차버리는 돌도 하나하나 세심히 살피고 아름다움을 찾는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그에게 행복이다.

“돌에게 사랑받으려면 돌을 통해 무언가를 재생산하는 행위를 해야 하죠. 다른 사람들이 그냥 보면 돌이지만 저는 하나하나가 자식 놈들처럼 그렇게 예쁩니다. 이렇게 손으로 다듬으면 여러 모습으로 변하잖습니까. 그러면 그것들이 자기를 이렇게 꾸며달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거죠. 그래서 거기에 맞춰 변한다면 돌들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요.”

시작보다 마감이 중요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석물을 자기 생각대로 다루기까지는 시간도 필요했지만 일을 대하는 태도도 중요했다. 백남정 대표는 그 어떤 작업도 그냥 끝내는 법이 없다. “모든 일은 반드시 ‘마감’(마무리)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그에게 있어 마무리는 사람을 만날 때 좋은 옷과 예를 갖추는 것과 같다. 사람들에게 작품의 정성과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유일한 길은 바로 작품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감에도 여러 기법이 있지만 백 대표는 특히 정으로 돌 표면을 쳐서 까칠한 표면 질감을 표현하는 정마감을 많이 한다고 했다.

한번 석공예품을 만들 때 소품의 경우 일주일이면 되지만 큰 작품은 10달에서 1년까지 걸리기도 한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시작보다 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현대식 기기들을 이용하면 작품을 보다 빨리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수작업을 한 것과 크게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마감만큼은 기계나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정성을 다한다. 기능대회 등을 심사할 경우에도 마감을 하지 않은 작품은 감점처리를 할 정도라고. 백 대표는 “급하게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을 봤을 때가 가장 싫다”며 “무슨 작품을 만들든지 미리 시간을 들여서 준비하고 완성도를 높이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정식 예술이나 미술을 공부하지 않은 그가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마련한 방책이다. 초등학교를 나온 이후 줄곧 돌일만 한 만큼 조소나 조각에 있어서 기본 지식이 부족했다. 작품을 구상하고 아이디어를 낼 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힘들었다고. 그래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노력으로 부족함을 극복해냈다.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 좋다

백남정 대표가 작품을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또 하나는 조화다.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이런 조화를 강조한다. 그 중 대표작들에 표현했던 것이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가슴이라고.

“지구를 닦아서 그 안에 생물의 암컷과 수컷을 새기는 거죠. 여성의 경우는 가슴을, 남성의 경우는 성기를 추상화해서 지구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음과 양이라고 하잖아요.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지구는 완성되지 않는 겁니다.”

오랜 시간 돌을 다루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조화는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그는 믿는다. 인위적인 제도나 법을 통해 자연이나 인간 생활을 재단하려하면 할수록 문제가 생긴다. 설사 무엇인가를 바꾼다고 해도 스스로 할 수 있게끔 기본을 조성할 수 있는 범위에서 끝나야지 그 이상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일을 하다가 일에 싫증이 생기거나 일손이 잡히지 않을 때 며칠 간 휴식을 취한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반드시 일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2,3일씩 짬을 내서 산행을 하거나 외국 여행을 떠나 자기 일과 자신을 되돌아보는 여유를 지닌다. 그것은 휴식이지만 배움이며 자신의 열정을 되찾는 일이다.

“유럽여행에 갔을 때 런던이나 파리, 독일 미술관에서 석공예품들을 보면 내가 작아져요. 외국을 다녀오고 나서 더 배워야 한다는 의욕마저 느끼죠. 그래서 한국을 변화시키고 석공예 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나도, 내 작품도 계속 멋있어질 겁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세상은 게임이다

1970년 처음 일을 시작한 이후 백남정 대표가 남긴 기록들은 대단하다. 지방은 물론 전국 기능경기대회를 휩쓴 이후 석공예 심사위원과 대한광업진흥공사(지금의 한국광물자원공사)의 외래강사를 맡기도 했으며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선수들이 우승하는데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석조각협회, 대한민국 아사달회(석공, 석조각 예술인 모임), 한국석조예술인협회, 돌문화보존회 등은 물론 한국석재신문 기자까지 겸직하면서 석재에 관련해 다양하고 폭넓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석재와 관련해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을 다 하겠다는 의지다. 이는 우리나라 석재예술을 바꿔보겠다는 신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석공예 기술은 세계적으로 뛰어나다. 국제 기능올림픽 우승 종목 중에는 꼭 석공예가 빠지지 않는다. 백남정 대표도 당시 출전하는 선수들을 직접 관리·감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비해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자연스럽게 자기 재주를 펼칠 공간은 협소하다.

우리나라에 조소과나 환경조각과가 있기는 하지만 사회 관심의 이면에 있다. 백 대표도 2003년에는 미술석재를 설립하고 남양주 터에서 7, 8년 가까이 작업을 했지만 현 자리에 국립공원이 조성된다고 하여 조만간 이전을 고민하고 있다. 노동부에서 표창한 대한민국 명장이란 이름까지 올랐지만 별다른 지원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 석물수출을 값싼 중국시장에게 뺏긴 이후 한국 석공업은 많이 약해진 상태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백 대표는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 1997년부터 2002년까지 5년 간 창덕궁 복원 사업에서 일했으며, 최근까지 서울 디자인거리에서 양쪽 도로의 석공사를 맡았다. 이런 거대사업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한국에서 석공업에 대한 지원이 얼마나 필요한지 몸소 체험한 셈이다.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야 해요. 한국에는 빨리빨리 문화가 있어서 진짜 발전은 하지 못해요. 대한민국 석공예 역사가 짧기 때문에 아직 남길만한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죠. 그래서 장기적으로 공부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해요. 오랜 세월이 흘렀을 때 후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를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면 자신의 일에 사명감을 지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백남정 대표는 말한다.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려야하는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은 당장이 이득보다 더 큰 성공을 위한 인내라고 강조했다. 쉽게 생각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늘 자신의 일을 고민할 때 자신이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백 대표의 철학이기도 하다.

“남양주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세상은 게임’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일방적인 게임(교육)이었지만 앞으로 직업도 가져야 하고, 결혼도 하고 그밖에 여러 퍼즐게임을 맞추는 거죠. 마지막에 죽음이란 퍼즐로 마무리하기 전까지 어떻게 어떤 생각을 지니고 하느냐가 중요해요. 하다보면 하기 좋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있을 거예요. 직업도 취미로 하라는 거죠. 먹기 살기 위해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쥐지 말아야 하고 그것을 잘 찾아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