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전기, 세상을 바꿀까?
똑똑한 전기, 세상을 바꿀까?
  • 안형진 기자
  • 승인 2010.01.07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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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성장’의 중심이라는 스마트그리드에 대한 우려
68조원 드는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 공론화 절실하다

ⓒ 전국전력노동조합
전력망이 우리 삶을 바꿔줄 시대가 곧 도래한다. 스마트그리드(Smart Grid, 똑똑한 전력망).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이 새로운 개념의 전력망은 각 전력 소비자들이 효율적인 전력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 10% 정도의 전력 절감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세탁기, 냉장고, 전열기 등 전자제품들도 함께 똑똑해져 전기 값이 쌀 때 켜지고 비쌀 때 자동으로 꺼지는 것도 가능해진다. 게다가 친환경 에너지까지도 남김없이 활용이 가능하다고 하니 친환경 녹색 에너지 사업이다. 8만8천여 명의 일자리 창출 효과는 덤이다.

이 정도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녹색성장’에 걸맞은 주력사업으로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전국전력노동조합(위원장 김주영, 이하 전력노조)과 한국전력은 한 목소리로 이렇게 완벽한 스마트그리드 사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려의 목소리를 듣기 전에 일단 정부가 말하는 전력산업의 신천지로 들어가 보자.

‘스마트그리드’가 뭐기에

스마트그리드.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명칭이다. 정부가 4대강 사업에 21조 원의 예산을 투입한다는 사실에 대한민국 이곳저곳이 몸살을 앓고 있지만, 이 스마트그리드에 투입되는 예산은 2030년까지 자그마치 68조 원이다. 장기적인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인 셈이다.

간단히 말해 스마트그리드는 기존의 전력망에 통신망을 결합시킨 형태의 새로운 전력망이다. 전력망에 통신망이 덧붙게 되면 발전과 송전, 배전 과정에서 전기와 관련된 ‘정보’가 오고 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즉 기존 전력망이 전력 생산자가 통제하는 수직적·중앙집중적 네트워크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는 공급자와 소비자가 쌍방으로 정보를 소통해 수평적·협력적·분산적 네트워크가 가능해진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당장 정부가 2012년까지 전국에 공급하려 하는 스마트미터(Smart Meter)에 대해 알아보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다. 스마트미터는 현재의 아날로그식 전력량 측정계를 대체할 디지털 전력량 측정계다.

여기에 스마트그리드가 연결되면 전력량 측정계는 사용자에게 현재의 전력 사용량과 가격변동 정보를 실시간으로 통보해준다. 이는 전력 사용자들의 합리적인 전력소비를 이끌어 10% 정도의 요금 절감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집중되던 전력소비가 스마트그리드로 인해 분산된다면 발전설비 투자비용이 줄어든다.

스마트그리드의 효과는 신재생에너지의 활용으로도 연결된다. 신재생 에너지로 통칭되는 친환경 발전, 즉 태양열, 풍력, 조력 발전 등이 실사용 에너지로서 각광을 받지 못했던 것은 이들의 발전효율이 고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돌아갈 때는 잘 돌아가지만 안 돌아갈 때는 전혀 돌아가지 않는 이들의 특성은 전력의 ‘안정적’ 공급이 무엇보다 중요한 전력망에 물려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스마트그리드가 적용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각 발전소가 실시간으로 전력 정보를 교환해 신재생에너지 발전소가 쉬면 다른 발전소를 조금 더 가동하고, 신재생 에너지 발전소가 가동 중이면 다른 발전소를 쉬도록 전력망을 실시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 정도면 완벽한 ‘녹색성장산업’의 여건을 갖췄다 할 수 있다.

정부에 따르면 스마트그리드의 도입은 단순히 집에 달린 전기 계량기 하나를 뜯어고쳐 전기 사용량을 줄이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각 가정에 인터넷 회선이 보급되면서 전 국민의 생활패턴이 변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스마트그리드 역시 모든 국민들의 생활패턴을 변화시킬 잠재력을 지닌다.

정보통신을 통해 집안의 가전제품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냉·난방 체계를 집 밖에서도 손쉽게 조절할 수도 있다. 이렇듯 전력망과 통신망의 통합만으로도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수많은 기술들이 눈덩이 구르듯 불어난다.

새로운 전력망을 구축하는 데에는 우선 전선 등 전력 관련 설비들이 필요하다. 또 1400만 개에 이르는 기존 아날로그 전력량계도 디지털 전력량계로 교체해야 한다. 송전, 배전을 제어할 정보관리 인프라도 새롭게 구축돼야 하고 스마트그리드에 대응할 각종 가전제품도 개발돼야 한다.

관련 기업들은 오랜만에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기회를 찾아 ‘신’이 났다. 이들은 2009년 5월 21일 ‘한국스마트그리드협회’를 창립해 공동대응을 결정했다. 현재 협회 회원사는 99개사로 건설, 통신, 전자, 자동차 등 각 산업별 굴지의 대기업이 잔뜩 포진해 있다.

정부의 ‘호언장담’, 정말일까?

스마트그리드가 소위 ‘돈’이 되는 사업으로 급부상하며 관련 기업들이 연일 김칫국을 들이키고 있지만, 정부가 주장하는 스마트그리드의 실효성 논리가 과연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스마트그리드로 인해 전기 사용이 줄어들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정말 ‘전기 사용 절감’이 효과를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나라 일반 가정은 한 달 평균 약 2만1천 원의 전기요금을 내고 있다. 정부 말대로 10%의 전기요금이 절감된다면 한 달 기준으로 약 2100원의 요금을 절약하게 된다. 그것도 상대적으로 전기가 저렴한 새벽 시간에 가전제품을 가동한 대가로 얻게 되는 절감 효과다.

한 달 요금 2100원을 절약하기 위해 세탁기를 새벽에 가동하고, 새벽에 요리하며 새벽에만 TV를 시청하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재 각 가정에 설치된 전기 계량기의 가격은 2만5천 원 선이다. 하지만 디지털 전력량계는 가장 저렴한 것이 15만 원이고, 비싼 것은 50만 원에 이른다. 가장 저렴한 전력량계가 부착된다고 해도 한 달 2100원의 요금 절감으로 전력량계 값을 만회하려면 6년이 걸린다. 일반적인 전력량계 수명은 10년으로 수명이 다하면 교체해야 한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도저히 메리트를 찾을 수 없다.

2009년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최철국 의원은 “실시간 요금제에 따라 전기사용량의 10% 이상이 저렴한 시간대로 옮겨간다 하더라도, 전기요금 절약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전기사용량 자체를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최 의원은 전력 사용량 자체가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에도 “전력사용량 증가는 생활수준 향상에 따른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누진제로도 증가추세를 막지 못하고 있다”며 “월 평균 300kWh 초과 가구 비중도 ’02년 12.2%였으나 ’08년 27.7%로 두 배가 넘게 증가했다”고 덧붙였다.

▲ 스마트그리드 개념도

다시 고개 든 전력시장 개방 압력

정부의 스마트그리드 정책을 들여다보면 실효성에 대한 논란뿐 아니라 수그러들었던 ‘전력시장 개방’에 대한 요구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전력노조나 한국전력이 우려하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다.

전력노조가 스마트그리드 사업 자체에는 긍정적인 입장이다. 전력노조 최용혁 대외협력국장은 “실효성 논란을 떠나 일단 스마트그리드 사업 자체의 취지에는 공감한다. 전력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것이고 덧붙여 새로운 성장기회까지 얻는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문제는 스마트그리드 사업에 참가하는 통신업체들이 통신망과 전력망을 통합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하며 한국전력에 전력 판매망을 개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11월 26일 열렸던 ‘그린오션포럼’에서는 스마트그리드 사업을 두고 각 기업체와 관계자들이 모여 새로운 비즈니스모델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윤원철 교수는 “스마트그리드 사업 성공을 위한 수요자의 능동적 참여는 소비자의 선택권이 확보되는 상황에서 가능하며, 현재의 전기요금은 과도한 누진제, 종별교차보조 등 비시장적 요소가 많아 반드시 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전력시장에서의 경쟁은 도매시장과 소매시장의 경쟁을 분리해 성립할 수 없어 소비자의 선택권이 없는 도매경쟁시장이나 발전부문의 경쟁만 존재하는 수요독점상태는 진정한 의미의 경쟁체제라 할 수 없다”고 판매시장의 경쟁도입을 촉구했다.

현재의 전기요금은 지식경제부 장관의 고시를 통해 결정된다. 정부가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비시장적 통제가 이어진다면 전력 소비자의 자기 결정권을 제한해 스마트그리드를 통한 전력소비 감축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전력노조 최용혁 국장은 “한국전력이 적자를 떠안으면서 전기요금을 몇 년째 올리지 않고 있는 것은 ‘공기업’이기 때문”이라며 “전력시장이 개방된다고 이윤추구가 목적인 민간 기업이 전기요금을 낮출 수도 없을 텐데, 이들이 시장경쟁을 주장하는 것은 전력 판매 사업까지 함께 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한국스마트그리드협회 이승룡 홍보과장은 “전력산업 판매 경쟁 도입 주장은 회원사 일부의 주장”이라며 “협회가 회원사를 대표하고 있기는 하지만 협회의 이름으로 일부 회원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어렵다”고 즉각적인 답변을 회피했다.

‘녹색성장’ 호들갑 속 국민은 있나?

문제는 국가 중대사업인 스마트그리드를 전력 공기업인 한국전력이 아니라 민간 기업이 주도하고 있으며 이를 정부가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전력도 스마트그리드협회에 참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장사’를 발굴해 낸 대기업들 사이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전력노조의 설명이다.

스마트그리드 사업이 기본적으로 전력산업의 범주에 속해 있는 점만 감안하더라도 이는 전력산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전력 기업이 주도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우리나라에서는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민간 주도로 스마트그리드 사업이 진행됐을 때 그 열매를 누가 가지게 될 것인가도 문제다. 어마어마한 투자비용이 국민의 편의를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몇몇 대기업의 이익 창출을 위한 투자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로드맵이 그대로 실현된다면 당장 2012년까지 디지털 전력량계가 전 가정에 보급돼야 한다. 단가 15만 원의 가장 저렴한 전력량계가 장착된다 해도 비용은 2조1천억 원에 달한다. 거기에 인건비, 인프라 구축비용까지 합치면 액수는 더욱 커진다.

그렇다면 이 비용은 어떻게 충당될까? 고객이 전력량계 값을 직접 부담하는 방법도 있고 전기요금에 전력량계 가격을 포함시키는 방법도 있다. 정부가 지원하는 방법도 있지만 국민들의 세금을 통해 지원하게 된다. 어떤 길을 가든 결국 국민들의 주머니에서 지출되는 것이다.

전력노조 최용혁 국장은 “전기요금 자율화를 통해 전기요금이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잘라 말한 뒤 “한 달 많아야 5천 원을 절약하기 위해 20만 원이 넘는 전력량계를 장착해야 하는데다 전기요금까지 상승한다면 국민들만 손해 보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덧붙여 그는 “결국 국민들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스마트그리드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몇몇 대기업의 배만 불려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의 입장에서 재고해야

스마트그리드의 본질은 낙후된 전력망을 개선하고 이를 정보망과 통합해 전력설비를 안정화하고 새로운 친환경 성장 동력을 얻는 것이다. 이는 국가의 장기적인 사업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전력산업의 시장개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다.

현재의 스마트그리드 논의는 일부 기업들이 스마트그리드 사업을 좌지우지하며 전력시장 개방이 스마트그리드의 선결조건인 것처럼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전력산업은 엄연히 국민을 주인으로 둔 공공재의 영역이며, 국민들은 물, 가스, 의료, 전기 등 공공서비스에 민간 기업이 손을 뻗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2008년 촛불정국에 나타난 국민들의 행동이 증명하고 있다.

정부와 대기업이 ‘신 성장 동력’과 같은 미사여구에 휩쓸리며 전력산업 전체를 몇몇 대기업의 잔치판으로 만드는 상황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스마트그리드 사업은 초기단계에 들어서 있다. 제주 구좌읍에는 스마트그리드를 시범운영하기 위한 실증단지가 조성됐고, 향후 이에 대한 많은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스마트그리드를 둘러싼 대부분의 논의가 국민들의 참여는 배제된 채 대기업과 정부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은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대규모 국가 기간산업의 성장과 발전은 국민 모두가 함께 열매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일부 대기업의 입장에서 논의를 진행할 것이 아니라 철저히 국민들을 중심에 두고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또 국민의 생활과 직결되고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인 만큼 모든 국민들이 함께 고민하고 다양한 의견이 수렴될 수 있도록 공론화시키는 과정도 빠른 시일 내에 마련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