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서 노동조합의 정석을 외치다
‘삼성’에서 노동조합의 정석을 외치다
  • 권석정 기자
  • 승인 2010.01.07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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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틀’ 깨고 조합원을 위한 노조 만들기
탄탄한 조직력 기반으로 ‘울산 모범 노조’ 되기까지
ⓒ 삼성정밀화학노동조합

복수노조·전임자 관련 법안 시행을 목전에 두고 노동계에서는 노동운동의 기본단위인 노동조합의 위기를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더 큰 위기는 밖에서부터 불어닥치고 있다. 한걸음 물러서서 보면 사회 일각에서는 노동조합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위기가 닥쳤을 때 찾는 것이 바로 ‘기본’이다. 기본이 튼튼한 심지는 쉽게 꺼지지 않는 법. 이런 때일수록 노동운동의 기본을 충실히 지키는 길이 노동조합의 자생력을 키워나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참여와혁신>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노동조합의 기본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는 노동조합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소개해 나갈 계획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잠시 간과하고 있던 노동조합의 기본역할은 과연 어떤 모습인지 구체적인 활동과 그에 대한 고민을 들어보고자 한다.

無노조 신화 삼성에서 노조를?

‘핸드폰 위치 추적’ ‘도청’ ‘잠복감시’ ‘정보戰’.

여느 스파이영화의 홍보카피가 아니다. 이는 불과 몇 년 전까지, 삼성그룹의 노동조합 탄압 의혹을 가리키던 문구들이다. 삼성의 노조설립에 대한 탄압이 정말로 심한 것인지, 노조가 필요 없을 만큼 근무환경이 훌륭한 것인지는 삼성의 노무관리를 들여다봐야 할 문제이지만 어쨌든 삼성은 무노조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 삼성에는 엄연히 노조가 존재한다.

삼성그룹에는 M&A를 통해 이미 노조가 있던 기업을 인수한 삼성생명, 삼성증권, 삼성화재, 삼성정밀화학을 비롯해 몇몇 계열사에 노조가 존재한다. 이들은 대개 조합원을 위한 노조가 아닌 이른바 유령노조, 서류노조라는 것이 통념인데 삼성정밀화학노동조합(위원장 이동훈)만은 예외다.

삼성정밀화학노조는 기존 삼성노조에 대한 편견을 깨고 오픈숍임에도 불구, 60%에 달하는 노조가입률(전 직원 920명, 조합원 541명)을 기반으로 매년 임금협상 및 단체협상을 꾸준히 전개해나가고 있다.

실제로 삼성정밀화학노조는 2004년 임금협상에서 임금 8% 인상에 합의한 뒤 곧바로 단체협상을 통해 삼성그룹 내규와 달리 정년을 55세에서 57세로 연장하면서 당시 언론을 통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집행부가 바로 현 삼성정밀화학노조를 이끌고 있는 이동훈 집행부였다.

ⓒ 삼성정밀화학노동조합

 

힘들게 설립한 노조. 그러나…

비료에서 시작해 접착제, 고급제지, 의약용 캡슐과 같은 정밀화학분야부터 반도체, LCD 등 첨단전자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군의 중간원료 및 기초화학제품을 생산하는 삼성정밀화학(대표 배호원)은 1964년 울산에서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이하 한국비료)로 출발했다.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설립한 한국비료는 1960년대 당시 국내에 몇 안 되는 비료회사 중 하나로 삼성그룹의 야심찬 사업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한국비료는 1966년 당시 국회의원 김두한의 ‘국회 인분투척사건’으로 유명해진 ‘사카린밀수사건’으로 한 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 사건을 계기로 1967년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공기업이 된 한국비료에 노동조합이 생긴 것은 박정희 정권의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 조치법’으로 노동법이 통제적·억압적으로 개정된 1971년의 일이었다. 그 시절 한국비료의 노동자들은 회사통근버스를 막고 그 앞에 누워서 투쟁을 하는 등 힘겹게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당시 한국비료 사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사촌 간인 박숙희였다는 사실은 그 시절 한국비료노조 설립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당시 한국비료노동조합은 울산지역에서 SK에너지노조, 삼양사노조 등과 함께 몇 안 되는 노조 중 하나였다.

이후 삼성그룹이 한국비료를 재인수한 것은 1994년의 일이다. 한국비료노조는 회사가 삼성그룹으로 재인수된 후 삼성정밀화학노조로 활동을 이어나갔지만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삼성정밀화학에서는 기존 노조를 없애려하기보다 ‘삼성화’시켜나가기 시작했다.

삼성그룹으로 M&A 이후 노조의 활동에 회사의 개입이 점점 심해졌다. 회사는 노조위원장 선거 개입을 시작으로 노조 활동에 대한 간섭을 늘려나간다. 단체협상 기간에 대의원들이 회사와 술자리를 갖는 것이 다반사였고, 대의원들 사이에 편 가르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실제로 대의원대회를 개최하려고 하면 몇몇 대의원에게는 “근무에 들어오라”는 회사의 호출이 이어지기도 했다. 당시 삼성정밀화학노조는 임단협 잠정합의안 찬반투표가 대의원들만을 대상으로 했기에 회사가 몇몇 대의원들을 통해 노조를 ‘구워삶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삼성정밀화학노동조합

노조의 재발견

삼성정밀화학노조는 2004년 15대 이동훈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조합원들의 권익을 되찾는 활동을 시작해나간다. 이동훈 집행부는 M&A 이후 10여 년간 ‘삼성의 틀’ 속에서 위축됐던 노조활동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맨 처음 노조 ‘몸만들기’부터 시작해나간다.

삼성정밀화학노조는 조직력을 키우기 위한 첫 단계로 상집간부들부터 노동가를 비롯한 투쟁구호 등 조직단합에 필요한 ‘기본기’부터 제대로 다져나가기 위해 합숙훈련에 돌입했고 ‘임을 위한 행진곡’도 모르던 조합원들에 대해서도 교육을 병행해나간다.

하지만 조합원교육을 하는 데에도 회사의 간섭이 이어졌다. 처음 조합원 교육장소를 노조사무실이 있던 건물 지하맨바닥으로 정하자 사측에서는 “회사 내에서는 자리를 내줄 수 없다”는 통보가 돌아왔다.

이에 삼성정밀화학노조는 교육장소를 확보하기 위한 장외투쟁을 진행했고 결국 회사는 사내교육원을 내줬다. 이후 삼성정밀화학노조는 조합원들의 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해 기존에 대의원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던 임단협 잠정합의안 찬반투표를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규약을 개정하고 단체협상이나 대의원대회가 끝나면 으레 사측과 술자리를 갖던 기존관행들도 하나씩 고쳐나갔다.

그러던 중 회사가 노동조합의 존재감을 인식하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집행부가 들어서고 난 후 회사에서 사택 부지로 예정된 땅 13만 5천 평을 노조의 동의 없이 매각한 일이 발생한다.

삼성정밀화학노조는 조합원의 권리를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사측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자, 삼성정밀화학노조는 이후 10월에 벌어질 예정이었던 회사 창립 40주년 기념 체육대회에 ‘조합원 전원 불참’을 선언하게 된다.

이후 회사는 체육대회 참가를 계속 요구했지만 삼성정밀화학노조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회사에 노조를 경영진과 동등한 위치로 인정해줄 것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회사는 창립 40주년 기념행사를 조합원들이 빠진 반쪽짜리 행사로 치를 상황에 처하자 노조에 공개사과문을 발표했고, 삼성정밀화학 창립 이래 최초로 체육대회에서 사장과 노조위원장이 나란히 개회를 선언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삼성정밀화학노조 이동훈 위원장은 “당시만 해도 삼성정밀화학에서 노조위원장의 위상은 회사의 과장이나 부장 정도의 레벨에 지나지 않았다”며 “40주년 체육대회를 기점으로 공장장 밑으로 여겨지던 노조위원장의 위상을 노사대등의 위치로 복귀시키고 노조가 회사의 부속품이 아님을 보여줬다”고 회고했다.

이후 진행된 2004년도 임단협에서 삼성정밀화학노조는 매각된 사택 땅과 관련해 조합원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고, 결국 이에 대한 보상금과 함께 노조활동 자율성 보장, 임금 8% 인상 및 정년연장 등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조합원 권리 되찾기

삼성정밀화학노조가 추구하는 노동조합의 기본이란 간단하다. 바로 ‘조합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현실화시키려는 자세’ ‘조합원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명제를 실천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조합원들의 자율성, 그리고 노조의 자주권이다. 삼성정밀화학은 노조의 자주적인 활동을 보장받기 위한 구체적인 활동으로 당시 조합원들을 옥죄고 있던 TPM제도와 생산직 승격시험 폐지 투쟁에 나선다.

TPM이란 설비보전 전문가에 대해 실시되던 설비보전 및 관리를 전 종업원에게 확대시키는 것으로, 본래 사업장의 설비고장을 없애고 설비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회사가 TPM 실적을 인사고과에 반영하기 시작하자 조합원들의 경쟁이 과열되기 시작했고 이는 조합원에 대한 현장통제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또 회사가 몇몇 조합원에 대해 ‘TPM 리더’라고 하여 특권을 부여하자 이들의 활동이 노조활동과 대치하게 되고 현장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승격제도는 보다 직접적으로 조합원들을 통제했다. 삼성정밀화학 생산직의 경우 승격을 위해 필기시험, 면접시험 등으로 이루어진 승격시험을 치르게 되어있었다. 승격시험 결과에 따라 조합원들 간의 임금이 크게는 약 20만 원 정도까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승격시험장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시험 칠 때가 되면 동료들은 적으로 돌변했다. 승격시험을 위해서는 담당과장 눈 밖에 나는 행동은 금기시됐고 그런 상황에서 노조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리 만무했다. 삼성정밀화학은 노조활동을 위축시키던 기존 제도들을 철폐하기 위해 차근차근 투쟁을 준비해나간다.

 

ⓒ 삼성정밀화학노동조합

평소에 조직력을 보여주는 것이 관건

삼성정밀화학노조는 조합원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회사와의 투쟁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2005년 첫 임단투 출정식을 기획했다. 이는 회사에 노동조합의 단결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간 노조활동에 무관심했던 조합원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삼성정밀화학노조의 풍물패, 몸짓패, 노래패 등에 속한 조합원들이 출정식 준비를 위해 쉬는 날에도 자진해서 연습하는 모습에서 이동훈 위원장은 “저런 열의들이 있으니 앞으로 뭔가 달라질 수 있겠구나하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당시 출정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삼성정밀화학노조는 점심시간마다 임원급·인사노무 사무실이 위치한 곳에 터를 잡고 꾸준히 집회를 해나갔다. 회사에서는 업무방해로 고소하겠다는 엄포가 있었지만 노조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과감하게 출정식 준비를 이어나간다.

그렇게 준비된 2005년 임단투 출정식은 출정사 및 결의문 낭독으로 시작해 집회를 진행한 후 각 동아리들의 공연으로 마무리됐다. 삼성정밀화학노조는 이날 출정식을 위해 조합원들을 설득, 약 200여 명의 인원을 동원했다.

하지만 출정식이 끝날 무렵 남아있는 사람들은 1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에 삼성정밀화학노조는 조합원과 가족들이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출정식을 고민하게 됐고, 2007년에는 노래자랑과 공연이 결합된 축제 같은 출정식을 벌이게 된다.

‘어울림한마당’이라 이름을 붙인 2007년 임단투 출정식은 1·2부로 나뉜 가운데 1부에서는 노래자랑을, 2부에서는 출정식을 각각 진행했다. 조합원들과 가족들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이날 출정식은 끝 무렵에 참가인원이 무려 500여 명으로 불어날 만큼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모인 사람들이 풍물패와 함께 어우러져 춤추고 노래하면서 출정식은 하나의 ‘노동축제’로 거듭났다. 이동훈 위원장은 “조합원 가족들이 노동조합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중심에 놓고 고민했다”며 “노조의 살아있는 조직력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고 전했다.

이렇게 결집된 힘을 바탕으로 삼성정밀화학노조는 회사와의 단체협상 끝에 ‘TPM제도 인사고과 반영 폐지’와 함께 승격시험을 폐지시키는 파격적인 협상을 이끌어낸다. 이후 생산직 직원들은 특별한 결격사유를 제외하고 자동 승격이 이루어지게 됐다.

처음 삼성정밀화학노조에서 TPM제도와 승격제도를 개선한다고 나섰을 때 많은 조합원들이 ‘꿈같은 소리’라고 여겼다. 조합원들은 이 제도들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삼성그룹 차원에서 하는 제도들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냐”며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투쟁 끝에 삼상정밀화학노조는 노조의 발목을 잡던 제도들을 하나 둘 폐지시키고, 이와 함께 단일호봉제 적용, 미혼자 주택 융자금 제도, 학자금 자녀수 제한 폐지, 의료비지원 가족으로 확대, 재해보상한도 상향, 하계 휴양지 콘도 구입 등을 신설·보완해 기존에 조합원들이 누리지 못했던 후생복지를 확대시켜나갔다.

삼성정밀화학노조 황봉규 부위원장은 “이전에 당연히 했어야 할 사업들”이라며 “그만큼 조합원들이 당연한 기본 권리들을 누리지 못해온 것”이라고 밝혔다.

이중에서 특히 승격시험 폐지는 조합원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노조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예전에는 조합원들이 노조의 몸짓패나 풍물패 등에 가입하는 것에 대해서도 회사의 눈치를 봤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갓 입사한 신입사원들도 자유롭게 노조 동아리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이동훈 위원장은 “조합원들이 승격제도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노조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만약에 그런 제도들을 개선하지 않았다면 그런 활동을 제안하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삼성정밀화학노동조합

대의원대회도 우리가 하면 다르다

삼성정밀화학노조의 대의원은 총 23명이다. 하지만 삼성정밀화학의 정기대의원대회에는 보통 대의원의 10배 가까이 되는 대규모 인원들이 참가한다.

일반적으로 대의원대회라고 하면 대개 노조간부들과 대의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자체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삼성정밀화학노조의 대의원대회는 평조합원들부터 전임 위원장들을 비롯해 상부단체 및 울산지역 단사노조위원장, 회사 임원 등 매년 약 200여 명이 넘는 인원들이 발걸음을 한다.

대의원대회도 임단투 출정식과 마찬가지로 몸짓패, 노래패, 풍물패의 공연들이 함께 벌어진다. 이는 대의원대회를 대의원들만의 잔치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동훈 위원장은 “기존에 형식적으로 벌어지는 노조행사들을 바꿔보려고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삼성정밀화학노조의 대의원대회는 화학분야 사업장들이 밀집돼 있는 울산지역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하다. 한국노총 울산지역본부 이준희 부의장은 “삼성정밀화학노조의 대의원대회는 마치 대형 집회처럼 거창하게 벌어진다”며 “삼성에서 노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런 면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다”고 전했다.

울산에 위치한 카프로노동조합의 김영수 사무국장은 “삼성정밀화학노조의 대의원대회를 보면 그 조직력을 가늠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이동훈 위원장은 “대의원대회를 대규모로 벌이는 이유는 회사에 우리 노동조합이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며 “쟁의를 통해 노조가 힘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 평소에 미리미리 조직력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삼성정밀화학노조의 임단투 출정식이나 대의원대회의 경우 일반적으로 벌어지는 노조의 행사를 조합원 단합의 통로로 전환했다는 것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최근 노동조합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가 바로 조합원들끼리 소통과 공감을 나눌 수 있는 ‘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삼성정밀화학노조의 이와 같은 노력은 분명 의미하는 바가 크다.

ⓒ 삼성정밀화학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원하는 것은?

삼성정밀화학노조는 2007년부터 노조용 달력을 만들어왔는데 여기에는 각 날짜마다 조합원들의 4조 3교대 근무스케줄이 명시돼 있다. 이 달력은 조합원들의 편의를 생각한 상집간부들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것으로 실제로 조합원들 사이에서 매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또한 달력에는 체육대회가 열리는 달에는 체육대회 사진이, 대의원대회가 열리는 달에는 대의원대회사진이 각각 첨부됨으로서 각 달마다 열리는 노조 행사들을 조합원들에게 미리 상기시켜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는 비록 조그만 아이디어지만 조합원들이 원하는 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삼성정밀화학노조의 기조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무조노 신화 삼성의 틈바구니에서 각고의 투쟁을 통해 어느덧 조합원들의 권리를 바로세우며 ‘기본을 지키는 노조’로 거듭난 삼성정밀화학노조. 이동훈 위원장은 노조의 활발한 활동에 대해 “우리가 하는 것이 FM(Field Manual)일뿐”이라고 말한다.

“저희가 15대 집행부 들어서고 고민한 것은 기존 삼성그룹의 규칙을 삼성정밀화학의 실정에 맞게, 조합원들의 현실에 맞게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희 내부적으로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계속 있어왔습니다. 이전까지는 바꿔야하는 부분을 알고는 있었지만 하지 않았던 것뿐이지요. 변화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면 충분히 바뀔 수 있고 조합원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