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환자 울리는 산재보험제도
산재환자 울리는 산재보험제도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5.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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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주 합의 없는 산재환자, 치료 못해줘!”
거꾸로 가는 산재 행정, 요양절차 간소화한다더니 규제만 늘어

정부가 산재보험제도의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근로복지공단과 노동계, 산재관련 단체 사이의 마찰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6~7월 울산지역의 산업재해 환자 감소를 놓고 근로복지공단 울산지사와 산재관련 단체들이 한바탕 설전을 벌였다.


근로복지공단 울산지사는 2월말까지 3371명이었던 울산지역 산재환자가 3월 초 검찰의 단속 이후 6월말 현재 2880명으로 14.6% (491명)이 줄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검찰 수사 이후 자발적으로 산업현장으로 복귀하는 근로자가 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고 근로복지공단측은 “전국 46개 지사 가운데 처음으로 울산지사에 상근 자문의사 1명을 두는 등 산재요양 승인·연장 심사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산재환자 감소에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산재관련 단체들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울산 지역의 산재환자 급감은 근로복지공단과 검찰의 주장대로 이른바 ‘나이롱환자 색출’ 때문이 아니라 공단이 무리하게 산재 불승인과 치료 강제종결을 추진한 결과라고 반박하고 나선 것.


사단법인 한국산재노동자협회 울산지역본부 김성환 본부장은 “공단이 환자 상태와 주치의 소견을 무시하고 단지 공단 자문의와 담당자 간의 협의를 통해 치료종결을 결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최근 급증하고 울산지역 산재환자의 치료종결수가 700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울산 산재추방연합도 성명서를 내고 “산재환자 급감은 근로복지공단의 불승인 남발과 강제 치료 종결 때문”이라고 반발했다.

 

전국 지사에서 합의 번복 ‘봇물’


산업재해 재조사를 둘러싼 잡음도 끝이 없다. 지난 7월 1일 금속산업연맹 경남본부와 대우조선노조,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간부와 산재노동자 20여 명이 근로복지공단 통영지사 사무실을 방문, 산재 노동자 10명의 불승인과 미결정 등에 대해 항의했다.


당시 근로복지공단 통영지사장은 ‘산재에 대한 조사가 부족하거나 승인이 수개월간 지연되고 있다’는 이들의 주장을 인정, 재조사하겠다는 합의서를 작성했다. 합의서는 ‘근로복지공단의 잘못된 행정 처리로 불이익을 당한 부분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7일 내에 전면 재조사를 시행토록 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통영지사는 5일 만에 태도를 바꾸어 “강압과 감금, 폭력에 의해 강제로 작성된 합의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증명을 보내고 합의서의 원천 무효를 선언했다. 


대우조선노조 김태룡 부위원장은 “합의서 작성 시 경찰관계자가 배석했으므로 강압, 감금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18일 통영지사장과 보상부장이 직위해제된 것은 노동계와 재조사를 합의한 것에 대한 공단 본부의 징계 성격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북부지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지난 5월 서울의 S출판에서 일하다 경추부탈출증 진단을 받은 고모씨가 제기한 산재요양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건강한노동세상’ 김철홍 대표가 유용하 북부지사장과의 면담을 통해 시민사회단체 쪽 전문가가 참여하는 현장조사 재실시를 합의했다. 하지만 지난 8일 진행된 현장조사는 이러한 약속과 상관없이 이뤄졌다. 


산재노동자협의회 김재천 회장은 “최근 공단 통영지사가 산재조사와 업무상재해조사를 다시 실시하겠다는 지역 노동계와의 합의를 공단 본부쪽 압력 때문에 번복하면서 북부지사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규제완화 흐름 역행하는 업무처리 규정


이러한 갈등의 중심에는 지난해 말 근로복지공단이 내부지침으로 만들어 각 지사에 하달한 ‘요양업무처리규정 개정안’의 형평성 논란이 있다. 요양업무처리규정은 산재보상법에 명시되지 않은 세부사항을 규정하고 업무 처리에 통일성을 기하기 위한 것으로 1995년 근로복지공단 설립 이후 10여 차례 크고 작은 개정을 거쳤다.

 

산재관련 단체들과 일부 산업의학 전공의들은 이번 개정안이 예전의 개정과는 달리 심각한 독소조항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 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요양 및 요양연기 결정 기한 연장에 관한 것이다. 기존의 산재보험시행규칙 제 14조에 따르면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요양처리 기한이 7일을 넘길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번 개정안에는 이 ‘특별한 사유’가 좀 더 구체화되어 ▲사업주의 확인 없이 제출한 요양신청서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한 재해의 요양신청서 ▲지사장이 재해내용 및 의학적 소견 등 확인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업무상 질병 ▲집단 요양신청서 등 기타 지사장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등으로 확대되어 있다.


산재 관련 단체들이 가장 크게 지적하고 있는 것은 ‘사업주의 확인 없이 제출한 요양신청서의 경우 7일 이내에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다. 특히 중소영세사업장의 경우 산재환자들이 고의로 사업주의 확인 절차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주가 날인을 거부해서 확인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


지난해 12월 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재해발생에서 요양결정 때까지 소요되는 기간은 재해일~접수일 29.5일, 접수일~요양 결정일 13.6일로 재해발생에서 사업주 날인까지의 기간이 긴 것이 요양결정 지연의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노동계와 산재관련 단체들은 이번 개정안은 노동부가 산재보험제도의 개선방향으로 제시한 ‘요양보상절차 간소화’와도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단 눈치 봐야 하는 주치의 


두 번째 논란은 요양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근로복지공단 자문의의 권한 강화 문제다. 현재 노동자가 산재보험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공단측이 지정한 자문의사협의회의 심의를 반드시 거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주치의와 자문의의 소견이 다른 경우가 심심치 않다.

 

환자들은 ‘환자의 상태는 공단 사무실에 앉아 서류만 검토하는 자문의보다 환자를 직접 치료한 주치의가 가장 잘 안다’고 주장한다. 반면 공단측은 ‘심사에 공정성을 기하고 무리한 치료 연장 등을 규제하기 위해 자문의 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지난 6월 울산의 한 철강업체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친 박모씨는 ‘다음 달 말일까지 물리치료 및 약물치료 등을 실시한 후 호전이 없을 시 수술이 필요하다’는 주치의 소견을 받아 근로복지 공단에 치료 연기신청서을 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 울산지사는 결정통지서를 통해 ‘의학적 소견에 의거 상기간 가료 후 치료 종결함이 타당하다’고 밝히고 치료를 종결했다. 현재 박씨는 자비를 들여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불만을 갖는 것은 환자뿐 아니라 산재지정병원과 주치의들도 마찬가지다.
올해 초 인천의 한 산재지정병원에는 근로복지공단 관할 지사의 공문이 한 장 전달됐다. 내용은 ‘주치의가 작성한 요양신청서가 공단 자문의협의회에서 변경승인되거나 불승인된 건수가 1년에 5회 이상인 경우 6개월간 진료 제한을 하겠다’는 것. 10년 넘게 산재환자만 진료하고 있는 이 병원 의사 K씨는 “기본적으로 주치의의 의학적 전문성을 무시하는 처사일 뿐 아니라 주치의가 공단의 승인여부를 생각해 제한된 진료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이 병원의 원무과장 C씨도 “근로복지공단이 검찰 수사 운운하면서 병원이 ‘가짜 환자’를 양산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진료행위 침해”라고 말했다.


근로복지공단 서울서부지사에서 자문의로 활동하고 있는 원종욱(연세대의대 예방의학교실)교수는 “자문의와 주치의의 의견이 다를 경우 무조건 자문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치료 종결시점에 대한 양자 간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공정성 시비가 일 수 있다”고 말했다. 원 교수는 사견을 전제로 “자문의 제도는 운영하되 산재 승인·불승인, 치료 종결·연장 권한은 독립된 기구에 맡기는 방안을 검토해 볼만 하다”고 제안했다.

 

승인 날 때까지 치료하지 말라니


사전승인 제도도 논란의 대상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산재보험제도는 심사를 해서 승인을 받아야 치료가 시작되는 ‘사전승인제도’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증가하고 있는 산재노동자 자살 중에는 산재 승인을 기다리는 기간 중의 불안함과 무기력함에 의한 우울증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노동건강연대 임준 정책국장은 “자문의사제도, 직업병 인정기준 등으로 불승인 조치를 받은 노동자가 이에 불복해 재심사, 행정심판, 소송까지 2~3년을 끌게 되면 산재보험 혜택을 받아도 이미 산재노동자의 몸은 회복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며 사전승인제도 폐지를 주장했다.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실도 지난 7월 6일 제출한 산재보험법 개정안에서 먼저 산재보험으로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하고 근로복지공단이 사후에 판단이나 조사를 하는 ‘선보장 후평가’ 방안을 내 놓았다.
누적되고 있는 산재보험의 재정적자로 인해 산재보험제도의 개혁 필요성이 제기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러나 규제를 늘려 재정 지출을 억제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한국노동연구원 윤조덕 박사는 “최근 몇 년간의 산재보험 지급액 증가는 2000년에 5인 미만 사업장으로 적용대상이 확대된 데다 사망재해를 포함한 중대 재해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모든 문제를 환자의 도덕적 해이로 돌려 규제만 강화하는 것은 보험제도의 근본 취지에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일부 대기업 산재환자들의 무리한 산재인정 요구와 장기요양 등이 재정적자의 한 원인이라는 주장이 언론의 지면을 장식하면서 산재환자들은 아픈 몸보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더 힘들다고 토로한다.


근본적 원인을 무시한 규제의 남발이 육신의 병에 마음의 병까지 깊어진 대다수 산재환자를 ‘두 번 죽이는’ 처사라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