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변할 뿐
‘참’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변할 뿐
  • 안형진 기자
  • 승인 2010.01.07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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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실패 뒤 만들어진 성공의 비밀
‘설명’이 필요한 디자인은 ‘실패’다
‘호돌이 아빠’ 디자인 파크 김 현 대표
ⓒ 봉재석기자 jsbong@laborplus.co.kr

1982년, 30대 초반의 청년이 동물원을 찾았다. 그는 주위의 어수선한 광경들과 신기한 동물들의 모습을 모두 물리치고 홀로 뚜벅뚜벅 걸었다. 발길을 멈춘 곳은 호랑이 우리.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참을 가만히 호랑이만 쳐다본다.

‘저 녀석은 어떻게 움직이나’, ‘저 녀석은 지금 기쁜 걸까, 아니면 슬픈 걸까’, ‘어떤 모습으로 잠을 자나’, ‘먹이를 먹을 땐 어떻게 할까…’

그렇게 한참 바라보더니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낸다. 가방에는 호랑이의 사진과 그림이 가득 들어 있다. 이번엔 한참을 그림만 그릴 모양새다. 여러 장의 그림을 그려내는 동안 움직이는 것은 눈과 손뿐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우리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한 호랑이의 이름을 접하게 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 ‘호돌이’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 ‘호돌이 아빠’가 바로 디자이너 김 현이다.

호돌이, 빛을 보다

ⓒ 디자인파크

동그란 눈, 친근한 미소에 올림픽의 상징 오륜 메달을 목에 걸고 상모를 머리에 쓴 귀여운 호랑이. 상모가 그리는 궤적은 올림픽 개최지 서울의 ‘S’자를 상징한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호돌이는 당장이라도 그림 속을 뛰쳐나와 친근한 말투로 세계인에게 ‘대한민국’과 ‘서울’에 대해 재잘재잘 이야기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1988년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렸던 국민의 마스코트 ‘호돌이’는 한 청년의 머리와 손끝으로 다듬어지고 그려져 그렇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그리고 그 때의 청년 ‘김 현’은 벌써 이순의 나이가 됐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호돌이’는 그에겐 더욱 각별한 인생의 친구다.

1981년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1988년 올림픽 개최지가 서울로 확정되면서 정부는 서울 올림픽 상징물을 결정하는 전국적인 공모를 실시했다. 까치, 장승, 금관, 진돗개 등 각종 ‘한국’의 대표 심벌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최종 심사까지 살아남은 것은 진돗개와 토끼, 그리고 호랑이였다. 결국 우리 민족의 기상을 표현하는 강직한 이미지의 호랑이가 상징동물로 결정됐고 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는 당시 유명한 대학교수, 만화가, 디자이너 등 일곱 사람에게 3개월간의 시간을 주고 마스코트 디자인을 의뢰했다.

당시 디자이너 김 현은 굴지의 대기업 그룹사 광고 디자이너로 재직 중이었으며, 이미 국내외 70여 개의 디자인 공모전을 휩쓸었던 ‘실력자’였다. 그때부터 그는 호랑이 그림과 사진을 ‘닥치는 대로’ 모으기 시작했다.

요즘같이 인터넷 창에 ‘호랑이’를 검색하면 수많은 호랑이 그림과 사진을 볼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호랑이’가 보이면 무조건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모인 호랑이의 그림과 사진이 500여 점.

그는 그때부터 끊임없이 호랑이를 관찰하고, 호랑이와 교감하며, 호랑이를 그려냈다. 혼자 동물원을 찾아 가만히 호랑이만 바라보는 날도 많았다. 호돌이와 관련된 스케치만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하죠. ‘그냥 쓱쓱 그리면 되지’라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그리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진을 빼는 일이었어요. 낮에는 회사에 나가고, 밤에는 호랑이만 그리는 생활이 계속되다보니 건강이 악화돼 나중엔 병원신세를 졌습니다.”

ⓒ 봉재석기자 jsbong@laborplus.co.kr

 
그는 호돌이 디자인 접수마감 날, 아슬아슬하게 접수를 마치고 나와 ‘하늘이 노래지는’ 경험을 하며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두 달간 병원신세를 졌다. 하지만 그의 고생은 ‘빛’을 보게 됐다.

접수된 일곱 개의 작품 중 그의 작품이 심사위원 14명 중 12명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로 채택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9년 간 다니던 회사를 나와 몇몇 후배들과 함께 ‘디자인 파크’를 설립했다. 디자인 파크의 첫 번째 일은 ‘호돌이’의 응용동작, 즉 올림픽의 각 종목의 경기를 하고 있는 호돌이의 디자인 작업과 각종 인쇄물에 들어갈 여러 자세의 호돌이를 그려내는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디자인’을 통해 ‘김현’과 ‘디자인 파크’라는 이름을 사람들 사이에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실패자는 성공에 대한 ‘감’이 있다

“어릴 때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해서 미술반 활동도 하고 상도 많이 탔습니다. 미술을 배울 수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려고 하니 어려운 집안 사정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아버지의 사업 실패. 그렇게 위기는 찾아왔다. 저렴한 학비에 미술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찾다보니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침 설립된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로 현재 ‘서울산업대’의 전신이다. 당시 경제 성장으로 새로운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던 시기에 국가에서 고등학교 3년과 전문대 2년을 통합해 5년의 교육과정을 통해 필요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만들어낸 학교였다.

ⓒ 봉재석기자 jsbong@laborplus.co.kr

“등록금이 굉장히 저렴했어요. 장학금도 줬고요. 학교 친구들끼리는 ‘거지 집합소’라고 불렀습니다. 공부는 좀 했는데 가정이 어려운 친구들이 거기 다 있었으니까요. 건축, 토목, 기계, 공예과로 전공이 딱 4개였는데 그래도 그림하고 가장 관련이 깊었던 공예과로 입학하게 된 거죠.”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신’이 났다. 어려서부터 가져왔던 그림에 대한 욕구가 단번에 폭발한 것이다. 그 후로 10여 년간 사흘 걸러 하루는 밤을 샜다. 결국엔 불면증을 얻어 심하게 고생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그는 국내외 여러 디자인 공모전에 응시하기 시작했다.

공모전의 벽은 높았다. 계속해서 도전했지만 공모전은 그에게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기를 35차례, 1969년 그는 처음 공모전에 당선됐다. 그 이후로 승승장구였다. 연달아 70여 차례 당선된 것이다.

“비법을 알려달라고 하는데 간단합니다. 35번 떨어져 보면 됩니다. 저절로 알게 됩니다. 떨어졌을 때 당선작하고 비교해보면 왜 떨어졌는지를 온몸으로 느끼게 되지요.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건 실패한 자의 ‘감’입니다. 말이 필요 없이 온몸에 꽉 차요.”

설명해야하는 순간 ‘실패’다

그가 설립한 ‘디자인 파크’는 지금까지 수많은 기업과 공공기관, 정부기관의 BI 와 CI를 디자인 해왔다. 청와대를 비롯해 서울시, 헌법재판소, 국토해양부, 토지주택공사, 교보생명, 티머니 등 국민과 고객에 친근하게 자리하고 있는 수많은 BI, CI 들이 디자인파크를 통해 나왔다.

 

ⓒ 디자인파크

BI, CI는 대중들에게 친근하고 깔끔한 기업이나 단체의 이미지를 형상화할 수 있기 때문에 정성을 들여 제작하는 것 중에 하나다. 특히 브랜드 이미지를 중요시 여기는 요즘, 깔끔한 BI, CI는 필수 요소다. 이 역시 매우 효율적인 대중과의 ‘소통’ 방법인 것이다.

“디자인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려면 반드시 갖춰야 할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설명’이 필요치 않은 디자인을 하는 것입니다. 디자인에 ‘설명’이 필요한 순간 그것은 실패한 것이죠. 한눈에 봤을 때 모든 것이 마음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대중과의 ‘이심전심’을 창출해내는 디자인이야 말로 최고의 디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여 그는 브랜드와 디자인이 오랫동안 대중과 함께 하려면 세상 모든 존재가 동일하게 지닌 보편적인 ‘진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껏 고전이 읽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진실’은 동일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유행을 만들어내고 달리 적용해 해석하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지요. 유행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참된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디자인에 ‘참 진(眞)’을 담아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지요.”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참된 것. 그가 추구하는 디자인의 본질이다. 결국 모든 본질은 서로 통하게 되어 있다. 굳이 디자인이 아니더라도 삼라만상 모든 것이 그가 추구하는 본질과 닿아 있다.

한국의 ‘명품’ 문화상품 만들 것

국내 BI, CI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는 김현이지만 그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자신의 디자인’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40년 동안 클라이언트의 요구대로 작업해왔습니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디자인 노예’ 생활이었지요. 작업일정과 방식, 디자인까지 철저히 클라이언트를 위주로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제 회사(디자인 파크)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있으니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 ⓒ 봉재석기자 jsbong@laborplus.co.kr

일종의 독립선언이다. 이제 그의 나이 60. 그의 앞에서 ‘인생은 60부터’라는 표현이 전혀 무색하지가 않다. 독립 선언 후 그의 첫 작품은 전매특허인 ‘호랑이 캐릭터’를 이용한 공예품들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올라갔지만 문화적 인프라나 철학은 한참 뒤떨어져 있습니다. 한국적인 이미지를 현대화시키고 세계에 알려서 세계 상위 클래스로 높여놓아야 해요. 관광객들이 오면 고국에 가져갈 선물을 구매하는데, 살 게 없어요. 질 좋고 영원히 소장하고 싶은 문화상품을 빨리 개발해야 해요.”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상품’의 개발이다. 그의 나이 이순. 삶의 황혼에 접어든 그가 추구하기에는 커다란 목표지만 그는 의욕에 넘치고 있다. 그 마음은 그의 디자인 전시회 도록에 쓰인 글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10년은 해야 일하는 법을 배우고,
20년은 해야 제 몫을 하기 시작합니다.
30년은 해야 괜찮게 한다 할 수 있고,
40년은 해야 꽤 많이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0년은 해야 자기만의 세계를 열었다고 할 수 있고,
60년은 해야 정말 잘하는 경지에 다다르겠지요.
이제 40년…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제 친구 중 몇몇 사람이 자수성가로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에 반해 저는 겨우 먹고 살 정도죠. 그런데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난 무지하게 하기 싫은 것을 한 대가로 돈을 벌었다. 그런데 네가 돈까지 바라면 도둑놈이다.’ 맞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해외에서도, 국내에서도 제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크게 여기저기 붙어 있고, 번화가 사거리 같은 곳에 서서 한 바퀴 돌아보면 제 손에서 나간 것들이 7~8개는 보이거든요. ‘이거 하나 남기고 가는구나’ 하고 보람도 느낍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죠. ‘나만의 디자인’을 지금부터 정말 ‘즐겁게’ 할 겁니다.”

올해 나이 60. 아직도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열정적이며 항상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 국민 마스코트 ‘호돌이 아빠’ 김 현은 그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