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대화가 정답이다
사회적 대화가 정답이다
  • 승인 2004.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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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력 강화와 일자리 창출’ 위한 사회적 대타협에 나서자


파업 한달을 맞는 7월 22일 경북 구미의 코오롱 공장은 정문은 여전히 박스들로 막혀 있었다. 1400여명의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은 채 뜨거운 태양 아래 모여들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건 고용보장.
회사는 설비 및 공정폐기로 발생하는 여유인력을 4조 3교대제를 통해 흡수하고 추가인원에 대해서는 도급화, 근무조당 적정 인원 조정 등을 통해 확보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노조는 고용보장을 위해 논의되는 교대제 근무제 시행에 다시 도급화와 라인 폐쇄를 들이미는 건 또 다른 이들의 고용을 위태롭게 하는 방침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흔들리는 화섬사업장이 기업 경쟁력과 고용안정이라는 새로운 길을 찾기보다는 노동비용문제로 혼돈의 길을 걷고 있었다.

 

 

잘못 꿰어진 단추, 일자리 창출 협약

올해 초는 경제 양극화와 일자리 없는 성장세 지속, 장기 내수 침체의 영향 등으로 가계대출 악화, 신용불량자 및 실업자 증가 등 경기와 고용구조의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다.


이같은 어려운 시기에 올 2월 노사정위원회에서 노사정 대표가 체결한 ‘일자리 만들기 사회 협약’은 ‘사회통합을 촉진시키고 범국민적 역량을 결집시키는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와 함께 노사정 지도자들이 일자리가 정체된 성장 및 고용구조의 질적 악화와 사회 불평등성 심화라는 사회적 의제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사회적 대화기구의 필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기대감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노사관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협약 이행에 필수적인 구속력이 취약하다는 점이 결정적인 화근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었다. 낮은 조직률과 민주노총의 불참, 한국노총 내부 갈등, 사용자단체의 취약한 리더십 등이 그것. 
현재 조직노동자가 160만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11%에 불과한 데다, 이들 조직노동자 중 300인 이상 사업장이 78%를 차지하고 있다. 중소기업 및 영세중소사업장, 비정규직 등 ‘약한’ 노동자들이 배제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결함을 가진 것이다.


또한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산업규모와 파급력 면에서 파괴력이 있는 대기업 노사의 참여가 중요한데 이들 노조를 포괄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불참은 협약 이행력을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한국노총의 경우 일자리 협약에 강한 의지를 보이며 합의에 도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 후 조직혼란과 리더십 위기 등 내부갈등을 겪은 상태. 한국노총의 한 임원은 당시를 회상하며 “협약 내용의 실행을 위해서는 생산현장의 폭넓은 의견수렴과 지지가 필요한데도 시간에 쫓겨 상층단위만의 결정으로 협약을 체결함으로 인해 대표성과 구속력을 떨어뜨렸다”고 평가했다.
경영계 주체로 나선 경총의 경우도 제한된 회원, 결정사항에 대한 회원단체의 이행력에 문제가 있는 상태였다.


지역의 사정도 마찬가지. 지역 노사정협의회는 전국 239개 자치단체 가운데 36군데(2002년 8월 기준)에 조직되어 있다. 하지만 운영에 필요한 조례가 제정되어 있지 않거나 한번도 회의를 열지 않는 곳도 있어 지역차원의 노사정 사회적 대화기구가 실질적으로 가동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노사정 없는 노사정 대화 채널

민주노총은 이수호 위원장이 지난 1월 선거에서 ‘노사정 교섭틀 쟁취’를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이후 사회적 대화기구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상태다.
이미 세 차례에 걸친 토론회 등을 개최하면서 민주노총 안팎으로 ‘대정부 및 대사용자를 상대로 하는 사회적 교섭구조’와 산별 교섭, 대정부 교섭과 함께 노사정위원회의 개편과 새로운 노사정 교섭구조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 일각에서는 “사회적 대화 기구는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통제기제로, 현 정세에서 노사정위 참여는 민주노조의 정체성을 흔들 수 있다”는 신중론과 함께 조직적 반대 움직임이 일고 있는 등 사회적 대화기구 참여문제를 놓고 조직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노동계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최근 하투의 흐름을 보면 사회적 대화기구를 둘러싼 민주노총 내부 조직 갈등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LG칼텍스정유와 궤도연대 파업에 따른 직권중재 회부 결정, 공공부문 노동운동 활성에 걸맞은 노사관계 시스템의 부재 등으로 인한 노정간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는 점도 노정관계의 불안정성을 더욱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노총은 지난 총선 패배 이후 빚어진 내부 갈등과 조직력을 복원하기 위해 산별연맹 및 시, 도지부 순회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현장중심의 조직운영에 집행력을 모으고 있다. 특히 이용득 위원장은 지난 6월말 취임 직후 노동부와 정책간담회를 갖고 상설 정책간담회 가동과 논의구조 체계화 등 노정대화채널 가동에 관심이 높다.      


이처럼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비관적인 흐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회문화적 환경은 더욱 무르익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에 따른 원내외 정책협의체 가동과 사회적 협의 기능 강화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는가 하면, 비정규직 문제와 주5일제, 산업공동화 등 사회적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한 대화 추진의 필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이와 함께 민주노총이 8월말까지 노사정위 개편을 전제로 사회적 대화를 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노사정 대화기구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력을 얻을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노총은 지난 7월 12일 산업공동화 대책과 투기자본 감시통제를 촉구하며 노정 대책기구 구성을 요구하는 한편, 오는 9월에 재경부, 산자부 등 정부당국과 경총,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사민사회단체, 두 노총이 공동으로 정책토론회를 갖자고 제안했다.  


노사정대표자회의는 8월 6일 민주노총에서 노사정위 성격, 논의의제, 명칭, 참여주체, 업종별협의회 구성 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민주노총 이상학 정책실장은 “8월 노사정 대표자회의에서 진전된 안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라며 “현재 노사정위 개편안에 대해서 (민주노총)내부에서 논의할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밝혀 노정관계 경색과 조직내부 갈등의 심각함을 내비쳤다.  


반면, 한국노총 고위관계자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노사정위 개편 안에 대한 공동요구안을 마련 중에 있으며 실무진 차원에서 심도 깊은 논의를 하고 있다”고 말해 두 노총이 공동보조를 취하기 위한 물밑 조율작업이 한창인 것으로 보인다.        


경총의 한 임원은 “양대 노총이 참여하는 논의는 의제나 내용을 떠나서 제대로 된 노사정 협의체제가 갖춰질 수 있다는 의미”라며 “구체적인 합의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근로자의 삶의 질과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사회적 대화기구 만들자

중앙의 분위기와는 별도로 생산현장에서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새로운 변화의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좋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또는 중소기업과 사내하청, 비정규 노동자들과 성과를 나누기 위해 임금인상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노동자 100명 이상 사업장 중 6월말 현재 임금교섭이 끝난 곳은 1118곳이다. 이중 임금을 삭감 또는 동결한 사업장이 전체의 21.0%인 235곳(삭감 9, 동결 226)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타결상황인 13.7%(삭감 4, 동결 175)와 비교했을 때 7.3%포인트 늘어난 수치이다.


주목할 점은 이번에 동결 또는 삭감한 사업장 중 노조가 있는 사업장(29%)이 없는 사업장(16.1%)보다 많았으며, 임금인상률 하락폭도 노조가 있는 사업장(-1.6%)이 없는 사업장(-1.3%)보다 높게 나왔다는 점이다.


특히 산업발전과 노동의 질 향상, 좋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산업 및 업종차원의 사회적 대화가 시도되는가 하면, 기업 및 작업장 단위에서는 경쟁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혁신 사례가 나오고 있다.


지난 7월초 국내 완성차 노사 3사가 ‘자동차산업 발전을 위한 노사공동협의체’를 구성하고 자동차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고용 안정을 위한 협의와 공동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구미에 있는 한국합섬은 지난해 임금양보와 경영참여에 대한 노사 대타협을 실현한 이후 라인 폐쇄에 따른 여유인력을 중심으로 기존 3조 3교대에서 4조 3교대로 근무제를 변경한 바 있다. 올해 단체교섭에서는 350여명의 비정규직을 직접고용하기로 합의했다.


한국합섬 제2공장 이석하 공장장은 “좋은 일자리 창출이 품질 향상과 업무 몰입도를 높여 기업 경쟁력 향상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관련기사 39면〉
이제 더 이상 경쟁력 강화와 일자리 창출은 서로 대립되거나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산현장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생산현장에서는 노사가 자율적으로 참여기회를 만들고,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최영기 원장은 “개별사업장에서 혁신주도형 선진기업이 많이 나와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대기업 노조운동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산업연구원 박태주 연구위원은 “사회적 대화 결과의 이행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부의 의지와 참여주체의 대표성을 확보해 사회적 권위를 찾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경쟁력 강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노사정 경제주체의 사회적 대타협은 전 국민적인, 시대적 요구가 되고 있다. 생산현장에서 불고 있는 ‘참여와 혁신’의 바람에 노사정 대표자들이 비전을 제시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