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자연과 약속이 잡혀 있어”
“나는 항상 자연과 약속이 잡혀 있어”
  • 권석정 기자
  • 승인 2010.02.05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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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함께 살아온 70년…‘죽을 고비’ 넘기며 천착해온 ‘새’ 연구
새 박물관을 꿈꾸며 지금도 자연과 함께 한다
‘천진난만’ 새 박사 윤무부 교수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어느 주말 오후, 한강 여의도 선착장이 아이들로 붐빈다. 매서운 강바람이 털모자와 목도리 사이의 얼굴을 강타하지만 아이들은 마냥 즐겁다. 아이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새 박사’ 윤무부(69) 교수였다. 새에 관한 한 한국 최고의 열정을 소유하고 있는 윤 교수의 강의를 듣기위해 아이들은 모여들었다. 이어 갈라진 빙판을 헤치고 나아가는 유람선 안에서 윤 교수의 ‘철새 강의’가 시작됐다. 3년 전 뇌경색을 앓은 탓에 아직 불편한 몸이지만 윤 교수는 왼손으로 마이크를 든 채 꼿꼿한 자세로 강의를 이어갔다. 그런데 아이들이 더욱 기다렸던 것은 철새가 아닌 듯하다. 강의가 끝나자 아이들은 윤 교수와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들었고, 손으로 ‘V’자를 그리며 일일이 기념사진을 찍는 그의 모습은 TV 속 예능프로에 나왔던 그 ‘천진난만’한 이미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모두’의 새 박사

며칠 후, 인터뷰를 위해 윤무부 교수의 자택을 찾았다. 가까이서 보니 아직도 오른쪽 팔다리의 움직임이 약간 부자연스럽다. 최근 들어 몸이 많이 회복됐다지만 예전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서 “교수님, 강의하시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윤 교수는 “몸보다 애들하고 사진 찍을 때 웃는 표정 짓느라 입이 더 아파. 몸이 좀 불편해도 사진은 웃으면서 찍어야하지 않겠어?”라고 환하게 웃어 보인다. 어느덧 칠순을 바라보는 윤 교수. 웃을 때는 딱 7살 소년 같다. 나도 모르게 따라서 웃고 있었다.

이 천진난만함은 아이들과의 만남에서도 그랬다. 여의도 선착장 강의에서 윤 교수는 아이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전화해”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보통 윤 교수 같이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은 자신의 핸드폰 번호가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는데 윤 교수는 스스럼없이 아이들에게 이를 알려줘 기자는 매우 놀랐다. 이에 대해 윤 교수는 크게 웃으며 “아이들부터 아이 엄마들, 시골교회 목사님 등 별의별 곳에서 전화가 와”라고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새 박사잖아. 사람들한테 봉사를 해야지. 전에 여수의 한 중학교에 강연을 하러 갔었는데, 거기서 만난 한 학생은 요새도 걸핏하면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어봐. 그 아이도 새 박사 다 됐어. 그렇게 새를 미치게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기분이 참 좋지. 아이들은 그렇게 호기심을 갖는 게 정말 중요해.”

윤 교수는 강의 중에 열심히 질문하는 아이들에게는 자신이 직접 발로 뛰며 구한 자료들을 손수 복사해주기도 한다. 윤 교수도 한 때 ‘열혈 호기심’ 소년이었기에.

장승포의 20세기 소년

윤무부 교수는 국내에서 철새가 많이 지나가기로 유명한 거제도 장승포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가 살던 집 바로 앞 장승포 항은 사시사철 철새들의 서식지였다. 바다에는 갈매기뿐 아니라 비오리, 바다오리들이 가득했고, 산에 가면 멧새, 지빠귀, 휘파람새가 노래를 했다. 호숫가에는 논병아리들이 득실득실했다. 강남 가기 전에 거제도를 들르던 철새들이 윤 교수를 키운 ‘8할’이다.

“나 어렸을 때에는 오리를 잡아다 중국집에 갖다 주면 자장면을 공짜로 먹을 수 있었어. 우리 집에 조그만 배가 있어서, 노를 저어 가면 논병아리, 오리가 천 마리 정도 때를 지어 있었지. 돌 던져서 새를 잡고, 그렇게 난생처음 자장면도 먹어보고. 얼마나 맛있었겠어? 그게 1950년대지.”

윤 교수가 새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갈치잡이 어부였던 아버지의 관심도 컸다. 7남매 중 윤 교수를 가장 아꼈다던 아버지는 새가 울면 “무부야. 그 밑에 찾아봐라. 새알이 있다”고 일러주셨다. 어린 윤 교수는 아버지가 가리킨 들판에서 둥지를 찾으며 놀았다.

어린 시절, 윤 교수의 마음을 사로잡은 새는 ‘후투티(Hoopoe)’였다. 윤 교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동네 뽕나무밭에서 인디언 머리장식 모양의 댕기를 가진 후투티를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

“우리 집 근처 뽕나무 심은 거름 밭에서 그 새를 봤어. 신비롭게 생겼어. 와, 정말 예쁘더라고. 그 새가 꼭 봄·가을에 거제도를 지나갔어. 머리 부분이 인디언 추장 같다고 해서 인디언추장새라고도 부르지.”

그래서 윤 교수는 후투티가 자신을 새 박사로 만들어주고 교수 시켜준 것이 아닌가 싶어 명함에 박사학위를 준 학교마크가 아닌, 후투티 사진을 넣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생명의 고비를 넘긴 연구

윤 교수는 새 사진만 나오면 신난다. <참여와혁신> 2009년 12월호(66호)에는 금강 하구에서 촬영한 철새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를 본 윤 교수의 눈은 그 페이지에서 떠날 줄 몰랐다.

“가창오리고만. 군산이네. 이건 노을을 받고 찍어야 멋있는데 말이야.”

어두운 밤하늘에 빽빽하게 때지어 날아가는 철새무리의 사진 한 컷만 보고도 단박에 새 종류와 지역을 알아맞히는 윤 교수. 그가 그동안 전 세계를 돌며 찍은 새 사진은 무려 60만 장이 넘는다. 그가 새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서울로 상경한 중학교 2학년 때부터다.

“중2때 서울로 유학 왔는데 환경이 거제도랑 너무 다른 거야. 그래서 매일매일 울었어. 고향에 너무 돌아가고 싶어서. 그런 나를 보고 당시 을지로 5가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던 친형이 ‘가지마라. 나랑 같이 있자’고 하시며 조그만 카메라를 사주셨어. 그 때부터 틈만 나면 산에 가서 새 사진을 찍었지. 그때 이후로 다른 일은 도무지 할 시간이 없었어. 언제, 어디를 가면 무슨 새가 날아온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돌아다니기 바빴지. 나는 항상 자연과 약속이 잡혀있던 셈이었어.”

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그의 ‘탐조생활’은 일흔 살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던 그가 새 연구를 잠시 쉬게 된 것은 지난 2006년 12월, 탐조 중 뇌경색으로 쓰러졌을 때였다. 대뇌와 소뇌 사이 혈관이 막혀 사경을 헤매던 윤 교수는 3개월간의 입원치료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퇴원 후에도 신체 오른쪽에 마비 증세가 계속됐고 안면근육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한동안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새를 보기 위해 ‘망원렌즈’를 구입했다.

“망원렌즈를 하나 사고 싶더라고. 그것을 하나 사면 몸이 금방 나을 것 같았어. 내가 아플 때 새로 나온 기종이었는데, 입원 중에 지인이 그걸 병원에 나 보여준다고 가져왔어. 그래서 그 렌즈를 보고 있는데 새 연구가 너무 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퇴원할 때 마누라한테 그 렌즈를 사놓으라고 했지.”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었지만, 그는 퇴원하자마자 베란다에 새로 산 망원렌즈를 결합한 카메라와 쌍안경을 설치하고 매일매일 그것을 들여다봤다.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한 연습이었다.

“퇴원한 당시에는 렌즈를 10분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머리가 아프더라고. 그래서 보다가 머리 아프면 누워있기를 계속 반복했어. 예전에 새 관찰하던 감각을 잊을까봐서 계속 연습을 한 거지. 지금은 예전처럼 하루 종일 렌즈를 들여다보고 있어도 괜찮아.”

그렇게 예전 감각을 되살리기 위한 연습을 반복하는 가운데 서서히 오른쪽 팔다리에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그는 작년부터 자신의 평생연구실인 ‘자연’으로 복귀했다. 이제는 새를 찍을 때 오른손보다는 주로 왼손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만 새 연구에 대한 열정만은 변함이 없다.

사실, 윤 교수가 새를 연구하다가 생명의 고비를 넘긴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경기도 광릉 숲으로 탐조를 나갔다가 폭우를 만나 무려 6시간동안 표류된 적도 있다. 당시 집중호우로 인해 경기지역 저수지 두 곳이 매몰됐고, 8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급류에 휘말려 정신을 잃은 그는 12구의 시체와 함께 당시 교문리 왕숙교에서 발견됐다.

“그 일이 있고 고향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셔서 ‘새 공부 그만하라’고 계속 말리셨어. 위험하니까. 다치기만 하나? 옷 찢어지지, 신발 찢어지지. 옛날에는 그 돈도 만만치 않았어. 하지만 연구를 멈출 수 없었지. 고향에 한 동안 안 내려간 적도 있어. 집안어른들은 무척 속상해 하셨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새를 차마 놓을 수가 없었으니까.”

도대체 새가 뭐가 그리 좋았을까? 괜한 질문을 했다고 느꼈지만 이미 늦었다. 윤 교수의 장황한, 끝이 없는 네버엔딩 스토리가 다시 시작됐다.

“우선 예쁘잖아. 봄 되면 각종 새들이 나무 꼭대기에서 노래해. 숲속에서 휘파람새, 멧새들이 찔레나무 위에서 노래하고. 그 소리가 너무 아름다운거야. 내가 대학교 때 제주도에 섬휘파람새 소리를 수집하러 갔는데….” 이분, 지치지도 않으신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개발에 대한 ‘쓴 소리’

비둘기 찾아 울릉도, 섬개개비 찾아 마라도, 때로는 알바트로스를 보러 남극까지 다녀왔다. 새를 찾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보면 자연이 망가져가는 모습도 최일선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각종 언론을 통해 새 뿐만 아니라 환경파괴에 대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최근 정부의 자연환경 개발 사업에 대해서 자문도 많이 했는데… 나를 싫어하는 정치가들도 많아. 나는 개발에 반대하는 입장이니까.”

윤 교수는 이제까지 정부에서 시화호, 천수만, 새만금, 4대강 사업 등과 같은 개발을 추진할 때마다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생태계의 변화에 대해 꼼꼼히 지적해왔다. ‘권위자’인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각종 언론을 통해 공개됐기 때문에 당시 정책담당자들에게는 적잖은 부담이 됐을 법하다. 때로는 담당기관에 직접 청원서를 써서 보내기도 한다.

“제일 답답한 것은 개발이 너무 성급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야. 외국 같은 경우 개발하기에 앞서 4~5년 동안 타당성 조사를 실시해. 개발이 좋은지 나쁜지 장기간에 걸쳐서 연구를 하는 거지.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가들은 자고 일어나면 말을 바꾸고, 뭐를 개발할 지, 안 할 지를 너무 함부로 결정해. 환경을 개발하는데 ‘사업’에만 신경 쓰고 정작 ‘환경’에 대해서는 생각하질 않아. 이러니 내가 계속해서 연구를 하고, 또 방송과 강의를 통해 꾸준히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한테 안 할 수가 없는 거야.”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사라져가는 것이 있어 멈출 수 없다

윤무부 교수는 현재 국내에서 사라져가는 새들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다. 윤 교수의 작업실에는 새 사진 60만 장을 비롯해 새의 영상이 담긴 테이프, 동영상 파일 등 1300여 개, 새 소리가 녹음된 테이프 300여 개가 책장 가득히 자리하고 있다. 모두 그가 직접 채집한 자료다.

“내가 연구를 시작한 이후로 국내에서 물레새, 할미새, 흰둥새 등 약 50여 종의 새들이 사라졌어. 그런데 정부에서는 이에 대해 대책을 마련하기는커녕 기록을 보존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지. 그러니 내가 직접 하는 수밖에. 지금까지 사라진 종들은 내가 자료로 가지고 있는데, 지금도 매년 계속해서 철새들이 줄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은 앞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야.”

윤 교수의 바람은 작업실에 있는 자료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내가 최종적으로 계획하고 있는 것은 새 박물관이야. 내가 모아놓은 영상, 사진, 소리 등의 자료를 그대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거지. 새알에서부터 새가 태어난 후 철 따라 이동하는 것까지 총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드는 거야. 거기에 새에 대한 이야기들, 가령 참새가 왜 방앗간을 좋아하는지, 철새가 왜 사라지는지 등에 대해 알려주는 거야. 아이들이 그걸 보고 자연에 대한 가치관이 바로 섰으면 좋겠어.”

윤 교수는 자신의 바람(또는 책임)을 이루기 위해 아직 자신의 연구실인 산·들판·바다를 떠날 수 없다. 연천 DMZ를 거쳐 철원을 돌아오는 것은 예사다. 그 전에 중랑천 밑에 와 있는 비오리 소리도 녹음해야 한다. 철새들은 시기를 놓치면 1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에게 새는‘연인’이지만 윤무부도 사람이기에 힘이 든다. 그도 보통사람들처럼 산에 다녀오면 곧바로 침대에서 곯아떨어지기 일쑤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전국 도처에 깔린 학생들로부터 언제 또 질문공세가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