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퇴물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 바로 서고 싶다
노인, 퇴물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 바로 서고 싶다
  • 위성수 기자
  • 승인 2005.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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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는 나이만큼 소외감은 쌓이고…

우리나라는 지난 2000년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가 7% 이상인 고령화 사회를 거쳐, 2018년 14% 이상인 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수준이 빠르게 높아지고 사회복지, 의약 등의 발달로 평균 연령이 늘어나는데다 출산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오는 당연한 결과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 걱정거리다.


우리나라가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사회까지 가는 기간은  불과 18년,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가장 빠른 속도다. 프랑스(115년), 미국(72년), 독일(40년), 영국(47년) 등과는 비교가 안 된다. 세계 최고령국인 이웃나라 일본도 1970년 고령화 사회에 진입 후 고령사회로 넘어가기까지 24년이 걸렸다는 점과 비교해 본다면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사회복지에 대한 준비가 덜 되어 있고 고령자를 중요한 인적자원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고령사회는 많은 사회적 혼란을 안겨 줄 것이라는 전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회 일원으로 살고 싶다…일자리를


벌써 10여 년 넘게 경비로 일하고 있는 최일용 할아버지(68세). 세월의 깊이만큼 주름이 섰지만 밝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생기가 돈다.
최일용 할아버지는 젊음의 비결을 “젊은 사람들하고 자주 만나고 이야기도 하니까 늙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루 12시간 2교대 근무라 육체적으로 힘들 수 있지만 “일이 있어 마누라, 자식들 눈치 안보고 당당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많은 돈은 아니지만 자신이 ‘쓸모 있는 인간’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 즐겁기만 하다.


하지만 높은 실업률이 보여주듯 고령자들도 일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최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5월 말 현재 60세 이상 고령 실업자는 4만1000명.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2만8000명보다 47.3% 가량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60세 이상 취업자도 5월 말 현재 251만8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6% 늘어났다.
고령 취업자가 250만 명을 넘어선 것은 통계청이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63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고령 노동자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탑골공원에서 만난 김모(63세)씨도 벌써 3년째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 국내 대형 건설업체에서 근무하던 중 산재로 퇴직했다는 그는 매일 벼룩시장을 읽어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오전은 구직활동을 하고 혼자 점심을 먹은 후 탑골공원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하루 일과다.


“돈은 생활비 정도만 받을 수 있으면 돼. 일을 해서 사회 일원이 돼야지. 일이 없으니까 잡생각만 나. ‘올 때까지 왔다, 깨끗하게 가자’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집에서는 자식들이 쉬라고 하지만 점점 자신이 가치 없는 사람이 되고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는 것.


“노인들이 이런 취급 받는 건 기업들의 책임이 커. 나이 들면 퇴물 취급하는데 경륜과 젊음이 혼합돼야 기업도 성장할 수 있는 거라고.”
일자리를 찾는 노인들의 발걸음은 오늘도 무겁기만 하다.

 

 

할 수 있는 것도, 할 것도 없다…텃밭이라도


“60~70대 젊은 애들은 경로당에 안 와.”
아파트 보급이 늘어나면서 아파트단지 내 경로당도 그 수가 늘어가고 있다. 100가구 이상의 주택에서는 6평 이상의 경로당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찾아가본 경로당은 ‘지역노인들이 자율적으로 친목도모·취미활동·공동작업장 운영 및 각종 정보교환과 기타 여가활동을 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경로당의 설치 목적이 무색할 정도다.


이곳을 이용하는 노인들의 연령대가 높아지고, 찾는 사람도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6월 말 찾아간 영등포구 내 60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경로당.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3명의 할머니만이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아침에 나와 TV를 보다 점심은 직접 해 먹고 저녁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가는 게 하루 일정의 전부다.


경로당에서 노인들이 접할 수 있는 문화시설은 TV가 전부다. 약장수라도 찾아주는 사람이 고맙다는 노인들은 모두 80세 이상의 고령자들이었다. 60~70대 할머니들은 집에서 손주들을 보거나 집 지키는 소일거리가 있어 집밖에 잘 나오지도 않거나 문화센터 등에서 여가를 보낸다고 한다.


서울 생활이 벌써 18년째라는 한 할머니(87세)는 “이제 집에 쓸모없는 인간이 돼 버렸다”고 한탄했다. 평생 시골에서 땅을 일구다 자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올라온 서울생활, 작은 텃밭이라도 가꿀 수 있다면 ‘행복’을 느낄 수 있으리라.


벌써 백발이 되어버린 며느리에게서 증손주를 ‘뺏어올’ 수도 없는 노릇. 점점 더 말을 안 듣는 육체를 이끌고 다녀야 하는 무게감에, 이제 할 수 있는 것도, 할 것도 없는 무료함이 몸과 마음을 더욱 늙게 만들고 있었다.

 

탑골공원도 돈 있고 건강해야 찾을 수 있어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은 도심속 노인들의 휴식공간이다. 낮 시간 동안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을 잇는 거리는 고령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좌판들이 많이 눈에 띈다. 마른안주와 통조림, 다양한 술 그리고 소소한 물건들. 이 거리에서는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대부분 노인들이다.


물론 밤이 되면 도시는 그 특유의 화려함을 뽐내며 거리의 분위기를 바꿔놓는다. 이 거리는 종로 귀금속 도매 상가들이 즐비한 곳으로 밤거리는 다른 어느 곳보다 더욱 화려한 색채를 드러낸다.


그러나 다시 해가 떠오르면 이 거리의 주류는 여전히 은빛 세대들이다. 사회의 비주류로 밀려난 고령자들의 문화가 주류인 예외적인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외적인 공간은 단지 ‘예외적’일 뿐이다. 이곳을 영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시간’, ‘경제력’, ‘건강’ 등을 대부분 충족시킬 수 있는 노인들뿐이다.


지난 달 노인일자리 전담기관 설치 및 위탁 운영을 골자로 하는 노인복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번 개정안에 따라 국가 및 지자체가 노동능력이 있는 노인들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일자리 개발, 보급 및 교육훈련 등의 사업수행을 위해 노인일자리 전담기관을 설치 또는 위탁해 운영할 수 있게 됐다.


고령자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나누고 노동을 통해 사회 통합력을 높이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며 내일을 준비하는 자세이다.


 

지금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에는 무슨 일이
기쁨과 아픔을 나누는 은빛 세대의 자유공간

 

 “少年(소년)은 易老(이노)하고 學難成(학난성)하니 一寸光陰(일촌광음)이라도 不可輕(불가경)하라”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은빛 세대들의 휴식 공간 종묘공원 안자락, 화선지에 일필휘지하고 쩌렁거리는 목소리로 글을 읽어 내려가는 할아버지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未覺池塘(미각지당) 春草夢(춘초몽)인대 階前梧葉(개전오엽)이 已秋聲(이추성)이라”
“아직 못가의 봄풀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는데 어느덧 세월은 빨리 흘러 섬돌 앞의 오동나무는 벌써 가을 소리를 내느니라”


마지막 구절까지 마친 어르신은 호탕한 웃음 한번 지어보이고 한손에는 막걸리잔을, 다른 손에는 담배를 쥐고 자리에 앉았다. 주변에 모인 어르신들도 다시 한 번 화선지에 적힌 글들을 읽어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볼거리를 찾아 자리를 떴다.


종묘공원은 은빛 세대들이 자신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무거운 몸을 가누는 공간이다. 한 때 은빛 세대들의 해방구였던 탑골공원은 지난해 내부 정비 공사 이후 쉴 수 있는 공간을 없애버려 자연스럽게 종묘공원으로 이동하게 됐다고 한다.


평택, 천안에 지하철이 개통되기 전에도 많은 노인들이 기차를 타고 탑골공원으로 모여들었다. 이제 탑골공원은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노인들의 공간이다. 녹번동에서 왔다는 한 할아버지는 “시끌벅적한 것도 재밌기는 하지만 이렇게 조용히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게 더 편하다”며 “탑골공원이 이제 사적지다운 면모를 갖추게 됐다”고 반겼다.


이에 반해 종묘공원은 항상 시끌벅적하다. 전자오르간에 맞춰 한자락 노래와 막걸리를 들이키는 노인들, 얼큰하게 올라온 술기운에 여러 사람들 앞에서 객기를 부리는 사람, 나무 그늘 아래면 어느 곳이든 돗자리를 깔고 바둑과 장기로 정을 나누는 모습…. 물론 돗자리 위에 깔린 바둑판에 돌을 놓으면 자릿세 1000원이 호주머니에서 나가지만 “기원은 5000원 하는데 싼 거야. 시간 보내고 좋지”라는 여유도 함께하고 있다.


종묘공원은 비슷한 기쁨과 아픔을 간직한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자리다. 수원에서 2시간을 걸려 종묘공원에 왔다는 한 할아버지는 “이곳에 오면 말할 사람도 있고 새로운 친구도 사귈 수 있어 지루하지 않다”고 말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는 ‘자식 자랑’이라고. 이미 장성해 버린 자식들의 무관심에 길을 떠나왔지만 여전히 가장 소중한 삶의 일부분이 자식인 것이다.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특히 정치 이야기가 많다. 정치 이야기는 지역색이 항상 묻어나온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정치 이야기하면 지역색으로 나뉠 수밖에 없어. 그렇게 살아온 걸….”


이렇게 종묘공원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가끔 보기 좋지 않은 모습도 있어 노인문화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종묘공원이 아니면 어느 곳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빨리빨리’와 무관심에 익숙한 서울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은 종묘공원과 탑골공원은 함께하고픈 이들이 모여 나눌 수 있는 소중한 공간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