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큼’은 힘이 세다
‘만큼’은 힘이 세다
  • 박석모 기자
  • 승인 2010.02.0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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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결정 기준이 바뀌고 있다
올해 주간연속2교대제 쟁점 될 듯
Close Up 완성차 임·단협, 무엇을 남겼나? ② 2009 임·단협 남은 과제는?
완성차3사는 각기 과정은 다르지만 결국 2009년 임(단)협에서 기본급을 동결하기로 했다. 어느 곳은 위기상황에서 임금을 양보하는 대신 고용안정을 선택했고, 또 다른 곳은 사상 최대의 실적에도 불구하고 기본급 동결에 합의했다. 각 완성차업체의 2009년 임(단)협은 무엇을 남겼을까?

회사는 기본급 동결 명분 챙기고

완성차3사의 2009년 임(단)협에서 외견상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모두 기본급 동결에 합의했다는 점이다. 2009년 내내 위기라는 말이 떠나지 않았던 GM대우는 물론,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린 현대·기아차에서도 기본급은 동결됐다. 현대차가 노사 교섭을 시작한 이래 기본급 동결은 처음이다. 기아차 역시 현대차그룹 편입 이후 처음으로 기본급이 동결됐다.

2009년 내내 유동성 위기가 심각했던 GM대우의 경우 기본급 동결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렸지만, 경제위기로 인한 전 사회적인 임금 동결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기아차는 2009년에 올린 최대의 실적은 환율효과와 정부정책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초 1,400원 대를 넘나드는 높은 원·달러 환율 때문에 현대·기아차는 경쟁사에 대해 월등한 가격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또 엔고로 인해 일본의 경쟁사에 비해 상대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차량 구매자가 실직하면 차를 되사주는 ‘어슈어런스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등 현대·기아차가 미국시장에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환율효과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내수시장에서 자동차 판매가 늘어난 것도 정부의 정책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정부는 2009년에 위축된 자동차수요를 촉진하기 위해 노후차량을 신차로 교체하는 소비자에게 세금 혜택을 줬다. 이에 따라 노후차량을 신차로 교체하는 소비자는 대당 200만 원 가량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외부요인이 사라지면 현대·기아차 역시 전 세계적인 자동차산업의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회사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산업에서 임금을 동결하거나 삭감하는 것처럼 기본급을 동결함으로써 위기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 금속노조 GM대우자동차지부
노조는 최대 성과급 실리 챙겼다

현대차가 지급하기로 한 성과급 300% + 일시금 500만 원 + 주식 40주를 현금으로 환산할 경우 1인당 지급받는 금액은 1,600만 원에 이른다. 기아차 조합원 역시 성과급과 일시금으로 1,100여만 원을 지급받게 되고, 여기에 신 호봉표를 적용받으면 그 금액만큼의 기본급 인상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됐다.

현대차는 주식을 제외하고도 5천억 원에 이르는 금액을, 기아차는 호봉승급분을 제외하고 3천3백억 원이 넘는 금액을 지급하게 됐다. 회사 입장에서는 사상 최대의 일시금을 지급했지만 기본급을 동결했다는 ‘명분’을 얻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합원의 입장에서는 사상 최대의 일시금이라는 ‘실리’를 챙겼다. 하지만 기본급은 상여금이나 퇴직금 등 모든 임금 항목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기본급이 동결된 것은 향후 각종 수당에 누적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현대차지부는 “이번 임(단)협을 잘 했다고는 보기 어렵다”면서도 “현재 우리가 처한 조건에서는 최선을 다한 결과이고, 조합원들도 찬반투표를 통해 이를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기아차지부 역시 “잘 된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조건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라고 평가하면서 “회사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임했다면 해를 넘기지 않고 타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기아차 관계자는 “누구의 잘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교섭이 장기화 된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면서 “노사 모두 힘든 교섭과정을 겪은 만큼 올해는 상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밝혔다.

한국노동연구원 조성재 연구위원은 현대·기아차의 2009년 임(단)협 결과에 대해 “경제위기로 인해 다른 기업들이 임금을 동결하는 상황에서 기본급을 인상하지는 못하지만, 성과급과 일시금의 형태로 최대의 경영실적에 대한 조합원들의 기대심리에 맞춘 결과”라고 평가했다.

조 연구위원은 이어 “현대·기아차는 노사 모두 이번 결과에 대해 불만이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번 결과에 따라 지불능력이 있는 대기업과 그러지 못한 중소기업 간의 격차 확대가 고착되는 것으로 보인다”며 “함께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남게 됐다”고 지적했다.

한편 사상 최대의 일시금 지급으로 인해 조합원들의 눈높이가 높아진 것이 향후 교섭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하는 이도 있다. 현대차지부에서 고위 간부를 역임했던 그는 “현대차의 경우 2007년 200만 원, 2008년 400만 원, 2009년 500만 원으로 일시금 지급 액수가 늘고 있다”면서 “이대로라면 향후 교섭에서는 더 많은 액수를 제시해야만 타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기아차는 현대차만큼, 현대차는 현중만큼

2009년 교섭에서 여실히 드러난 것 중 하나가 바로 ‘만큼’ 심리다. 기아차 임금교섭이 사상 최초로 해를 넘기면서까지 길어진 데에는 기아차지부 조합원들의 ‘현대차만큼’은 받아야 한다는 심리가 크게 작용했다. 이에 따라 기아차지부 현 집행부는 지난해 선거과정에서, 그리고 교섭에서 ‘현대차와의 차별 철폐’를 주요하게 약속했다.

반면 회사는 “현대차와 규모와 실적에서 차이가 나고, 현대차에서는 쟁의행위가 없었던 반면 기아차는 지난해 7~8월 쟁의행위를 했기 때문에 동일한 수준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에 대해 기아차지부는 “실적은 현대차 대비 55% 수준이지만 1인당 생산성을 놓고 보면 현대차의 95% 수준”이라는 점을 제시하며 “기아차와 현대차를 갈라놓으려는 차별화전략을 깨뜨리겠다”고 반발했다.

지난해 연말 현대차 노사가 임·단협에 잠정합의 했을 때 기아차에서도 극적인 타결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았다. 하지만 기아차 노사의 이 같은 입장 차이로 인해 기아차 임금교섭은 해를 넘기면서까지 계속됐다. 결과적으로 기아차 노사는 올해 3월 말까지 초임, 호간 격차 등 호봉 조정안을 마련해 1월 1일부터 소급적용 하기로 함으로써 현대차와의 차별을 상당 부분 좁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큼’ 심리는 기아차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기아차가 현대차를 바라보는 것처럼 현대차는 현대중공업을 바라본다. 현대차지부 의견그룹들은 “2009년 임·단협 결과 받게 될 성과급과 일시금이 기본급 동결, 무분규, 사상 최대의 실적, 주간연속2교대와 월급제 연기에 대한 보상으로는 부족한 액수”라며 찬반투표 부결운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가결됐던 이유는 “일종의 기준으로 삼아왔던 ‘현대중공업만큼’은 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이들도 있다.

ⓒ 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
기아차, 회사도 불만이다

기아차의 경우 회사 쪽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회사는 “현대차와 기아차가 실적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동일한 성과급을 지급할 수는 없다”고 했지만, 무쟁의에 대한 보상인 주식 40주를 제외하면 기아차도 현대차와 동일한 성과급과 일시금을 지급하게 됐다. 실무자들로서는 그동안의 주장에 대해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또 2009년 임금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기아차의 노무담당 임원이 세 차례나 교체된 것은 기아차가 그만큼 안정돼 있지 못하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차 임·단협이 타결된 후 현대·기아차그룹의 노무 담당 임원이 한 경제지와의 인터뷰에서 “해를 넘기더라도 원칙을 고수할 것”이라고 밝힌 것은 기아차지부를 결정적으로 자극했다. 기아차지부는 해당 임원에게 “뒤에서 간섭하지 말고 직접 교섭에 나서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이 밖에 외부의 시선도 현대·기아차에게는 부담이다. 세제지원으로 최대의 실적을 올렸으면서 내부적으로 성과급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따가운 시선과 함께, 협력업체들은 “현대·기아차가 사상 최대의 일시금을 지급한 데 따른 원가부담은 고스란히 협력업체에 전가된다”고 원망하고 있다.

완성차3사의 2009년 임(단)협은 임금이 기업의 성과와 지불능력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노동계는 표준생계비를 근거로 임금요구안을 제시해 왔지만, 기업의 성과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는 사례가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기업의 성과에 따른 성과급의 지급기준을 설정하는 것도 향후 임금교섭에서 주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올해 임(단)협에서는 현대·기아차의 경우 그동안 미뤘던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이 핵심 이슈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주간연속2교대제 실시에 따른 임금보전과 물량보전 방안을 놓고 노사가 어떤 합의점을 찾아갈지 관심이 쏠린다. 주간연속2교대제와 관련 금속노조가 어떤 역할을 할지도 주목된다.

아울러 GM대우가 지난해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위기’를 올해는 떼어낼 수 있을지, GM대우의 장기적인 청사진을 가시화시킴으로써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재매각설을 털어낼 수 있을지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