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면 꿈은 이뤄진다
준비하면 꿈은 이뤄진다
  • 김관모 기자
  • 승인 2010.02.0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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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에 익숙한 현대인들이여, 떡의 세계로 오라
깨달았으면 실천해야 결과 나온다
떡 체험교육관 ‘담다헌’ 원장 박경애 명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경기도 의정부 산곡동에 위치한 한 교육원. 2시간의 짧지 않은 시간, 지겨움에 몸을 비비 꼬기라도 할 법 하건만 아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렇다고 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두 손에 쌀가루를 묻히거나 플라스틱 모형으로 쌀가루를 눌러가며 열중하고 있다. 큰 덩어리를 잘라 커다란 보라색 하트 모양으로 꾸미고 그 위에 분홍색 곰 모양, 토끼모양을 내고, 노란색 덩어리로 주변을 장식한다. 보라색은 자색고구마, 노란색은 치자, 분홍색은 백년초, 주황은 당근, 연두색은 부추, 검정색은 흑미, 초록색은 뽕잎으로 색깔을 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할머니, 할아버지와 부모님께 드릴 떡케이크를 만드는데 여념이 없다.

배워야 산다

빵 문화에 익숙한 아이들이 난생 처음 떡을 만들었을 때, 아이들 뿐 아니라 선생님과 학부모들은 떡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쉽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이들의 놀라움은 그동안 떡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감동을 나누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떡을 즐겨 찾게 된다면 빵 문화로 점철된 한국음식문화를 바꿔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떡 명장 박경애 원장(52, 여)이 떡 체험교육관 ‘담다헌’을 설립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단지 생계를 위해, 어머니의 일을 물려받아서 떡일을 시작했다 명장의 반열까지 오른 박 원장이 이런 체험교육관까지 만들어 한국음식문화를 뒤바꾸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가 교육원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자신의 경험 때문이다. 박 원장은 친정어머니가 떡방앗간을 운영해서 가끔 일손을 도왔다는 것 이외에는 떡과는 관계가 없었다. 회사에 다니다가 결혼한 이후 평범한 주부로서 살아왔었다. 이런 그녀가 떡하니 떡방앗간을 물려받았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떡 만드는 방법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니 어려움이 많았어요. 어머니도 제대로 된 기술이 있던 것이 아니어서 쌀을 빻는 기계와 보일러만 놓고 가래떡이나 시루, 백설기 등을 만드는 것이 전부였었죠.”

박경애 원장은 이왕 하는 일, 어떻게든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식연구소나 떡 관련 협회, 한식전문점 등을 돌아다니거나, 한식요리책을 뒤져보고 다른 떡방앗간을 기웃거리며 흔히들 말하는 벤치마킹도 시도했다. 하나라도 새로운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배우고 응용해보려고 노력한 것이다. 하지만 한식이나 외식, 제과와 관련한 요리학원이나 요리책들은 있었지만 떡만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곳은 거의 전무했다. 80~90년대 떡은 한식의 곁다리거나 제사나 잔치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그럼 이쯤에서 동네 떡집처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천만에 말씀. 알고자하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에 이런 고난쯤은 박경애 원장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통음식이라는 떡이 제대로 전승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떡을 기술적, 현실적으로 대중화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학원 같은 교육기관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2007년, 경기도에서 열린 ‘제1회 전국 떡 명장대회’는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줬다. 주변의 권유로 참가한 박 원장은 그곳에서 떡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깨달았다.

“처음 쌀만 주고 알아서 하라고 하는데 채나 뜰 같은 것들만 가져갔던 상황이라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래도 건강식품이나 차별성 있는 떡을 만들기 위해 고추장떡이나 매실떡 같은 것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주위를 보니 이미 집에서 만들어 와서 데코레이션까지 꾸며놨더라고요. 만드는 데만 신경 쓰느라 그릇이나 상 같은 것들은 전혀 생각을 못했는데 이런 소소한 부분들도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 배우게 된 거죠.”

이후 그는 교육원의 필요성을 더욱 간절히 느끼고 각종 한식자격증 공부에도 전념하기 시작했다. 한식이나 제병관리사 자격증은 물론 한국떡류식품가공협회에서 개최하는 강의도 있으면 시간 나는 대로 듣고 온갖 자격증을 취득했다.

발전과 교류 없이 미래도 없다

박경애 원장은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직업을 천직처럼 대를 물리는 일본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협회 강의 중에는 일본 연수를 통해 화과자 공장이나 가게를 돌아볼 기회도 있었다. 이를 적극 활용한 박 원장은 연수 과정에서 현재 우리나라 떡 산업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일본 화과자나 떡은 한국 떡과 달리 너무 달고 씹는 맛이 없어요. 그래서 한국인 입맛에 맞지 않죠. 그래도 한국인들이 일본 화과자를 많이 사가는 이유는 포장과 기교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에서 떡방앗간은 지하상가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떡을 팔아요. 그런데 제과점은 대기업 체인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해 대로변에 가게를 얻고 인테리어나 포장도 잘 해놨잖아요. 떡집들도 이렇게 개선을 해야 더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무엇보다 이런 연수를 통해 같은 사업을 하는 사람들끼리 만나고 의견과 정보를 나눌 기회가 많아졌다는 점은 무엇보다 큰 행운이었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과 협회나 연구소에서 배우는 것으로 떡일을 이어가기 힘들다는 데 서로 공감하고 대안을 찾기 위해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도 됐다.

“떡방앗간을 운영하면서 여러 떡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싶었는데 어디 하나 제대로 떡을 가르치는 데가 없었어요. 혼자 배우고 일하느라 허리가 망가져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였죠. 그래서 어머니처럼 환갑이 넘어가면 제대로 떡을 가르치는 기술을 남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떡 관련 교육원이 생기면 보다 많은 떡방앗간들이 떡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고 발전도 가능하리라고 본 것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현재 떡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좀 더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박경애 원장은 강조했다. 지금 당장의 파이를 지키려는 것보다 더 키우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라이벌 가게가 생기고 떡 판매가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해요. 하지만 더 넓게 보자는 것이죠. 사람들이 떡을 좋아하게 되고, 떡집이 동네 곳곳마다 생기면 사람들이 떡 먹는 습관을 지니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떡을 찾게 될 것이고, 단골도 많이 생길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한 우물 파니까 조상이 돕더라

하지만 떡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기계가 모든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하루 종일 떡을 빻고 떡고물을 장만하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다. 떡이 많이 나갈 때는 하루 오전에 5말 정도의 쌀을 준비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일이 고되다보니 방앗간을 쉽사리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박경애 명장도 과로와 스트레스로 결국 2005년에 허리를 다쳐 장애 6급 판정을 받았다. 게다가 같은 해 여름 방앗간에 불이 나면서 살림살이마저 모두 재가 되고 말았다. 이 당시를 박경애 명장은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지만 이야기를 통해 그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힘든 시기였는지 가늠하게 했다.

그래도 박 원장은 힘든 시기를 딛고 일어섰다. 불이 났던 때가 방앗간의 최대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추석을 앞둔 시기였기 때문에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서둘러서 가게를 재개약 했다. 그런 뒤 허리 수술하고 의사가 몸을 움직여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떡일을 다시 시작했다. 박 원장은 “원래 기계를 다시 맞추면 길이 들기 전까지 쌀이 잘 빻아지지 않아요. 그런데도 호사다마라고 이상하게 떡이 잘 돼서 나중에는 줄을 서서 떡을 사가는 유명한 방앗간이 됐어요”라며 당시 극적인 상황을 회상했다.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30년 만에 다시 대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혀니 글씨 하나 제대로 쓰기 힘들고 영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협회에서 하는 강의도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지만 정작 현실에서 써보기에는 어려운 점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모르는 일이 있으면 밤을 새우며 방법을 고민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망설이지 않고 바로 협회나 한식 관련 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지자체나 도청까지 찾아가 지원을 구하기도 했다. 거절당하거나 무시당할 때도 부지기수였지만 그래도 박 원장은 고민하고 발로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덕분에 여러 행사나 교육, 관련 법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고, 그에 대한 지식들은 바로 행동에 옮기면서 체득해갔다.

“준비한 자에게 꿈은 이뤄진다”

이런 노력이 더해진 까닭일까. 부상(副賞)으로 주는 일본 연수를 얻기 위해 다시 도전했던 작년 ‘전국 떡 명장 대회’에서 박경애 원장은 대상을 수상하고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와 함께 교육원을 위해 마련했던 산곡동 부지도 작년 초 개발제한구역에서 일부 해제되면서 교육원을 지을 수 있는 여건도 조성됐다.

“떡 명장이 될 줄 꿈에도 몰랐어요. 처음에 발표 듣고 시상 받을 때까지 그저 놀랍기만 했죠. 나중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그동안 시집살이하랴, 떡일 하랴, 그러다가 허리까지 부러졌잖아요. 그런데도 한 우물만 파니까 조상이 돕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는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고민하다보니 꿈을 이루게 된 것 같아요.”

이후 박 원장은 바로 교육원 설립에 착수해 작년 10월 개관을 하고 교육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떡일을 시작하고 약 30년 간 기다린 숙원 사업이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처음에는 대학교에서 다시 공부 시작하려니 집중도 안 되고 글도 안 써졌는데 이제는 사업계획서도 직접 작성하고 파워포인트도 다룰 줄 알게 된 거죠. ‘담다헌’을 하게 된 이후 후배들에게 늘 이야기해요.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고. 대신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는 자에게 이뤄진다는 걸요.”

이제 박경애 원장은 교육원 사업에 집중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떡문화를 알리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아직 3개월밖에 되지 않아 빚도 지고 인지도도 높지 않지만 당분간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그것은 반드시 교육원을 만들어서 떡에 대해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고.

게다가 이제 박 원장도 교육이 가지는 엄청난 스펙트럼과 깊이에 대해 다시금 느끼고 있다.
“한번은 시각장애인 단체에서 떡을 배우러 오겠다는 거예요. 이런 장애인들이 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손의 감각만으로 예쁜 떡을 만들어내는 것에 놀랐어요. 그 분들도 자기들이 평생 떡을 만들 줄 꿈에도 몰랐다는 거예요. 제가 생각도 못했던 사람들도 배워서 감동을 얻어간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거죠. 힘들기는 해도 이 일을 하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