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전문직’, 과연 옳을까?
묻지마 ‘전문직’, 과연 옳을까?
  • 조진표
  • 승인 2010.02.0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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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시장ㆍ과잉공급에 문 닫는 ‘士’자들
자녀 적성과 일의 가치에 신경 써야
교육컨설팅 관련 강연과 방송
진행일간지 교육칼럼 기고

최고의 전문직으로 통하는 의료, 법조 직종으로 가기 위한 관문인 의·치대, 한의대, 법대 등의 단과대학들은 오랫동안 대학 진학 1순위 코스의 지위를 누렸다. 이들 대학들을 향한 러시는 경제 불황 국면에서도 뜨겁다. 입시기관들이 해마다 내놓는 지망대학 배치표상에서도 여전히 최상단을 차지한다. 의·치대와 법대는 전문대학원 체제로 전환된 뒤 등록금이 한 학기에 최고 1,000만원 가까이 책정됐지만 지망자가 넘친다.

이 같은 인기는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직업 안정성 면에서 탄탄하고, 고소득을 올리며, 이에 더해 사회적 명예까지 얻는다는 점에서 최고의 전문직으로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기성세대가 경험칙으로 깨친 이 같은 ‘공식’이 향후 10년 후, 20년 후에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혹시 전문직에 대한 믿음에도 거품이 끼어있지는 않았을까? 자녀의 진로지도를 고민하고 있다면 한번쯤 던져봐야 할 질문이다.


정년 없는 의사? 이제는 의사도 월급 받는다

상위권 이과계열 자녀를 둔 많은 학부모들이 최종 대학 지망을 목전에 두고 가장 고민하는 주제 중의 하나가 지방 의대에 보낼까 혹은 이른바 ‘명문대’ 공대에 보낼까 하는 것이다. 설사 명문대 공대에 진학한다 해도 고민은 끝나지 않는다. 공대를 중도에 포기하고, 의대로 방향을 틀거나,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 도입 이후 학부 졸업 뒤 의전원에 도전하는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공계 학생들의 의사직 선호 러시가 직업관에 대한 착시나 환상에 바탕을 두지는 않았는지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하다. 한번 개업하면 평생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정년 없는 의사’라는 성역이 깨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펴낸 ‘2006년 일차 의료기관 경영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개원의들은 현재 의원 운영실태에 대해 80%가 ‘부정적’이라고 응답했고, 97.3%의 응답자는 “현재의 경영난이 앞으로도 계속되거나 현재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답했다.

이처럼 개원의들이 갖는 집단적 불안감과 위기의식의 배경은 무엇일까?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보면, 2007년 전체 의원급 의료기관 폐업률은 7.7%에 달한다. 한 번 의원을 열면 평생을 일한다는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는 셈이다.

반면 개원 통계를 보면, 과거 화려했던 개원의에 대한 인식도 깨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원하는 전문의의 수입이 줄면서 개원의 수도 자연히 줄고 있는 반면 월급을 받는 페이닥터(pay doctor)는 늘고 있다. 과거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개원을 하던 것이 의사들의 꿈이었던데 반해, 이젠 병원에서 월급을 받는 의사가 되는 쪽으로 선호가 바뀌고 있는 셈이다.

이제 ‘士’자들도 고용한파

그렇다면 변호사 업계는 어떨까? 이 분야의 전망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휴업하는 변호사가 속출하는가 하면 변호사업계에서 인지도가 낮았던 ‘국선전담 변호사’의 경쟁률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월급 변호사를 하겠다며 로펌으로 향하는 변호사가 늘고 있고, 법무법인의 변호사 모집 공고가 뜨면 수백 명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그래도 변호사인데”라는 말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

대한변협 등 관련단체에 따르면 지난해 휴업을 신청한 변호사는 218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4년 전인 2004년(126명)의 2배 가까운 수준으로 매월 20여 명의 변호사가 명패를 내렸다는 얘기다.

변호사 사회에도 ‘적자생존’의 정글법칙이 위력을 더해갈 것이란 전망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변호사들의 ‘엄살’이라고 하기엔 경쟁의 폭과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게 중언이다. 변호사 수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지만 사회 전반의 불황과 제한된 시장규모는 너나 할 것 없이 변호사들의 호주머니를 가볍게 만들고 있다.

실제 서울변호사회는 최근 ‘2008년 회원 실태 설문조사’의 결과를 발표했는데 응답한 변호사 375명 중 109명(29%)이 사무실 운영비를 제외한 연간 실소득이 3,000만 원 미만이라고 답했다. 대기업 신입사원 평균 초임인 3,100여만 원을 밑도는 액수다. 응답자의 68%(201명)는 지난 한 해 동안 수임한 사건이 30건을 넘지 못했다고 밝혔다. 같은 설문조사에서 향후 사업 전망이 좋아질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응답자의 76%는 ‘나빠질 것’이라고 응답했고, ‘좋아질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9%에 불과했다.

한때 인기 상종가를 누렸던 한의사의 미래는 더욱 불투명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00년 폐업 한의원 수는 364개, 2002년에 503개, 2004년 589개, 2006년 734개 그리고 2008년에 853개에 이른다. 9년의 통계치는 매년 폐업 업체수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동네 의원뿐 아니라 대형 한방병원들조차 고전하긴 마찬가지다.

한의학계 스스로도 이 같은 위기를 인정하고 있다. 대한한의사협회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 10명 중 8명이 한의원 경영이 어렵다고 답했다고 한다. 한방시장의 전망에 대해 다룬 한 논문을 보면, 변화는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2010년 최대 4,077명, 2020년에는 최대 3,650명의 한의사가 과잉 공급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다. 한때 최고 웰빙 직업으로 선정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한의사 직종에 이제는 실업의 찬바람이 불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부모의 환상이 자녀 진로 옥죈다

자녀의 진로지도를 고민할 때, 직업적 안정성이나 소득기준을 따지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과거 부모세대가 가졌던 환상에 기대어 직업을 잘못 파악하고, 잘못된 정보와 전망을 바탕으로 자녀의 진로와 포부를 옥죄는 것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아울러, 직업이 경제적 독립의 실현 수단일 뿐 아니라, 자아실현의 조건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상기해야 한다. 직업 선택에 있어 경제적 잣대만큼 자녀의 적성, 그리고 ‘가치’의 문제에 대해 더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은 그 어떤 직업군보다 자신의 전문성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 가치적 차원에 좀 더 주목하면 개인적 행복과 명예로운 사회 복무를 하기에 더 없이 좋은 직업이라는 뜻이다. 우리 주변에도 의료봉사와 무료 법률상담 등을 통해 명예와 개인적 보람을 찾는 수많은 전문직 종사자들을 찾아볼 수 있다. 자녀가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하고, 그 행복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심장을 갖도록 한다면, 자녀에게 있어 생애 더 없는 선물을 주는 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