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만 생각하면 내 것이 안 보이는 법
내 것만 생각하면 내 것이 안 보이는 법
  • 김관모 기자
  • 승인 2010.04.0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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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것만 최고라는 아집 버려라”
우리 전통 익혀서 세계에 알린다
궁장(弓匠) 권무석 선생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마흔이란 나이에 자신의 길을 찾아 평생을 달려왔다. 되돌아보면 무형문화재라는 명예도 얻었고, 사관학교나 학원에서 선생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목마름을 느낀다는 일흔 한 살의 권무석 궁장(弓匠). 잠시 한 눈 팔던 10년을 제외하면 평생을 궁(弓)에 매달려왔건만 권무석 궁장은 여전히 궁을 공부하고 발전시켜나가기 위한 노력에 여념이 없다. 내 일에 미치고 지킬 것을 지켜야 한다는 사랑과, 내 것이 최고라는 아집에 빠지지 않는 중도. 이것이 권무석 궁장이 국궁(國弓)을 다루는 마음가짐이다.

현실을 버리고 가업을 선택하다

“처음에 궁 만드는 일을 이어받는다고 했더니 온 가족이 다 반대했었어. 활 가격이 얼마나 한다고 그걸 하느냐고, 미쳤다고. 지금도 누님께서 활 만들어서 뭐 먹고 사냐면서 쌀 한 가마씩 보내주시고 그래. 하하.”

권무석 궁장의 집안은 조선 숙종 때부터 경상북도 예천에서 12대에 걸쳐 활을 만들어오던 안동 권씨 가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 궁장이 가문의 일을 이어받는 것에 온 가족이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왜 그랬을까. 

1960년대까지 궁을 만드는 일은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업으로 여겨지면서 궁을 만드는 사람을 장인이라고 칭했다. 조선시대에는 무기제작으로서 그 제조 기술이 국가 1급 비밀에 해당했기 때문에 궁장이란 직업 자체가 매우 귀했고 사회적으로 대우받던 시기였다. 또한 대대로 활쏘기란 양반이나 부유한 계층들이 누리던 놀이기도 했기 때문에 활은 상당히 비싼 가격에 팔려나갔다. 1960년대만 해도 활 하나가 쌀 세 가마 값에 해당했으니 ‘활을 팔아서 아들 대학 보낸다’라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던 셈이다. 그래서 권무석 궁장도 어렸을 때는 형제들과 함께 궁 만드는 법을 배우며 궁에 대한 기초를 다졌다.

하지만 권무석 궁장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이후인 1970년대에는 국궁을 만드는 일로 더 이상 생활을 유지하기조차 힘들게 됐다. 산업화시대를 맞아 우리나라 문화가 급격히 서구화되는 과정에서 국궁을 배우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궁의 값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쌀 세 가마에 묶여 있던 활 값은 아들 대학 보낼 정도의 가치가 아니라 정말 딱 밥 벌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떨어지고 만 것이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 수송부에 있으면서 당시 대통령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은 경험을 했던 그로서는 활 만드는 일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었으리라. 결국 공무원으로 일하거나 버스기사를 하면서 권 궁장은 10년 동안 사회에서 돈 버는 일에 전념했다. ‘궁 만드는 대가 끊기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정말 그는 궁장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집에서 어른들이 궁 만드는 일은 이제 내 대에서 끝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아쉬운 생각이 들어 이쪽 일에 마음이 쏠리는 거야. 집안에서 반대하니까 더욱 고집으로 이 일을 하고야 말았지.”

‘현실’보다 자기 가업이었던 전통 활 만들기를 자신의 운명으로 선택한 셈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국궁을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장인들은 권 궁장까지 총 8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권 궁장의 경우야 서울무형문화재에 선정됐고 경찰대학과 육군사관학교에서 국궁을 가르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수입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그것도 최소 생활비 정도라고 한다. 그 외의 장인들이나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생계란 큰 걸림돌이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국궁 만드는 법을 배워보고자 그를 찾았지만 1년 이상을 버티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일은 어렵고 먹고 살 형편이 되지 않다보니 일을 이어나가기 힘들었던 것이다. 자기 일을 찾는 것은 그만큼 힘들고 굳은 신념을 필요로 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내 것이 소중하다면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다시 일을 시작했다고 하지만 10년 이상 손 놓고 있었던 활 만들기를 다시 배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국궁 중에 각궁 하나 만드는 것도 절차가 복잡하고 들어가는 재료도 많다. 물소 뿔과 소 힘줄, 뽕나무, 대나무 등 7가지 재료를 붙여서 탄력성과 견고성을 높이고 모양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1000번이 넘는 손길과 3개월이란 시간이 필요하다. 각고의 노력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형님이 ‘활 만드는데 혼을 넣으라’고 늘 당부하셨지. 그분이 50년 넘게 활을 만들어 오셨었는데 그동안 자신이 만들어 온 활 중에 잘 만들었다고 생각할 만한 활이 없다고 하셨어.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활 만드는 데만 집중하라는 말이었지 싶어.”

그렇다면 오로지 활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권 궁장은 자기 일에 미치고 그 일을 제대로 알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 궁장은 활 뿐만 아니라 역사나 다른 스포츠에 대해서도 박학다식했다. 그는 어디를 다니든지 신문이나 책을 본다고 말했다. 국궁의 장점을 알기 위해서는 배경지식이 넓어야 깊이 있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사용하던 해전용 천자포가 발견됐을 때 당시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던 권 궁장은 천자포 시연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는 조선의 포는 위력도 약하고 명중률이 낮으며 재료를 구하기도 힘들어 적의 사기를 낮추는데만 사용됐다는 입장이었고, 역사학자들은 일본 배를 침몰시킬 수 있었던 것이 이런 조선의 포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권 궁장은 당시 포의 위력과 활의 위력을 비교하는 것은 물론, 난중일기를 인용하거나 조선 역사를 설명해 가면서 반박을 해 학자들을 꼼짝 못하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조선 활에 대해 공부해 본 적이 없던 학자들로선 자기 지식만 내세우다가 도리어 자신의 조야함만 드러낸 꼴이다. 또한 권 궁장은 미국이나 중국 등을 돌아다니며 국궁이 갖고있는 우월한 신체적 효과를 다른 스포츠와의 비교를 통해 설명해 외국인들이 국궁에 관심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내 것을 제대로 알려면 다른 것을 제대로 알아야 돼. 내 활만 무조건 뛰어나다고 하면 그것은 아집이고 아마도 알아주지 않아. 다른 스포츠의 특성과 비교해서 이것은 이런 점에서 좋지만 우리 활은 이런 점에서 더 좋다는 식으로 알려주어야 활이 뛰어나다는 것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것이거든.”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기본을 지키는 것이 세계화

점차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던 국궁은 최근 사극 열풍이 불고 각종 미디어에도 널리 알려지면서 점차 대중화되어가고 있다. 국궁을 배우겠다는 일반인들도 많아졌다. 현재 전국에만 이미 350여 곳의 국궁장이 있으며, 국궁을 배우기 위해 오는 한국을 찾는 외국인도 늘고 있다. 그런데 권 궁장은 현재 국궁장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희망과 우려를 함께 지니고 있다.

희망이라고 하면 국궁을 외국에 확산시키겠다는 계획이다. 그는 국궁이야말로 다른 운동보다 건강유지 효과가 탁월한 건강 스포츠라고 말했다. 특히 몸에 큰 무리를 주지 않는 활쏘기는 실버스포츠로서 각광받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미 그에게 궁을 배우고 있는 사람들 중에 90세가 넘은 노인들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만들어 외국에 보급한다면 국궁을 세계에 널리 알릴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태권도장이 이미 미국에 5,000여 개가 있어서 이를 통해 우리나라 문화를 알리고 5,000명 이상의 한국교민들이 먹고 살아가듯, 국궁장을 제 2의 태권도장으로 만들어내겠다는 생각이다. 이미 권 궁장은 미국과 유럽에 국궁장을 만들기 위해 관계자들과 논의를 하고 있다. 또한 중국 연변학교에 있는 사격장 시설을 빌려 국궁장을 만들 수 있도록 협의를 끝내고 한국 문화체육부가 허가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업을 벌이기 전에 우려되는 점도 있다고 한다. 먼저 국궁을 배우는 규칙과 예를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권 궁장에 따르면 현재 국궁을 배우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복장이나 예법을 모두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국궁을 전파하기 어렵다고 한다.

“한 번 일을 하려면 그 뿌리까지 제대로 파서 해야 돼. 우리 것을 하려면 옛것을 제대로 알아서 그 모습 그대로 살려야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거야. 그런데 지금 활 쏘는 사람들은 회장이네 이사네 하면서 감투 쓰고 잘난 척 하고 다니지. 예가 바로 갖춰지고 남을 위해 봉사할 때 다른 사람이 시켜서 회장도 하는 것이지 지금 하는 것은 패거리 문화가 되어서 문제야.”

권 궁장은 국궁에서 사라져가는 기본을 찾기 위해 역사책은 물론 직접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우리나라 고유의 예절을 배우고 들어서 자신만의 교범을 만들었다. 이 교범을 통해 경찰대학과 육군사관학교에서 국궁을 가르칠 때 생도들에게 제일 먼저 기본과 예절을 강조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갓난아이들에게 하는 교육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기본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 중 이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100일도 지나지 않은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도리도리 하는 것이 실은 다 조기교육이었던 거야. 도리도리(道理道理)는 도리대로 살라는 것이고, 짝짝궁(綽綽躬)은 너그럽게 살아라, 곤지곤지(崑地崑地)는 힘들면 헤쳐 나가라는 것이지. 이런 것들을 후손들에게 알려주고 계승시켜야 우리 역사와 문화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거야.” 

국궁에 대한 관심은 점차 늘고 있지만 궁제작을 전수할 인재나 수제자는 그리 많지 않다. 다행스러운 일은 한때 음악대학을 나와 랩이나 힙합을 작곡하던 아들이 군대를 다녀온 후 점차 국궁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이제는 ‘조금씩 궁에 미쳐가고 있다’고 한다.

아직도 여전히 궁 만드는 일은 권 궁장의 말마따나 ‘죽 써먹을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권 궁장은 “지금은 힘들어도 자기 일에 미쳐서 한다면 반드시 국궁으로 빛을 보는 때가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

국궁(國弓) 한번 배워보실래요?
권무석 궁장은 우리나라 궁만큼 탁월하고 뛰어난 궁이 없다고 말한다. 특히 국궁 중에 소나 양의 뿔로 만드는 각궁의 경우 사거리가 140m에서 멀리는 300m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의 기술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그런 활 만드는 기술을 끝내 만들지 못해 중국사신이 조선에 올 때마다 조선 궁을 주문했다고 한다.

지금도 국궁을 쏘는 활터는 사거리가 145m에 이른다. 일반 양궁은 표적이 가장 먼 곳이 90m 정도다.

하지만 국궁이 다른 나라의 궁과 다른 것은 그 쏘는 방법에 있다. 다른 궁을 쏠 때는 양궁처럼 몸을 완전히 옆으로 젖힌 상태에서 쏘지만 국궁은 몸을 과녁과 마주보게 하고 뱃속의 장기를 가슴으로 끌어당긴 채 온몸으로 시위를 당겨 활을 쏜다.

이는 다른 활을 쏠 때보다 전신의 근육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종합헬스를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고 한다. 또한 시위의 떨림이 온몸에 전해지면서 혈액순환을 도우며, 과녁에 정신을 모으기 때문에 집중력도 향상된다.

국궁은 남녀노소가 무리 없이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몸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위장병이나 디스크 같은 병을 치료하는 데도 효과가 크다고 한다. 최근에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동호회 등을 만들어 심신 단련을 위해 국궁장을 찾고 있다.

게다가 예전에는 국궁장을 찾기 어려웠지만 전국에서 국궁장을 가르치는 곳이 늘면서 5~10만 원 대에서 국궁을 배울 수 있다. 아이들에게도 우리나라 전통을 가르치고 집중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여서 가족들도 함께 참여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