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현장을 가다 2 _ 업종
혁신의 현장을 가다 2 _ 업종
  • 승인 2004.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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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자동차산업 노사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87년 이후 해마다 중심적 행동양식으로 자리잡아온 힘에 기반한 대립적 노사관계가 아닌 정책중심의 새로운 시도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들이 감지된다. (중략)특히 자동차산업발전을 위한 노사협의체 논의와 구성을 둘러싼 노력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참여와 혁신> 7월호 “자동차업종 노사협의기구 7월초에 만든다” 中

 

지난 7월 2일 현대, 기아, 쌍용 등 완성차 3사 노조와 한국자동차공업협회가 ‘국내 자동차산업 발전을 위한 협약서’를 채택했다. 그간 철강업과 화학섬유업을 중심으로 산업의제에 대한 사회적 대화 시도가 있기는 했지만 노사가 모두 참여하는 상설기구의 설치는 처음 있는 일이다.

이 협약서는 노사공동의 협의체 구성을 통해 ▲자동차산업 발전을 위한 대정부사업 ▲친환경자동차사업 지원 ▲산업공동화 방지 및 고용안정 등을 함께 논의해 나가기로 했다.

 

기대와 우려의 교차
업계의 반응은 기대와 우려의 중간이다. 경영자총협회의 한 임원은 “반목과 대립에 치중하던 노사가 공존과 협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상생과 경제발전을 향한 주춧돌일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공동기구를 통한 논의 과정에서 임금, 근로조건 등 교섭 수준의 요구가 등장할 경우 갈등이 오히려 증폭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화섬협회의 한 관계자는 “구조조정이 한창인 화섬업종에서도 노사가 산업문제를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도 “회원사의 업종이 워낙 다양해 현실적 논의가 어려운 실정”이라며 아쉬워했다.


현장 노사의 반응도 엇갈린다. 현대자동차 노사관계 임원은 큰 부담을 덜었다고 평가한다. 이 임원은 “사실 그동안 대정부 요구, 대사회 요구 등 개별 사업장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요구안 때문에 교섭기간이 더 길어지곤 했다”면서 “현대자동차가 업계의 맏형 노릇을 하다 보니까 사실 사업장의 현안이 아닌 요구안을 놓고 노사 모두가 골머리를 썩곤 했는데 이런 측면의 부담은 많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기아자동차의 한 관계자는 “기껏 정치사회적 의제를 바깥으로 빼 놨는데 노조가 또 다른 요구거리를 만들어서 가져오면 곤란하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노사간 불신의 골이 깊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기업별 노사관계의 비효율성에 제동을 걸다
사실 이번 노사협의체 구성은 현대자동차의 2004년 임단협의 조기 타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7월 1일 현대차 노사의 초스피드 임금협상 타결→2일 오전 노사공동협의체 구성 합의 발표→2일 오후 ‘자동차산업 노사공동협의체’ 구성을 위한 협약서 체결의 순서를 놓고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절묘한 타이밍의 조화”라고 말했다.


현대자동차는 올해 단협 없이 임금협상만 진행했다. 노사는 임금부문에서 일정정도 의견접근을 이뤘으나 특별협약 요구안인 ‘산업발전 및 사회공헌 기금’ 등을 놓고 진통을 거듭했다. 산업차원의 노사공동협의체는 이러한 요구를 개별 사업장 이상의 단위로 배출해내면서 노-사, 노-노 갈등을 완화시키는 구실을 했다.


한국노동혁신연구소 조자명 부소장은 “개별기업 노사가 기업단위 쟁점에다 산업공동화 비정규직 등 산업·업종차원 또는 국민경제단위의 의제까지 동시에 끌어안고 있어 중앙 및 산업단위 노사단체의 ‘대리전’으로 비화됐던 과거의 소모전을 줄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기업별 교섭체제의 한계에서 발생한 대립성과 비효율성을 해결할 단초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금속연맹의 백순환 위원장은 “노사협의체는 업종 노사가 함께 자동차산업과 노동자의 미래를 논의하는 첫출발로서의 의미가 크다”며 “노사간 불신과 기업간의 상이한 이해관계 등 넘어야할 산이 많지만 시작단계에서 늘 발생하는 위험성으로 긍정성을 묻어버려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자동차공업협회 김소림 이사도 “아직은 노사의 공동의제 형성과 산업경쟁력 고민의 초기 단계로서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논의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더 많다”고 평가했다.

 

노조 내부 관계에서 싹트는 변화 조짐
노조 내부의 정치적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십여 개가 넘는 현대자동차의 현장조직들은 임단협 때마다 정치적 이슈를 놓고 노조 집행부와의 마찰을 일으켜 왔다. 노조 집행부는 실질적으로 조합원들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이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현장 내에서도 눈치보기와 편가르기가 성행했고 이는 집행부의 리더십 상실과 교섭기간의 장기화로 이어졌다.


“현 집행부와는 확연히 다른 관점과 정파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 한 현장조직의 의장은 “이번 임협 때만 해도 집행부가 요구한 산업발전 및 사회공헌기금에 대해 조합원들은 별 관심을 안 보인 반면 각 조직에서는 액수에서부터 용도에 이르기까지 상이한 입장과 관점으로 논쟁이 상당했다”고 전한다. 그는 “협의체 구성으로 기금 요구가 상위단체로 올라가면서 집행부에 대한 비판과 소모적 논쟁이 많이 줄었음을 실감한다”고 했다.


물론 비판 여론도 있다. 쌍용자동차 현장 조직의 한 간부는 “완성차 노조가 사회공헌 기금 요구를 내 놨다가 수습이 곤란하니까 협의체로 대체해 버린 것 아니냐”며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사의 전략적 선택, 소중한 싹을 키우자
노사 주체의 기대와 우려 속에 출발한 자동차 노사협의체는 아직은 ‘절반의 성공’이다.
GM대우와 르노삼성이 빠진 상태에서 현대, 기아, 쌍용자동차만으로 출발했다는 한계도 안고 있다. 자본의 이질적 소유구조로 업종단위의 노사관계 정립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공업협회의 한 관계자는 “협회의 기능이 아직 회원사 지원 수준이어서 각기 다른 이해관계와 요구를 갖고 있는 3사의 입장을 조율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과제”라고 말한다. 노사 양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많은 업종에서 산별교섭의 전초전이라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오고 있기도 하다.


업종별 노사협의는 업종의 공통된 관심사항에 관한 노사간 의견교환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개별 사업장 노사가 쟁점에 대해 접근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개별 사업장에서의 노사갈등을 최소화하는 한편 고용안정과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유용한 틀이다.


금속연맹의 박병규 부위원장은 “단위사업장의 차원을 넘어 산업현안과 조합원의 교육훈련, 양질의 일자리 창출 등을 논의하게 될 소중한 출발”이라며 “노사 모두가 너무 무리한 기대를 갖지 말고 차근차근 공동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신뢰를 쌓는 것이 최대의 과제”라고 제안했다.


기업단위 노사관계의 비효율성과 대립성을 완화시켜내고 업종단위 노사대화 채널 활성화에 시금석이 될 완성차 노사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 보다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