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홀릭, ‘일’이 존재이유가 돼 버린 사람들
워커홀릭, ‘일’이 존재이유가 돼 버린 사람들
  • 최영순 중앙고용정보원 선임연구원
  • 승인 2005.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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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되 중독되지 않는 방법을 찾자

최영순
중앙고용정보원 선임연구원
공중파 방송을 통해 수년간 안정적이고 단아한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한 여성 아나운서의 명예퇴직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였습니다. 그녀는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자녀들을 위해 가정으로 돌아가고자 회사를 떠난다고 밝혔습니다. 물론 그녀는 언젠가 ‘자유로운 몸’이 되어 브라운관을 다시 찾을지도 모릅니다.


일과 가정 중 어느 것이 선택되어야 하고, 어느 것이 포기되어야 하는지는 개인에 따라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는 보다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는 것 아닐까요?

 

일에 묻혀 건강, 가족관계 파괴


하지만 가정과 개인의 사생활은 무시한 채 회사와 일을 최우선시한 사람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존경은 받지만 정작 자신의 건강이나 가족관계는 조금씩 파멸되어 가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일에 매달리고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일하는데 집중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흔히 일 중독자, 혹은 워커홀릭(Workaholic)이라고 부릅니다.


일 중독도 알콜 중독이나 약물 중독처럼 빠져 나오기 어렵고 본인의 건강뿐만 아니라 인격,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까지도 파괴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 중독자들의 특징은 회사에 남겨 놓은 일이 자꾸 생각나고 일을 하지 않으면 초조, 불안해지며 자신의 가치가 낮아진다는 생각을 한다고 하네요. 특히 기업체 사장, 증권회사 직원, 컴퓨터프로그래머, 방송언론인 등이 일 중독에 걸릴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의사들은 충고합니다.


독일영화 <워커홀릭, Workaholic>은 제목 그대로 일 중독자를 다룬 영화로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일보다 사랑이 먼저이고, 또 일 중독에서 헤어 나오는 방법은 일을 그만두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을 보여줍니다. 


기업투자전문가인 막스는 하루 종일 일에만 매달려있는 일 중독자로 사생활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바쁜 하루하루를 삽니다. 하지만 막스는 성공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만족스럽습니다. 방송국 기상 캐스터로 일하는 막스의 여자친구 로다는 이런 막스가 늘 불만일 수밖에요.

 

함께 여행을 가자는 막스의 제의에 로다는 새로운 MC 자리도 포기하고 기분에 들떠 있었으나 막스는 이 약속마저도 일 때문에 지키지 못합니다. 로다는 이제 본인도 성공을 위해 살 것을 다짐하고 우연히 방송국 중역을 만나면서부터 성공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일 중독 부추기는 사회


일에만 매달려 있는 애인, 혹은 배우자가 있어 자신도 보란 듯이 일에 정진할 수 있다면 그나마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현실의 많은 사람들은 애인과 배우자의 일 중독증에 힘들어하면서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고 자책하고 있으니까요. 


영화는 사랑을 찾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 막스가 로다와 재회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습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우리의 정서와 맞지 않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성공과 출세를 위해 사생활을 포기하고 일에 집착하는 모습은 유럽이나 우리나라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성공이라는 당근을 먹기 위해 남들과 경쟁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서구사회와 달리 평범한 우리 동료들은 해고되지 않고, 도태되지 않기 위해 남들과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일 중독자를 부추겨왔는지도 모릅니다. 회사와 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을 성실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사회분위기, 입시지옥, 취업난, 성과위주 평가의 기업문화는 많은 사람들을 회사와 일을 위해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일자리를 잃었을 때 자신의 존재이유인 ‘일’이 없어짐으로 해서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거나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갑자기 생기는 공허감을 채워줄 그 무언가가 없어 방황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일 중독은 알콜 중독만큼이나 위험하다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치열한 경쟁사회 논리만 의식한 채 조급하게 단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성취하려다 가족일수도, 친구일수도, 취미일수도 있는 정작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일 중독에 걸리지 않으려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열심히 일하되 중독되지 않는 묘안을 찾을 수밖에 없겠지요.


청록파 중 한 사람인 조지훈 시인이 술을 마시는 품위를 따져 주도(酒道)를 18단계로 나눈 글이 있습니다. 1단계인 ‘부주(不酒)’ 즉,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지만 안 먹는 단계에서 시작된 주도는 술의 진미에 반한 단계인 11단계의 ‘기주(嗜酒)’를 거쳐 술로 인해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는 마지막 18단계 ‘열반주(涅槃酒)’로 끝을 맺습니다. 워커홀릭이 알콜홀릭과 별반 다르지 않은 위험성을 가진다고 볼 때, 일 역시 그 경지가 정도를 넘을 경우 ‘열반’에 이를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 세상 사람이 되는 열반의 경지보다는 차라리 ‘일을 아주 못 하지는 않지만 안 하는 단계’인 ‘부노(不勞)’의 단계가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괴롭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