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을 담아 천년의 울림을 빚다
혼을 담아 천년의 울림을 빚다
  • 서솔 기자
  • 승인 2010.05.0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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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장애, 청각장애를 이겨낸 예술혼
“북통이 아비라면 가죽은 어미, 소리는 자식”
악기장 임선빈 선생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장인의 공방. 북을 앞에 둔 장인의 옆모습이 한순간 흔들리더니 육중하면서도 청아한 타격음을 빚어낸다. 둥~기덩덕, 둥~기덩덕…. 리듬은 가볍고 절제되어 있다. 소리는 간결한 리듬에 실려 그 육체성을 떨쳐내고 점차 상승하기 시작한다. 공방을 가득 메운 모든 북이 이에 공명하듯 소리는 더욱 높아지며 또 깊어진다.

가슴을 울리는 북소리를 듣는 순간마다, 몇 번이고 죽어도 여한이 없노라 생각했다. 그 북소리에 미쳐 지금까지 살아 왔다. 주위의 무시와 모욕은 일상이었다. 믿을만한 사람의 배신에 상처받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북을 메우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는 계기로 삼으면 그만이었다. 소아마비와 청력장애를 대단한 장애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묵묵히 제 갈 길만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0호 악기장 임선빈 선생(61)의 이야기다.


악기장의 흰머리

선생이 대뜸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께를 가리킨다.

“내가 왜 이렇게 흰머리가 많은 줄 알아?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전통악기의 99퍼센트가 중국산이야. 왜? 단가가 싸거든. 우리는 무형문화재라고 해서 작품다운 작품을 만들겠다고 몇 달 고생해서 작품을 내놓는데, 기관에서는 비싸서 안사겠다는 거야. 무형문화재라고 지정만 해놓고서. 어쩌겠어. 내 사주팔자가 그렇구나 해야지.”

흰머리께를 가리킬 때 꽤 높았던 선생의 언성은 말을 마칠 때쯤엔 조금 잦아든다. 가슴 속에 응어리 진 한이 많지만 이를 속으로 삭일 줄 아는 사람. 첫인상이 그랬다. 북 만들기 외길 50년이라니 응당 그러고도 남을 터.

“아무 거나 쳐도 소리는 나와. 하지만 부드럽고 애간장을 태우는 소리가 나와야 진짜 북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선생의 아호는 법고(法鼓). 절에서 예불할 때나 의식을 거행할 때에 치는 큰 북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선생은 어릴 적 새벽예불의 북소리가 마음에 ‘콱 박혔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감수성 예민한 소년이었던 선생은 그런 북소리가 들리면 어느새 눈물이 나기도 했단다. 들로 산으로 오동나무며 소나무며 질 좋은 나무가 드물지 않았고, ‘방뎅이 맞아가며 이리야 이리야’ 논밭을 갈던 토종황소의 가죽을 구하기도 어렵지 않았던 그 시절엔 심금을 울리는 북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저가 전통악기엔 그런 매력적인 소리가 없다는 것이 선생의 걱정이다. 그저 하릴없이 지금 만들고 있는 북에나 정성을 다하고 있을 뿐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최근까지도 기술전수자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다 아들 임동국(27)씨에게 대를 잇게 했을 정도로 상황은 여러모로 좋지 못하다. 선생의 흰머리에 다시 한 번 눈길이 간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장애를 딛고 북장인으로 우뚝

“에밀레종이 왜 유명한 지 알아? 역사가 오래됐거든. 형태가 잘 보존된 상태로 말이지. 그 소리는 못 들어봤을망정 사람들이 다 인정해준다는 거지. 그런데 북은 그렇지 못해요. 100년만 지나도 가죽이 헤져버려. 인정은 못 받더라도 어쨌든 비바람을 맞아도, 눈보라를 맞아도 꿋꿋하게 북소리가 나오게끔 혼신을 다해야지. 꽹과리나 징 만드는 장인 만나서 니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다투기만 할 수는 없잖아.”

선생은 이미 여러 이름난 북들에 혼신의 무늬를 새긴 바 있다.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천년을 이어갈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제작 당시 세계 최대의 북으로 화제를 모았던 ‘안양시민의 소리 북’을 비롯해 청와대 춘추관 북, 88서울올림픽 북, 대전엑스포 북, 임진각의 통일기원 북 등이 모두 선생의 손을 거쳤다. 그는 북 제작 전 과정을 혼자 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인 중 한명이기도 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지체장애와 청각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과의 운명적 만남

선생은 1949년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선천성 소아마비로 태어났다. 11살 되던 해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했다.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선생은 넝마주이 소굴에 흘러 들어갔다. 낮에는 종이를 줍고, 밤에는 깡통 들고 밥을 얻으러 다니며 연명했다.

다리가 불편해 주워오는 종이 양이 적자 넝마주이들은 선생을 심하게 폭행했다. 선생의 귀는 그때의 매질 탓에 완전히 멀어버렸다. ‘파출소 소장보다 더 무서웠던’ 그들을 피해 전남 덕양까지 도망간 선생은 그곳에서 우연히 북 공예의 대가 황용옥씨(작고)를 만나 대구까지 따라갔다. 북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느 날 밤, 부모님 생각이 간절해 서러운 마음으로 북을 두드린 일이 있었어. 스승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는 다음 날 나를 부르시더니 북치는 게 좋으냐고 물으시는 거야. 그렇다고 했더니, 그럼 이제부터 북을 만들라고 하시는 거야. 너는 병신이니까 설움 안 받고 살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이지.”

18살 때 스승을 여의었다. 돌아가신 스승을 생각하면 선생은 지금도 고마운 마음에 고개가 숙여진다. 동시에 ‘내가 왜 그 때 그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을꼬’ 하는 회한이 밀려든다. 스승 밑에서 욕먹고 매 맞아가며 배웠던 시절은, “가시덩굴 속에 빠져도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있을만한 인내심을 길렀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북을 대하는 겸손한 태도를 몸에 익혔던 시간이기도 했다.

북 메우는 날이 가까워 오면 스승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짧게 깎더니 아침저녁으로 목욕재계를 했다. 부인과의 잠자리도 피했다. 지저분한 검정고무신은 깨끗한 운동화로 바뀌었다. 작업 하루 전에는 시루떡을 놓고 북에 막걸리까지 뿌려가며 고사를 지냈다. 밤에는 밖에 돌아다니는 일조차 못하게 했다. 어린 임선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소리가 나오는 건가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스승은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이것만큼은 죽어도 잊어선 아니 된다”고 주의를 줄 뿐이었다.

어느 날 문득 스승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북소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법이다. 자만심을 버리고 욕심을 버려라. 네가 무얼 좀 안다고 우쭐대다간 실패하는 법이다.” 선생은 지금도 북을 메울 때면 이 가르침을 마음속에 되새긴다.


장인의 길을 걷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스승님이 돌아가시고 잠깐 방황하다가 중이 되기로 결심했어. 그래서 머리 깎고 찾아간 곳이 대구 팔공산 파계사였지. 근데, 3시간 만에 하산해버렸어. 절 처마에 단청이 선연한 게 마음이 흔들리더라구. 그대로 넋이 나가버린 거지.”

선생은 하산하는 대로 가까운 북 공장에 들어가 절에서 떠온 문양을 북에 입혔다. 오늘날 전통 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룡과 황룡의 문양은 그렇게 탄생했다. 선생은 북의 대가이자 단청의 명인으로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83년 대전 북 공장으로 옮겨 9년 동안 일했다. 88서울올림픽 북과 93대전엑스포 북 제작에 참여했던 게 바로 그 시기다. 94년엔 안양으로 올라와 당시 일하던 북공장의 사장에게 의뢰를 받아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을 제작한다. 총 제작 기간 2년. 높이 220cm, 둘레 820cm, 무게 650kg, 울림판 지름 240cm에 달하는 초대형 북이었다. 가죽 값만 4천만 원이 들었다. 그 때 선생은 ‘머리 털 나고 처음으로’ 신문에 이름이 났다. 1999년 10월 18일, 경기무형문화재 인증서를 받아들었다. 인생이 풀리는가 싶었던 한 때였다.

“아니더라구. 껍데기에 혹해서 내가 착각했던 거지. 우리가 1년에 두 차례 전시회를 해. 한 달에 100만원씩 지원금이 나와. 작품 활동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그래서 작년에 만들어 놓았던 작품, 올해 또 들고 나가야 하는 일도 생겨. 일본만 해도 안 그래. 1년에 하나만 제대로 만들라고 한다네. 경비는 모조리 정부가 대고. 그러니 일본 작품에선 똑소리가 나.”

선생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는다.

“대충 뚱땅뚱땅 만들어 아무렇게나 팔면 돈은 되겠지. 하지만 난 그러질 못해. 내 작품은 상품이 아냐. 북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아니면 팔지를 않으니까 오히려 손님이랑 시비가 붙어.”


천년을 이어갈 울림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선생은 출품한 작품들이 전시회가 끝나면 때로 분해가 되는 게 안타깝다. 부피가 큰 북과 장구를 마땅히 보관할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자식 같은 북을 분해할 때 선생의 마음은 미어진다.

그래서 선생은 남다른 꿈이 있다. 어느 누구든지 경기도 내에 박물관을 지어 선생의 작품을 받겠다고 한다면 아무 조건 없이 기증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죽어도 작품이 사는 길”이라고 선생은 강조했다. 그러면서 선생은 『북메우기』라는 이름의 소책자를 슬며시 꺼냈다. 저자는 임선빈 선생. 북의 역사와 유래에서부터 종류, 제작기법 등을 담았단다. 전통 북이 잊혀 가는 현실에 맞서 선생은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게 있는 데, 내가 만든 북 소리가 그래. 북통이 아비라면, 가죽은 어미요, 그 소리는 자식이거든. 자식 같은 소리를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얼마 전에 내가 20년 전에 만든 북 하나를 찾아냈어. 엿장수가 북을 치고 있는데, 바로 내가 만든 거라는 걸 알 수 있겠더라고. 새 북 주고 냉큼 그걸 받아왔지.”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선생은 북소리를 귀로 듣지 않는다. 북을 메울 때는 놀랍게도 아예 보청기를 귀에서 빼버린다. 선생의 귀를 대신하여 북소리를 듣는 건, 수 십 년 동안 북을 어루만져 온 손끝과 온 정성을 다해 북을 사랑해 온 가슴이다. 고집스럽게 전통북만을 만들어 온 그 정성이 선생의 마음 한 복판에 길을 내 소리를 불러온다.

천년을 이어갈 울림이 선생의 가슴 속으로 휘몰아쳐 들어오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임선빈 선생이 소개하는 북 만드는 과정
“북을 만들 때 쓰는 나무는 크게 오동나무, 소나무, 밤나무, 미루나무 때로는 피나무야. 나무에 따라 가죽이 붙는 부위가 달라지지. 소리의 맑고 깨끗한 정도가 여기에 달렸어. 사람 사이에도 궁합이라는 게 있잖아.

제일 많이 쓰는 건 역시 오동나무야. 가볍고 소리가 맑거든. 하지만 요새는 중국산을 써. 중국산은 우리나라 오동나무에 비할 바가 못 되니 나오는 소리도 좋질 못하지.

목가죽은 판소리북에 쓰고 방뎅이가죽은 김덕수 같은 사물놀이패 사람네들이 쓰지. 뱃가죽은 좀 얇아. 그래서 무속인들이 쓰기에 좋고 등가죽은 농악북에 쓰여. 그런데 대북은 가죽 전체가 다 들어가. 그렇기 때문에 대북을 만들려면 힘들어. 더 당기고 조이고 해야 하거든.

일단 쓸 만한 나무를 골라야지. 나무토막을 잘라서 먼저 쪽판을 만들어야 해. 옛날에는 나무속을 긁어내 통북을 만들었지만 요즘은 쪽판을 이어 붙여 만들지. 쪽판을 잇댄 후에 망치와 정으로 밀착을 시켜. 바람 잘 통하는 그늘에 말린 후에 불에 살짝 그슬리면 쪽통이 완성 되는 거야.

그 다음엔 가죽을 준비해. 그리고 철사로 만든 둥근 테를 가죽 위에 올려놓고 재단선을 그어. 재단선에 맞추어서 가죽을 잘라내면 알맞은 크기로 나오겠지. 모양이 나온 가죽을 쇠테와 엮은 후에 말리면 일단 피가 완성이 되지.

피를, 구멍 뚫기 좋게 만들어 놓은 틀 위에 올려놓고 구멍을 내. 그 구멍으로 줄을 엮어낸 후에 고정용 쐐기를 넣으면 완성이야.”

 

▲ 왼쪽부터  ①가죽에 테를 대고 재단선 긋기 ②재단선에 맞추어 가죽 재단하기 ③엮기 전 가죽 고정하기
▲ 왼쪽부터  ④가죽과 쇠테엮기 ⑤가죽 찌꺼기 제거하기 ⑥건조확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