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날씨는 어땠을까요?
내 삶의 날씨는 어땠을까요?
  • 안형진 기자
  • 승인 2010.05.04 09:56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상정보, 며느리 보듯 말고 딸 보듯 해줬으면…”
‘정치’로 전 재산 다 날렸지만 후회는 안 해
[사람돋보기] 김동완 전 기상통보관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김동완 기상통보관, 그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요즘 일기예보는 왜 그러느냐?’고 말이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기상청에 비싼 장비들을 들여놨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일기예보의 배경에는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효과가 사용되고 아리따운 기상캐스터가 배시시 웃으며 일기예보를 전해준다. 모든 것이 이전보다 나아졌다. 그런데 이 ‘날씨 아저씨’는 기상청 장비가 지금보다 훨씬 좋지 않을 때도,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도 없이 일기도를 직접 손으로 슥슥 그려가며 방송을 했어도 날씨를 척척 맞추곤 했던 것이다.

평소 일기예보에 가지고 있던 불만, 살아온 이야기, 잠시 정치에 몸 담았던 이야기까지 수많은 질문거리를 안고 시작한 인터뷰였지만 준비해간 질문을 모두 꺼내지 못했다. 그는 베테랑 방송인답게 일흔을 넘긴 고령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지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저 예전 일기예보 방송을 시청하던 때로 돌아가 그의 이야기를 ‘경청’할 밖에.

“요즘 일기예보는 왜 이리 안 맞죠?”

따뜻한 봄 햇살이 내리는 4월 초의 오후, 나의 집 앞을 찾아온 서른 남짓의 젊은 기자는 대뜸 “도대체 왜 요즘 일기예보는 그렇게 날씨를 맞추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잘못됐다. 오히려 내가 방송할 때 예보가 더 부정확했다.

내가 처음 방송을 시작했을 때 예보 적중률은 60~70%에 지나지 않았다. 한창 방송 전성기에 적중률은 80% 남짓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적중률은 무려 92%다. 적중률은 오히려 높아졌는데 일기예보에 대한 불만은 쌓여가고 있다.

내 생각에 이러한 부조화의 이유는 단 하나다. 나는 기상정보의 ‘생산자’였고 지금의 캐스터들은 그냥 정보를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비가 오는 날씨라고 한다면 ‘서울·경기 지방 대체로 흐리고 곳에 따라 한 때 비가 오겠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기상용어로 ‘한 때’는 전체 24시간 중 3시간을 말한다. 기상캐스터들은 이걸 그대로 방송해야 한다. 그들은 정보의 전달자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비 온다는 소리만 듣는다. 사람은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소통의 문제다.

야구경기를 봐도 해설자가 있고 캐스터가 있다. 나는 해설자의 역할을 했던거고 지금 기상 캐스터들은 캐스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기상청의 예보관이었고 예보관이 판단하기에 비가 오긴 하겠지만 그 확률이 높지 않겠다고 판단되면 이렇게 말하게 된다.

“한 때 비가 오기도 하겠지만 대체로 흐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비는 저 구석으로 숨어버리게 된다. 이런 것들이 쌓여 시청자들의 ‘신뢰’를 만들고 그 신뢰는 예보가 조금 빗나갈 때도 시청자들이 다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다. 지금은 그 신뢰가 많이 떨어진 상태다.

물론 현재의 기상캐스터들이 더 분발해주어야 하겠지만 시청자들에게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일기예보를 시어머니 입장에서 며느리 보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어머니 입장에서 딸 보듯 해달라는 이야기다.

분명 잘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못하는 것을 책잡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왜 맞추지 못했는지를 이해해 달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잘 맞추었을 때는 그만큼 성원을 보내주었으면 한다.

어느 신문 기사를 보니 의사들의 오진률이 무려 30%에 달한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병 하나를 진단하기 위해 의사는 온 몸 구석구석을 살펴야 한다. 환자와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고 조심스러운 판단을 한다.

기상정보를 만드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3일 뒤 날씨를 예측하기 위해 저 멀리 서쪽 지중해 부근의 공기 성질이 어떤지, 그 공기가 러시아를 지나며 어떻게 변화하는지 등 살펴야할 것이 무궁무진하다. 그런 상황에서 92%의 적중률을 보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긍정의 힘은 길다

하지만 ‘생활기상’을 처음 시작한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주고 싶은 부분은 있다. 지금의 기상 캐스터들이 기상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저 정도까지 해낸다는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나 같은 아저씨보다는 젊고 예쁜 사람들이 방송을 하며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근래의 기상캐스터들은 지나치게 부정적인 화법으로 인기를 얻으려 하는 것 같다. 물론 근래의 방송이 ‘한 발 더 자극적인’, ‘한 발 더 막나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지향하는 것도 일부 영향이 있겠다. 그러나 부정적 화법은 잠시 인기를 만들어 줄 수 있을지라도 절대 오래갈 수 없다. 특히 날씨는 자연현상이고 자연현상은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요즘 기상 캐스터들은 ‘가마솥 더위’, ‘찜통 더위’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날씨를 전달하는 사람은 절대 피해야 할 단어들이다.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이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얼마나 짜증이 나겠는가? 기상정보를 전하는 사람은 시청자를 위한 서비스맨이다. 대단히 잘못된 표현이다.

나 역시 더운 날엔 덥다고 말했다. 더운 날을 시원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파리도 조는 듯한 더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파리는 더운 날 가장 활발히 활동한다. 그 녀석들이 더위에 졸고 있다는 것은 정말 더운 날씨를 에둘러 말한 것이다. 이 멘트를 듣고 이해한 사람들은 피식 웃게 된다. 안 그래도 더워서 짜증나는데 기상정보를 보면서 짜증을 내야 하겠는가?

나는 항상 시청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방송을 했다. 내일 기온이 35도까지 올라간다면 나 역시 35도라는 이야기를 방송에서 해야 한다. 사실은 일단 전달해야 하니까. 하지만 나는 말미에 이런 이야기를 꼭 붙였다.

“내일 서울지방 낮 예상 기온은 섭씨 35도입니다. 현재까지 서울지방 최고 기온은 38.4도를 기록한 적도 있습니다.”

내일 기온이 35도까지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청자들은 그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짜증이 날 것이다. 하지만 서울 기온이 38.4도까지 올라간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청자들은 다소간의 위안을 얻게 된다. “38.4도까지 간적이 있어도 버텼는데 35도 쯤이야”라고 말이다.

지금껏 나를 기억해주는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긍정 화법’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긍정의 힘’은 그렇게 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생활기상’, 노력과 행운의 합작품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기는 다소 쑥스럽지만 나는 대한민국 ‘생활기상’의 창시자다. 요즘에야 기상캐스터들이 비옷을 입고 날씨를 전해주거나 마스크를 쓰고 방송하는 등 시청자들에게 친숙함을 선물하는 생활기상이 보편화 됐지만 내가 방송을 시작할 무렵 생활기상은 개념조차 없는 새로운 것이었으며, 날씨 방송은 당시 중앙관상대(현 기상청)에서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방송에 옮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방송을 시작할 때도 특별히 ‘생활기상을 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름의 노력과 행운이 낳은 합작품이었다. 나의 노력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빛을 보게 됐다.

관상대 비번 근무일이면 나는 항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곤 했다. 나에게 세상은 언제나 신기한 일로 가득한 곳이었다. 호기심이 충만했던 나는 시장이고 복덕방이고 공사장이고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듣곤 했다.

하루는 복덕방에 들러 바둑 훈수도 두고, 참견하는 낙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기상방송이 흘러나왔다. 바둑을 두던 복덕방 주인은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라디오를 돌렸다.

그때 나는 자그마한 충격을 받았다. 날씨가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함에도 날씨를 듣지 않는 사람들. 그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능력을 가지지 못한 기상방송의 탓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길로 나는 중앙관상대로 달려가 캐비넷 안에 고이 모셔둔 나의 노트들을 꺼내놓았다.

관상대에 갓 입사했을 때 나는 택시운전기사였다. 어린 시절부터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이 몸에 밴 습관이었다. 택시를 탄 사람들은 내 옆에 앉아 자신의 일상을 하나 둘 열어 놨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본 직업은 속일 수 없는지 그들이 풀어놓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것은 ‘날씨’에 관한 이야기였다. 급작스런 돌풍과 소나기에 일을 망친 사람, 봄철 황사에 목이 쉰 사람, 찌는 듯한 무더위에 몸이 상한 사람까지 날씨에 대한 사연은 제각각이었다.

택시운전을 마치고 관상대로 돌아온 나는 택시에 탔던 사람들이 한 날씨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어떤 이유로 날씨가 그렇게 됐었는지를 찾아 따로 기록했다. 그것은 내가 날씨를 공부하는 나름의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방송에 그때 들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집어넣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응이 왔다. 내가 시도한 새로운 형식이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대단하거나 새로운 것은 없었다. “날씨 변화가 대단히 심하겠습니다. 온도조절기능이 약한 노약자나 어린이는 옷을 몇 차례 갈아입는 것이 좋겠습니다”는 멘트는 환절기에 감기에 걸린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만들었고, “오늘은 여우가 시집가는 날입니다”는 내리는 빗줄기 속에 쏟아지는 햇살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청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만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생활기상’은 이제 모든 방송사 기상정보에 빠지지 않는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됐다.

3개월 간의 월사금, 30억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나는 지난 40년 동안 공무원이기도 했고, 방송사의 직원이기도 했다. 매달 월급을 받아 생활했고 월급쟁이 치고는 많은 돈을 모았다. 그렇게 40년 동안 모은 돈이 고작 3개월 만에 모두 없어졌다. 돈을 모으는 일은 어려웠지만 쓰는 일은 지나치게 쉬웠다.

모든 일의 발단은 내가 정치를 시작하면서 비롯됐다. 나는 200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내 고향인 김천에 출마했고 고배를 마셨다. 열심히 모아둔 돈 30억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고 나는 지금 서울 근교 변두리에서 살아가고 있다.

선거가 끝난 뒤 나는 제일 먼저 가족에게 돌아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을 줄곧 곁에서 지켜봐 준 아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용서’해 주었다. 왜 그랬냐고, 이게 무슨 꼴이냐고 원망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내 아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족에게 용서를 받고 나니 더 이상 마음에 짐은 없었다.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그동안 날씨와 방송만 알고 온실 속의 화초처럼 지내온 나에게 날려버린 30억과 정치 경험은 사람에 대한 통찰력을 선물해줬다. 그리고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김천에서 선거 유세를 하는 동안 동사무소를 들렀는데, 사무소에 앉아 있던 한 주민이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이 국회의원하시면 동사무소에 물새는 것을 고쳐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대답했다. “지역 국회의원은 전체를 보는 사람입니다. 제가 우리 지역을 위해 예산을 많이 배정하고 좋은 정책을 만들면 선생님은 동에 건의하고 동에서는 시에 건의하고 해서 물새는 것을 고쳐드릴 겁니다.”

나에겐 지극히 상식적인 대답이었다. 나는 지역을 위해 내 할 일을 할 것이지만 동사무소에 물이 새는 것을 직접 나서 고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한 두 번의 요식행위라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세가 끝나고 보좌관이 조용히 불러 말했다.

“선생님, 그때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무조건 해드린다고 해야지요. 그런 대답을 들은 사람은 선생님에게 투표하지 않습니다.”

나는 항상 그랬다. 좋은 것은 좋았고, 싫은 것은 싫었다.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이고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늘 옳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사람을 대할 때는 더욱 그랬다. 나는 그 사실을 30억 원의 월사금을 지불한 뒤 깨달았다.

지금의 난 무조건 먼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각자 의미 있는 생각들을 가진 채로 살아간다. 그 많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안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의 황혼을 지나고 있는 내 삶의 새로운 철학이다.

젊은 기자는 마지막으로 나의 삶 전체를 ‘날씨’에 비유해 달라는 질문을 건넨다. 70여 년의 삶 전체를 관통할 수 있는 날씨가 있을 턱이 없다. 흐린 날도 있었고, 바람이 부는 날도 있었으며, 맑은 날도 있었다.

확실한 것은 이 모든 날씨는 대자연의 원리 앞에 톱니바퀴가 돌 듯 함께 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햇빛과 비는 모든 생명력의 근원이 되고 바람은 날씨를 만들어낸다. 폭풍이 불지 않는다면 햇빛의 고마움을 잊은 채 살아간다. 이 모든 자연의 이치가 우리의 삶 그대로다.

나는 내 삶이 자랑스럽다. 남들이 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고 많은 후배들이 내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대중들에게서 지나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들이 지금도 나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도 참으로 보람된 일이다.

대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흘러가듯 나의 삶은 지금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이듯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정도면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