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띄워 하늘로 날린다
마음을 띄워 하늘로 날린다
  • 김관모 기자
  • 승인 2010.06.0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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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다른 연을 만들고 즐기기 어언 40년
작은 것에도 정성을 기울여라
창작연 장인 변하일 선생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거북선이나 돛단배, 청룡열차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어떤 때는 수원성이 하늘을 날아다닌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지만 상상력만으로 이를 해낸 이가 있다. 그 상상력이란 연이다. 그것도 그저 ‘취미’로 즐겼다는 한 명장이 만들어낸 작품들이다. 연이라고 하면 방패연이나 가오리연을 상상하기 쉽지만 꼭 연이 그런 모습을 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지 않은가.

명장이란 것도 매한가지다. 반드시 하나의 일만을 전업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장인이 되는 것일까.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고 꾸준히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 명장의 대열에 오른 사람들도 있다. 그 일을 자기 주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취미처럼 즐기다가 어느새 명장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40년간 창작연과 함께 살아온 변하일 선생(72)도 그런 이들 중 하나다.

변 선생은 “그저 취미로 연을 만들어왔다”며 자기 일을 대단치 않은 일이라고 말했지만, 방패연이나 가오리연 같은 전통 민속연과 달리 학이나 용, 성곽, 열차 같은 3차원 모형의 창작연을 만드는 명장으로 ‘변하일’이라는 이름 석 자는 빠지지 않는다. 단지 즐기기 위해 시작한 그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창작연 명장 또는 창작연 박사라고 불리게 된 사연을 들어봤다.

거북선이나 돛단배, 청룡열차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어떤 때는 수원성이 하늘을 날아다닌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지만 상상력만으로 이를 해낸 이가 있다. 그 상상력이란 연이다. 그것도 그저 ‘취미’로 즐겼다는 한 명장이 만들어낸 작품들이다. 연이라고 하면 방패연이나 가오리연을 상상하기 쉽지만 꼭 연이 그런 모습을 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지 않은가.명장이란 것도 매한가지다. 반드시 하나의 일만을 전업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장인이 되는 것일까.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고 꾸준히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 명장의 대열에 오른 사람들도 있다. 그 일을 자기 주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취미처럼 즐기다가 어느새 명장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40년간 창작연과 함께 살아온 변하일 선생(72)도 그런 이들 중 하나다. 변 선생은 “그저 취미로 연을 만들어왔다”며 자기 일을 대단치 않은 일이라고 말했지만, 방패연이나 가오리연 같은 전통 민속연과 달리 학이나 용, 성곽, 열차 같은 3차원 모형의 창작연을 만드는 명장으로 ‘변하일’이라는 이름 석 자는 빠지지 않는다. 단지 즐기기 위해 시작한 그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창작연 명장 또는 창작연 박사라고 불리게 된 사연을 들어봤다.

 

고정관념을 깨고, 예술로 승천하다

변하일 선생이 만든 창작연은 지금까지 수백 점에 이른다.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나 2002년 한·일월드컵 때에도 조직위원회에서 변 선생에게 작품을 요청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행사에서 그에게 행사와 관련된 창작연을 주문하고 있다.

그가 창작연을 만들게 된 것은 1970년대 초 6살이었던 아들이 연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고 한다. 양말도매업을 했지만 사업이 풀리지 않아 부도를 내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는 잠시 쉬어가자는 마음으로 아들의 청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때 처음 만든 것이 적·황·청으로 된 삼태극 무늬연이었는데 색깔이 곱고 화려해 공원에서 연을 날리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이후 자녀들과 자주 연을 만들어 연날리기를 하러 다니던 그는 한국민속촌에서 열리는 연날리기 대회에서 학 모양을 본뜬 창작연을 제작해 참가했다. 

“한번은 민속촌에서 연날리기 대회가 있다고 해서 평면으로 학 모양 연을 만들었죠. 그런데 애들 하는 말이 죽은 학이 뜨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버려진 스펀지와 대나무를 구해서 입체적인 학을 만들었죠. 날개도 따로 장착해서 하늘을 날면 날개가 퍼덕거릴 수 있게 했고요.”

당시 연이라고 하면 가오리연이나 방패연처럼 그 형식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처음 그가 만든 연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다. 처음 연을 본 사람들 중에는 “그것이 무슨 연이냐”며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독특함은 오히려 그에게 큰 기회가 됐다. 

“대회 도중에 제 연줄이 다른 사람 연줄과 얽히면서 우연히 솔밭에 있는 초가지붕 위에 얹혔어요. ‘게임이 끝났구나’ 생각하고 연을 회수하려는데 바람이 부니 제 학연이 날갯짓을 하며 정말 한 마리 학처럼 지붕 위에서 서서히 위로 올라가더라고요. 그 순간 사람들이 넋을 놓고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박수갈채를 보냈죠.”

천덕꾸러기 연이 예술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새는 물론 나비나 잠자리 등 동물이나 곤충들의 모습을 한 창작연을 만들었고, 미디어 매체에도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의 정형화 된 연의 모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창작연의 존재를 알리게 됐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새로움은 밖이 아닌 내 안에 있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창작연을 만들어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나비연이나 청사초롱연, 거북선연, 청룡연 같은 입체 연들도 선보이면서 40여 차례 이상 대회에서 우승했다. 돛단배연이나 거북선연처럼 자동차만한 연도 더러 있었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을까.

“우선 작은 가오리연부터 날려서 띄우고 점차 큰 것으로 띄웁니다. 돛단배연을 날릴 경우에는 돛단배의 돛이 현관문 크기만 해요. 그래도 일단 돛이 바람을 타기 시작하면 큰 연들도 뜨게 되죠. 중요한 것은 연에 연줄을 맬 때 연의 1/3 높이 지점에 맞춰 매달아 바람을 잘 탈 수 있게 하는 거죠.”

변하일 선생은 창작연을 만들기 위한 아이템을 항상 주변에서 찾는다고 한다. 미디어 매체는 물론이고 책이나 자료들을 뒤져서 아이템을 연구하고 의미를 찾아낸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것들이다.

“아이들도 연을 날리게 하려면 조그마한 것이라도 우리 것에서 찾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요즘에는 연날리기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자기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국제가 싸고 다양하다고 해서 많이 사용해요. 그 시대마다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살피고 그 문화에 맞는 ‘국가대표’를 만들어야 되는데 그런 고민이 부족한 거죠.”

또한 변하일 선생은 자신이 창작하는 연의 모형을 계획할 때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고 세밀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강조했다. 1996년 세계 연날리기 대회에서 우승할 당시 만든 수원성연도 비율이나 자세한 묘사를 통해 만든 작품이다. 또한 2002년 월드컵 때 사용한 만국기연과 함께 24개의 축구공연을 날렸는데 이는 피파 집행위원국 숫자라고 한다. 이렇듯 창작연이라고 해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있는 것을 다시 연구하고 재해석해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셈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항상 관심을 두고 준비하라

그의 손은 종이와 풀로 인해 항상 너저분하고 거칠다. 큰 연을 만들 때는 스프레이용 페인트를 사용하다보니 종아리는 페인트 독으로 빨간 발진이 올라 있었다. 그의 방안은 온통 연과 재료로 가득 차 있고 각 방문에는 연을 걸어놓고 모형을 살피기 위한 못들이 박혀있었다. 이쯤 되면 집안 가족들이 걱정하거나 불만을 토로할 법 하건만 오히려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별 문제를 삼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이런 가족들의 무심한 태도가 그는 못내 아쉬울 지경이다.

 

“종이나 천 같은 것들을 많이 사도 그렇게 많은 돈이 들지 않아요. 몇 천원 어치 천이나 종이를 사면 수십여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양이 나오거든요. 게다가 그 외에 대나무나 철 같은 재료들은 장사하면서 쓰다 남은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경우도 많아요. 제가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취미생활 삼아서 연을 만들다보니 집에서도 별로 뭐라고 하지 않죠.”

이렇듯 오랫동안 연에 대한 애정을 쏟은 그지만 연 만드는 기술이나 모형제작을 배운 적도 없고 그림 그리기를 위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다. 대전중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터지면서 학업을 중단한 이후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했을 뿐 공부할 시간조차 없었다. 연 만들기를 시작한 후에도 공사장 인부로 일하거나 빌딩관리업무 등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면서 돈을 벌어 가족들을 부양하기에 바빴다. 그 과정에서도 항상 시간이 날 때마다 방 안에서 창작연을 만들면서 혼자의 힘만으로 뛰어난 예술을 만들어낸 셈이다. 연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

“한번은 연을 만들다가 문제가 생겨서 파기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때는 눈물이 나더라고요. 연에 대해서 자주 생각할 때는 연에 대한 꿈도 자주 꿨어요. 그런 날은 정말 횡재라도 맞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죠.”

그래서 그는 좀 더 남과 다르고 그 의미를 정확하게 담아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막상 만들고 나면 자기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시도하고 있는 자전거 타는 동물을 표현하는 입체연도 마찬가지다. 최근 미디어에서 자전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을 감안해 자전거타기 운동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욕심 없이 마음을 담아 연을 날린다

변하일 선생은 자신의 연을 다른 사람에게 팔거나 기증하지 않는다. 자기 작품에 대한 애착이기도 하고, 예전에 겪은 다른 사람들 간의 갈등도 한몫 했다.

“제 연이나 연 날린 사진을 몇 번 다른 사람에게 준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그것을 돌려주지도 않고 마치 자신이 만들어서 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한번은 한 사람의 부탁으로 연을 팔면서 ‘이 연을 당신이 만들었다고 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 남부지역에서만 활동하고 내가 활동하고 있는 중부에는 오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었죠. 하지만 그쪽에서 먼저 약속을 어기고는 ‘돈 받고 팔았으면 그만이지 왜 이제 와서 그러느냐’로 따지더군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연을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팔지 않아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또한 그는 최근 연날리기 대회 참여를 자제하고 있다. 대회를 즐기기 위해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승을 위해 중국연이나 다른 사람의 연을 모방해서 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연을 만들어서 하늘에 날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 선생의 생각이다.

“한 번은 연날리기 대회를 갔는데 직접 연을 창작하지도 않았는데 상을 주더라고요. 게다가 나이 먹은 사람들이 상 받을 욕심에 젊은 사람들에게 양보하지 않고 나오는 모습도 안 좋아보여서 지금은 대회나 행사에 참여를 거의 하지 않고 있어요.”

그는 평소에는 건물이나 공원 관리직을 맡으며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고 있다. 예전에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면서도 각종 연날리기 대회를 휩쓸고 다니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지만, 이제는 차분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연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칠순이 넘은 나이다보니 체력이나 순발력이 떨어져 과거와 같이 다양한 연을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도 못하기 때문에 순수 창작에 애로사항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창작열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연을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 연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이라고 강조했다.

“제게 있어서 연이란 제 생각을 표현하는 또 다른 저의 모습이죠. 한번은 연을 날릴 때 ‘내 마음을 연에 실어서 하늘 높이 띄우고 싶다’는 글을 쓴 적이 있었어요. 가끔 경기를 하다 보면 사람들이 서로 등을 지고 조언을 해주어도 삐딱하게 받아들일 때가 있어요. 30년간 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면서 남의 불편 덜어주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내 것만 옳다고 여기지 말고 다른 사람도 함께 즐기자는 마음으로 연을 만들고 싶어요. 그냥 그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