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권리’를 위해 자신을 ‘감당’해야 한다
‘말할 권리’를 위해 자신을 ‘감당’해야 한다
  • 안형진 기자
  • 승인 2010.06.0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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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발언을 억압하는 한국사회는 후진적 사회
“불평만 하지 말고 해결하고자 애써보자”
[사람돋보기] 배우 권해효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때로는 자신의 젊고 무식함, 철없음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기자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번 인터뷰는 특히 그랬다. 처음부터 ‘쉽지 않으리라’ 생각은 했다. 소위 말하는 이 사람의 ‘내공’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토해내는 이른바 ‘개념’ 연예인. 대세를 거스르는 이야기를 거세시키려는 권력의 눈이 번뜩이는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외치는 배우 권해효. 그는 어떻게 그리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

“요 근래 이렇게 쾌청한 날씨는 없었던 것 같네요. 하늘 좀 보세요” 첫 인사는 부드럽고 편안했지만, 그가 뿜어내는 진한 사람의 향기는 막중한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어쨌든 그렇게 인터뷰는 시작됐다.

연극으로 말하는 노동자의 ‘예술’ 이야기

인터뷰 당시 배우 권해효는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 「광부화가들」로 관객을 만나고 있었다. 공연은 5월 30일까지. 독자들이 이 글을 읽고 있을 즈음은 아쉽지만 이미 공연이 막을 내렸을 시점이다. 이미 막이 내린 연극을 다시금 독자들에게 언급하는 이유는 이 연극의 주인공들이 공교롭게도 ‘노동자들’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빌리 엘리어트」를 쓴 작가 리홀은 「광부화가들」에서 다시금 탄광촌을 등장시킨다. 배경이 되는 곳은 1934년 영국 북부 ‘애싱턴’이라는 탄광촌. 애싱턴 광산의 광부들은 교양수업을 통해 미술을 접하게 되고, 직접 그림을 그리며 주경야화(晝耕夜畵)의 생활에 빠져든다.

“1930~40년대 영국 미술에 긍정적 충격을 줬던 애싱턴 그룹이라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이야기에요. 과거 노동자들이 꿈꿨던 세상, 바랬던 세상, 꿈과 열정, 예술은 무엇일까… 여러 의미를 담고 있죠. 현재 영국에서 가장 뜨거운 작품 중 하나고요, 요즘 같은 시기에 이런 좋은 작품을 하게 돼 뜻 깊고 의미가 있지요.”

1990년 연극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한 그는 참으로 ‘꾸준한’ 배우다. 하루아침에 대중의 이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하루아침에 대중들에게 잊혀진 것도 아니다. 지난 20년을 항상 한결같은 모습으로 지켜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최소한 15년 이상은 더 해야만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세월 자신의 활동을 두고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활동을 ‘뭔가에 매달려 열심히 하려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지금까지 자신을 만들어준 힘인 것 같다’고 일반적 통념에 반하는 이야기로 설명했다.

“자랑은 절대 아닌 이야기지만 저는 방송 3사의 탤런트실이 어딘지 지금도 잘 몰라요. 촬영이 아니면 방송국 언저리도 안가죠. 그 거대한 조직, 인적으로, 자본적으로, 공간적으로 거대한 그곳과 대결할 수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쫓아다녀도 안 될 것 같았어요. 내가 이 길을 열심히 가면 쫓아오게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또 하나는 (방송국이) 굉장히 상업적인 공간이잖아요. 그런 것이 방송을 하는 것을 반성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이야기는 이렇게 자연스레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나는 ‘공인’이 아니다

확실히 그는 여느 유명인사와는 조금 달랐다.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차분하고 논리정연했다. 오히려 빙빙 돌려 어렵게 질문하는 질문자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참여와혁신>답지 않게 ‘연기’에 대한 이야기로 변죽만 울리던 인터뷰는 그의 ‘의지’로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연예인’이라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직업을 가진 입장에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40대 동년배 친구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고 묻자 그는 “반대로 생각하면 다른 측면이 보일 것”이라며 또박또박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갔다.

“저는 업종별로는 자영업자로 구분되어 있고요, 비정규직이고요, 늘 잠재적인 실업자에요. ‘실업’과 ‘취업’이 매일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일상화 되어 있다보니까 불안정성으로 이야기하면 이 직업만한 것이 없을 겁니다. 저야 이런 것이 익숙하다보니 그냥 넘어갔지만 대한민국은 사회 자체가 불안정으로 가득해요.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는 여전히 후진적이라는 것이죠. 자기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은 없고, 국가나 사회에서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의 성취감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직장생활을 하고, 그러다보니 업무효율은 최하위 권이죠. 10시간 넘게 직장에 앉아 증권을 보고, 환율을 보는 비정상적인 사회. 서구 역사가 보여주듯 자본가들은 스스로 주지 않습니다. 쟁취해야 하죠.”

그의 이야기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지난 시간 끊임없이 반복해 들어왔던 우리 사회의 ‘비주류’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한국사람 대부분이 알고 있는 연예인으로 얼마든지 주류사회에 편입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졌던 그가 꺼내 놓는 ‘비주류’들의 이야기는 그 어떤 느낌보다 새로웠다.

자연스럽게 “공인으로서 부담감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흘러나왔다. 그간 <참여와혁신>도 알지 못하는 <참여와혁신>의 ‘정치색’ 때문에 인터뷰를 거부했던 몇몇 유명인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분명 광고주들은 당신을 맘에 들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농담 반 진담반의 서툰 이야기도 함께 터져나왔다.

“질문에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일단 저는 공인이 아니에요. 저는 전혀 공적인 일을 하지 않거든요. 저 역시 사적으로 먹고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죠. 공인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공무원들처럼 세금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죠. 스포츠 신문들이 매일 떠들어대는 바람에 그렇지 아마 연예인을 공인으로 여기는 국가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겁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대중적 공간에서 일하는 사적 인간’일 뿐이죠. 저는 개인이 발언하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회가 후진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광고주와 당연히 부딪치죠. 그것을 모를 리가 있겠어요? 다만 그 정도는 감수한다는 뜻이죠. 다른 측면으로 이런 부분도 있어요. 하청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대기업의 광고를 흔쾌히 하면서 광고 모델이 건강한 사회를 위해 애쓰는 척은 하지 말자는 것이죠. 그건 사기에요. 아니, 사기라면 그렇게 안하겠죠. 아마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았을 거에요. 우리 사회가 그렇다는 것이죠. 뒤로는 성매매 산업이 발달했지만 가장 근엄한 척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 아닙니까? 신문, 소설의 성적인 표현조차 재단하는 나라잖아요. 이중적인 거죠.”

그는 대중들이 자신을 부담스럽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배우는 연기로 말한다’는 상투적인 진리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이 역시 자신이 ‘감당해야할 몫’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몫을 감당함으로써 자신은 ‘말할 권리를 얻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386을 말하다

1965년생, 85학번. 숫자 그대로의 의미만 본다면 그는 386세대가 맞다. 인터넷 검색창에 그의 이름 세 글자를 검색하면 그의 소개는 아래의 문구로 시작된다.

‘1985년 전두환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이 한창인 한양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아버지가 정년퇴직해 3남매의 학비를 감당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장학금을 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만 했다.’

이 문장을 거꾸로 비약시켜 해석하면 ‘가정에서 학비를 감당할 형편이 됐다면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활발히 참여했을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자신의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적이 없다고 밝힌 그는 그 정보가 사실과는 다르다고 대답했다. 장학금에 욕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학동안 학업이 너무나 즐거웠다는 것이다. 덧붙여 그는 현재의 대학교육에 대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지금 한국에서 자기 전공과목을 공부하며 즐거운 대학생이 얼마나 될까요? 대한민국 대학교 전공은 사기에요. 말도 되지 않는 과를 만들고, 학생의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죠. 기초학문이 천대받고 있는 사이에 연극영화학은 어떻게 됐나요? 학과는 말 그대로 學을 해야 해요. 연극과 영화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곳이지 연극학원, 연기학원이 아니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연기학원이 되고 있죠. 학교 홍보용으로 잘 써먹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교육이 문제입니다. 심지어 아이들에게 자율적인 혹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는 이유로 교사들에게 빨간색을 덧칠하고 있죠. 우리가 한 번이라도 민주주의가 뭔지 배운 적 있나요? Republic이 뭔지, 시민인 무엇인지 관심도 없잖아요.”

그렇다면 왜, 한참 뜨거웠던 80년대를 뒤로 한 채, 누구보다 가열찼던 386세대가 현실에 순응하고 있는 이때 ‘권해효’라는 사람이 등장한 것일까?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과거 조용했던 제가 지금 튀어나왔다는 생각은 웃긴 것 같고요, 그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자각하는 과정이 대개 조직 안에서 이뤄지잖아요. 총학생회가 됐든, 노조가 됐든. 그런데 저는 그런 경험이 없어요. 아마 독서를 통한,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아요. 살면서 불평, 불만을 많이 하는데 해결하려는 고민을 하지는 않잖아요. 불평만 하지 말고 해결하고자 애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제가 나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먼저 해온 분들이 있다면 같이 가서 참여하자는 것이고요. 시민으로서의 참여죠. ‘운동’이라고 하면 먼저 ‘운동’해오신 분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이 들고….”

“386이란 표현도 맘에는 들지 않고, 그 시기에는 80년 광주와 87항쟁이 있기는 했지만 80년대 학번들이 정말 주체적이었느냐에는 회의적이에요. 70년대 아날로그 세대와 90년대 디지털 세대 중간에 끼어 있는 세대, 한편으로 모두를 아우를 수 있었지만 굉장히 기회주의적인 세대였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정작 20대와 10대를 착취하며 먹고 살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고, 대한민국 대기업에서 중소기업 하청기업 짜고 있는 세대가 모두 386 세대일 거에요. 비겁한 세대라는 생각도 들고 만감이 교차해요. 저 역시 거기에서 자유롭지는 않겠죠”

그는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이렇게 세상에 나오기까지 수많은 자기 반성과 성찰의 과정을 거쳤으리라. 대화는 아직 활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본의 아니게 분위기를 무겁게 ‘강요’한 것 같아 재빨리 화제를 돌리려 했다.

“무거운 것이 아니고 중요한 이야기에요. 대한민국에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해지려 노력해야죠. 이런 것들이 무거운 일로 치부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고요, 이런 것을 자꾸 대화의 공간에 꺼내놓고 싶어요. 제가 이런 인터뷰를 하는 이유도 그거에요. 제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다면 소위 여성잡지, 월간지 인터뷰를 하겠죠. 그런 것 잘하시는 분 많으시잖아요.”

어깨 둘렀던 기억만으로 연대는 힘들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는 상투적인 질문을 보냈다. 놀랍게도 그는 <참여와혁신>의 독자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금껏 이렇게 구체적인 ‘마지막 말씀’을 전한 인터뷰이는 많지 않았다.

“타임오프제로 노조 전임자 입지가 너무 좁아져서, 정말 어려우실 겁니다. 그간 현장에서 수많은 고민들을 해오셨겠지요. 결국은 함께 연대하지 않으면 다 같이 망한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아요. 전임자 임금 문제도 과거부터 덩치 큰 노조가 비정규직 노조에 대해 좀 더 열린 자세로 접근했다면 이렇게까지 닥쳐오지는 않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결국엔 이렇게 닥쳐오지 않았습니까. 기업의 최대 선이 이익이라고 한다면 노동조합의 최선은 조합원의 이익을 우선하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이라는 곳은 노동자들이 언제 어디로 쫓겨날지 모르는 굉장히 연약한 공간이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측면에서의 노조 활동이 실제적으로 조합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되리라고 봅니다. 앞으로 더욱 어려운 시기가 올텐데 자본 앞에서 긴 호흡을 가지기 위해서는 함께 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해요. 함께 어깨 둘렀던 기억만으로는 이제 이 사회가 연대를 유지하기 힘들어요. 하지만 즐거웠던 기억은 연대의 틀이 굉장히 길다고 생각해요. 어렵게 이야기했지만 힘들어도 재미있게 이끌어가야 우리 모두 더 오래 힘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는 거리에 나서는 것을 즐기고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 뿐 아니라 어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한다. 그 자리에서 사회를 보는 것이 즐거워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참여의 방식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그는 촛불 속에 섰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제에서, 5·18 기념식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그 단상 위에서 수십만 개의 촛불을 바라보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는 생각은 들어요. 하지만 그 상황을 즐길 수는 없지요. 올해는 4·19 50주년, 광주 30주년, 6·15 공동선언 10주년이죠. 엄혹한 시기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 안타깝네요.”

힘들었던 인터뷰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그가 첫 인사를 건네며 가리켰던 하늘을 그제서야 바라볼 수 있었다. 정말 눈이 부시게 푸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