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체를 알 수 없는 얼굴과의 대화
형체를 알 수 없는 얼굴과의 대화
  • 안형진 기자
  • 승인 2010.06.0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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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형진 hjahn@laborplus.co.kr
아마도 스무살이었던 2000년으로 기억합니다. 광주에 사시는 당숙 댁을 찾아갔던 날, 당숙께서는 저를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데려가셨습니다. 동행하신 아버지는 “20년 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게 간다”고 짧게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것이 1980년 광주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안 것은 보다 나중의 일입니다.

아무 영문도 모른채 망월동 곳곳을 산책하듯 둘러보던 저는 지하에 마련된 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가 그야말로 정신이 나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그곳엔 1980년 광주에서 산화한 이들의 주검이 찍힌 사진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칼에 찔리고, 총에 맞고, 옷이 벗겨진 채 거리에 나뒹굴던 수많은 주검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그 중 저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 준 사진은 무엇인가 무거운 것에 깔린 듯 짓이겨진 얼굴의 사진이었습니다. 이후로도 그 얼굴은 1980년의 광주를 떠올릴 때마다 저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너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나의 죽음을 잊고 살아가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10년 뒤 5월, 저는 다시 광주를 찾아갔습니다. 그때의 사진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너무나 ‘적나라했던’ 그 사진들에 대해 일각에서 문제를 제기했을 것입니다.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그곳은 ‘어린이들을 위한 5·18 체험관’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몇몇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1980년의 광주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스무 살에 보았던 그 형체를 알 수 없는 얼굴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아 저에게 말을 걸어오곤 합니다. 당시의 ‘적나라한’ 사진들이 치워진 것은 옳은 선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1980년 광주의 기억마저 모두의 가슴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방아타령’이 울려 퍼진 오늘의 망월동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그 얼굴을 가슴 깊이 떠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