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고 난 후
연극이 끝나고 난 후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0.06.2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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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유에 관하여

▲ 박종훈 jhpark@laborplus.co.kr
대학시절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순전히 남자배우가 부족했던 탓에 딱 한번 주연으로 무대에 섰던 경험이 있습니다. 관객이래봤자 대부분 친구들이었던 보잘 것 없는 무대였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긴장을 많이 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무대에 서는 것을 즐긴다'고 말하는 배우들이 새삼 존경스러워 보일 정도였지요. 

마침 유난히 주연배우의 독백이 많은 작품을 무대에 올렸기 때문에, 내내 '대사를 잊어버리면 큰일이다'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습니다. 막이 오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지는 악몽에도 시달렸고요. 무대에서 처음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데다가 수 페이지에 달하는 긴 대사를 버벅거리지 않고 읊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연극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났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날 정도였습니다.

막이 내리자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 대기실에서 기절하듯 한숨 자고 나서야 정신을 추스려 뒤풀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이틀이 더 지나자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뭔가가 끝났다는 마음 속 허탈함이 날마다 점점 자라서 한동안 연극반에 발길을 끊기도 했습니다.

얼만큼 내공을 길러야 여유로울 수 있을지

긴장된 순간이 지나가고 나서야 아쉬운 부분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좀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을텐데. 더 섬세하게 표현했어야 하는 건데. '다들 아마추어끼리 지나간 공연 신경쓰지 말자'며 굳이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자랐던 부분들을 생각하니 스스로 몹시 부끄러워져 한동안 자기비하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살다보면 '매사 여유를 갖고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조언을 종종 듣게됩니다만, 막상 긴박한 순간이 다가오면 어쩔 수 없이 허둥대게 됩니다. 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초짜 기자 티를 팍팍 내느라고 뭔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것도 아니면서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마음에 여유를 갖고 살펴봤으면 실수를 줄일 수 있었을텐데. 더 '좋은' 기사를 '빠르게' 작성할 수 있었을텐데. 모자란 부분들을 생각하니 몹시 부끄럽습니다.

축제가 끝나면 엄습하는 허탈함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 때문에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입니다. 한국팀의 새벽 경기가 있었던 날은 동네가 다 들썩여 자다깨다를 반복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가 필요하다는 말이 우스개소리가 아닌 듯 합니다.

축구 소식 이외의 뉴스를 찾아보려면 몇 페이지를 더 넘겨야 되니 성가실 지경입니다. 한국팀의 경기가 끝나기 까지는 어지간히 큰 사건이 아니고선 화제가 되기 어려운 분위기입니다. 축제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사람들은 다시 무기력증과 허탈함, 더위와 피로 속에 하루하루 살아갈 것입니다. ‘월드컵 후유증’, ‘허탈 증후군’이라는 말이 돌만큼 생각보다 축제 이후 사람들은 육체적 감정적 기복이 큰가봅니다.

초짜 기자의 눈에도 7월에는 노사관계의 시급한 현안이 산적해 보입니다. 타임오프 시행과 관련해 노동계와 사용자측 모두 큰 혼란이 예상되는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의 의사가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어쩌면 월드컵이 끝나고 허탈함에 빠진 사람들에겐 어느 쪽의 목소리도 귀에 안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찾아오고 휴가철이니 뭐니 지내다보면 더욱 그렇겠지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여유

연극이 끝나고 난 후, 허탈함에 연극반으로 발길이 뜸해지자 친구가 이런 핀잔을 줬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궁하면 고작 연극 끝난 걸로 허탈해하냐.”

인터넷으로 월드컵 후유증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읽어봐도 심신이 편안하도록 여유를 가지라는 조언이 많습니다. 속으로 ‘말은 쉽지’라며 발끈하기도 하지만 들을수록 맞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입사한지 얼마 안돼 선배 기자가 이런 얘기를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분명 너는 지금보다 점점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거다. 하지만 네가 하기에 따라 지금보다 몇 배의 일도 훨씬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마 맡은 일 뿐만 아니라 앞뒤 정황이나 큰 흐름도 챙길 여유가 생길 것이다.”

생각 같아선 비전의 영약이라도 꿀꺽 삼키고 하루아침에 수 갑자 내공이 늘었으면 싶지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왠만해선 ‘없을’꺼라고. 

박종훈의 테아트룸(Theatrum) 

테아트룸(Theatrum)은 라틴어로 극장을 의미한다. '극장'은 모든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