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펙’ 쌓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는 ‘스펙’ 쌓는 기계가 아니다”
  • 배민정 기자
  • 승인 2010.06.25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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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구직자, 정부 차원의 고용서비스 제도 강화 요구
지원자격 요건 때문에 전문대 졸업생 이력서도 못 내

▲ 25일 오전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임태희 노동부 장관(건너편 오른쪽에서 두번째)이 취업을 준비 중인 대학생들과 '청년이 보는 실업 및 일자리 창출 해법'이라는 주제로 간담회를 갖고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청년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노동부가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내놓은 각종 제도들은 홍보부족 등의 이유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고, 청년들은 스펙을 쌓기 위해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경기회복에 따라 고용지표가 개선되고 있지만 청년실업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다. 지난 9일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고용률은 8년 1개월 만에 최대폭으로 증가했지만, 20대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지난해보다 오히려 0.5% 하락했다.

또 20대의 실업률은 7.6%에서 6.3%로 떨어졌지만, 실업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구직단념자가 전년 대비 51.7% 늘어난 22만9천명에 달해 실제 고용상황은 악화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이 생각하는 고용 창출 방안을 듣고자 노동부 임태희 장관은 25일 오전 신촌 민들레영토에서 취업준비생 및 창업·창직준비생 10명과 간담회를 가졌다. 참가자들은 ‘스펙’을 쌓느라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보내게 되는 현 구조에 대해 비판하며 ▲ 노동부의 고용지원제도 홍보 강화 ▲ 특기·적성 교육프로그램 마련 ▲ 학력 등 취업 지원 자격 철폐 등을 요구했다.

노동부 고용지원제도 홍보 부족해

청년실업 문제가 장기화되면서 노동부에서 ‘워크넷’, ‘잡영’과 같은 취업포털 사이트와 ‘취업전담관’, ‘창업전담관’ 등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지만, 정작 홍보가 부족해 학생들의 접근이 활발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대학교 취업동아리 KCCP 대표 임채용(경기대학교 관광대학 4학년) 씨는 “학생들이 이름을 들어본 대기업에 대한 정보는 많이 알고 있어도, 내실 있는 중소기업에 대한 관심을 떨어진다”며 “이는 취업정보의 대부분을 채용포털사이트에서 얻기 때문이다. 작지만 내실 있는 중소기업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루트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노동부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 ‘취업지원관’ 제도에 대해 이채아(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대학 4학년) 씨는 “기업에 대해 잘 아는 취업지원관에게 모의면접을 보고, 직접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고 밝히며 “그러나 아직 많은 학생들이 이런 제도에 대해 모르는 것이 현실”이라 덧붙였다.

학생들, 적성보다는 ‘스펙’으로 직업 선택

‘스펙’을 쌓기 위해 학창시절 대부분을 보내게 되는 현 상황에 대한 불만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TOEIC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기업들의 상반기 공채가 이어지는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TOEIC에 응시한 수험자는 총 692,353명으로 전년 동 기간(667,788명)보다 3.5%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2009년 정기 TOEIC 시험 응시 목적을 보면 전체 응시자 중 41.8%가 취업을 위해 응시했다고 대답했다.

명지대학교 대학신문 편집장 이재희(명지대학교 사학과 2학년) 씨는 “학교 내에서 설문조사를 했을 때 학생들 대부분이 ‘취직에 필요한 토익점수와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라 답했다”며 “학생 대부분이 적성보다는 ‘스펙’을 고려해 직업을 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임채용 씨는 “‘스펙’은 기계의 성능을 가리키는 말이지, 인간을 칭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인간을 하나의 소모품으로 인식하는 ‘스펙’이라는 단어를 포함해 ‘이태백’, ‘88만원세대’ 등의 말이 유행하는 것은 현재 대학생들이 체감하는 고용상황이 상당히 부정적이라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또 “취업 직전까지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친구들이 많다”며 중고교생부터 특기·적성을 알 수 있는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 마련을 주문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기성세대도 할 말은 있다는 입장이다. 사회를 맡은 건양대학교 박찬수 취업전담교수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대학도 변해야 한다”며 “컴퓨터, 외국어 등은 앞으로 사회활동에 필요한 능력이고, 대학에서도 이를 공부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야 하는 젊은이들이 ‘스펙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라 일갈했다.

또한 “워크넷 사이트에 가면 적성, 가치관, 흥미 등에 관련된 검사를 무료로 할 수 있다”며 “검색 한 번이면 되는데 본인들이 발로 뛰는 노력이 부족한 것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전문대학 졸업생, 월급은 적고 근무시간은 많아

2년제 대학 졸업생에 대한 사회적 차별도 청년들이 구직시장으로 나서는 데 족쇄가 되고 있다. 서동선(인덕대학 방송영상미디어과 3학년) 씨는 “2년제 대학이 4년제보다 실무 중심으로 교육을 받는데, 정작 큰 기업에서 지원 자격조차 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토로했다.

2009년 노동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5세~29세까지 전문대학을 졸업한 이들의 월급총액(1,628,803원)은 대졸이상의 월급총액(1,956,965원)보다 30만원 이상 적었다. 반면 총 근로시간은 오히려 전문대학 졸업생이 10시간 많았다(전문대졸 192.4, 대졸이상 182.8).  

서동선 씨는 “3년 전 외주제작사에 들어간 선배는 그때 월급이 80만원이었는데,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80만원을 받고 있다”며 “인사담당관이 이력서의 학벌부터 보는 현실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소리높였다.

중소기업 취직이 ‘눈높이 낮추는 것’은 아니다

청년들이 중소기업 취직을 외면하고 대기업만 바라보는 행동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지만, 정작 ‘중소기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부정적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배지훈(숭실대학교 졸업) 씨는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청년실업자들이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라고 조언했는데, 중소기업에 가는 사람도 나름대로 결단을 내리고, 미래를 바라보며 취직한 것인데 왜 ‘눈높이를 낮췄다’고 표현하나. 이것은 ‘중소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반증”이라 꼬집었다.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은  임 장관은 “오늘 건의된 내용 중 즉시 조처할 수 있는 것은 즉각 시행하고, 향후의 정책에 반영할 것”이라 답했다. 또 “취업지원센터 등에 대한 홍보를 강화해 보다 가까이 청년들에게 다가가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앞으로 청년들에게 중소기업 취직을 권하며 ‘눈높이를 낮추라’라는 표현은 절대 쓰지 않겠다”며 “이명박 대통령도 훨씬 큰 기업에 갈 수 있었음에도 당시 100명 규모인 현대기업에 들어가 결국 직원 13만명에 이르는 기업으로 키워냈다”고 청년들을 독려했다.

아울러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 근로 윤리가 약해진 것 같다. 일을 생활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말고, 일 자체가 생활의 목표가 되도록 해야 한다”며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라”고 청년들의 분발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