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의 완장, 우리의 완장
저들의 완장, 우리의 완장
  • 하승립 기자
  • 승인 2010.06.2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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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하거나 혹은 책임지거나

▲ 하승립 lipha@laborplus.co.kr
월드컵은 끝나지 않았으나, (우리의) 월드컵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 이들은 ‘지금부터가 진짜 월드컵’이라며 명승부를 즐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은 ‘아직도 월드컵 이야기’라며 불만입니다. 그 외의 많은 이들에게 한국 대표팀의 경기가 없는 월드컵은 더 이상 월드컵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2002년 이후 가장 박진감 넘치는 ‘경기다운 경기’를 했다는 우루과이전이 끝나고, 이제 한국 축구 대표팀은 다시 4년 후를 기약해야 합니다. 광장을 메우고, 아파트 단지를 떠들썩하게 했던 축제도 막을 내렸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경기는 끝난 후 남은 것은 누가 잘 했느니, 누구는 못 했느니 하는 품평들입니다. 내일을 위해서는 어제와 오늘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대책 마련이 필요하겠지만, 다만 지금은 잠시나마 죽을 힘을 다한 그들에게 박수를 보낼 때입니다.

박지성의 아름다운 완장

이번 대회 기간 동안 ‘역시 큰 물에서 놀아 본’ 선수들은 다르다는 얘기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공격을 책임지면서 주장의 역할을 맡았던 박지성 선수와, 그라운드에서 뛴 선수들 중 최고참으로 수비를 진두지휘 한 이영표 선수의 투혼은 축구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아름답게 비쳐졌습니다.

숱한 경험이 그들의 생각도 키웠을까요. 이 두 선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사람들의 가슴에 와서 박혔습니다.

주장 박지성 선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흔히 동료가 자리를 비우고 공격에 가담할 때 그 자리를 메워주는 것을 ‘돕는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건 돕는 것도, 희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본인이 반드시 해내야하는 일이다.”

조직에 몸담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책임감과 팀 플레이, 그리고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굳이 다시 되새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캡틴’은 이 덕목을 너무나도 적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이번 월드컵 마지막 경기가 끝난 후, 이영표 선수는 우루과이 수아레스 선수의 선제골에 대해 “내 실수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내가 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월드컵을 모두 즐겼다. 부족하지만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역할에서 최선을 다한 것 같다. 다음 세대가 8강 이상의 목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음 월드컵에서도 즐길 수 있게 4년 간 많은 준비를 했으면 좋겠다.”

그랬습니다. 그는 경기를 즐겼고, 자신의 세대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역할을 해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결국 이뤄냈습니다.

박지성의 팔뚝에 찬 주장 완장이 아름다운 이유는 책임지는 리더십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추악한 완장

우리 사회에는 또다른 ‘완장’들이 있습니다. 바로 권력이라는 완장입니다. 그런데 완장을 찬 이들의 태도는 책임감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자신들의 역할에 대한 자각도 보이지 않고, 그러니 당연히 그 역할을 하기 위한 노력 또한 없습니다.

문화와 체육을 관장하는 부처의 수장은 카메라 앞에서 쌍욕을 하고, 자신을 패러디의 대상으로 삼은 네티즌을 고소하고, 문화예술계의 편을 가르고,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모든 것이 대통령 덕분’이라는 엉뚱한 공치사를 늘어놓습니다.

국방을 관장하는 부처의 수장은 우리의 영토 안에서 우리의 젊은 군인들이 수십 명이나 목숨을 잃은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계속 말을 바꾸면서 대처가 잘 되었다는 뚱딴지 같은 대답을 내놓고, 의원들의 질의를 비아냥거립니다.

국민의 권익을 위한다는 위원회의 수장은 권력 실세답게 국회에서 호통을 선보이더니 선거 출마 준비로 바쁘다는 얘기가 들립니다.

윤흥길이 쓴 <완장>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동네 건달로 지내다가 저수지 관리원이 돼 ‘완장’을 차게 된 종술이 점점 완장의 힘에 빠져들게 되면서 마을 주민들을 괴롭히더니 급기야 자신을 고용한 사장에게까지 행패를 부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소설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죄인이라는 증거다. 집안 어르신을 돌아가시게 맨든 죄를 만천하에 자복허는 뜻으로다가 사람들은 상장을 둘렀다. 죄인이 부정을 멀리허고 매사에 근신허게코롬 상장을 둘리워서 일반인들허고 확연허니 구분을 지었다. 본시 우리가 조상님네로부터 물려받은 완장은 이렇게 미풍양속에서 시작된 것이니라.”

교장 선생은 말을 멈추고 잔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구태여 그것을 함께 마시지 않더라도 종술은 엔간히 입맛이 쓴 판이었다.

“완장도 여러 질이지요.”
“니 말이 맞다. 완장도 완장 나름인 벱인디, 니가 시방 차고앉었는 그것은 말허자면 왜놈들 찌끄레기니라.”


더 많은 이영표를, 더 많은 박지성의 완장을 원하는 것이 아직은 지나친 욕심일까요? 우리 대표팀의 월드컵 경기가 끝난 안타까움보다, 월드컵은커녕 지역 예선에서 뛸 수준도 안 되는 이 나라 권력자들의 모습이 한심해서 슬픈 그런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