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회가 문제라고?
일진회가 문제라고?
  • 김종휘 하자작업장학교 교사
  • 승인 200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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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는 두려움이 부른 나쁜 연대
‘일진회’는 왕따 문화 속에 자라난 나무

김종휘
하자 작업장학교 교사
요즘 신문 방송을 보면 일진회가 마치 청소년 문제의 모든 것인 양, 그 이야기만 하고 있더군요. 문제가 생겼을 때 오직 그것만 쳐다보고 현상으로 드러난 문제의 부위만 도려내는 식으로 접근하면 당장은 깨끗하게 해결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금새 재발하지요. 꼭 외과 수술하듯 하는 겁니다. 문제의 뿌리와 주변까지 함께 사고하고 종합적인 접근을 한다면, 때로는 문제의 부위를 일단 내버려둔 채 다른 데부터 고쳐나가는 식의 접근이 나옵니다.


일진회는 왕따 문제가 학교에 퍼져나갈 때 이미 비롯된 것이지요. 제 생각에는 교실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왕따 문제를 고치지 못하는 한 일진회 문제를 바로잡을 수가 없지 싶습니다. 왜냐하면 일진회든 왕따든 공통점은 사람이 사람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그 두려움으로 인해 자기 의지와 반대로 굽신거리고 눈치보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교육 최대의 적이 두려움이라고 할 때 왕따는 바로 두려움을 배우는 원체험의 산실이지요.


일진회를 통한 육체적 폭력과 정신적 모독의 문제 이면에는 교실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왕따를 통해 일찍부터 두려움을 체험하고 학습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보다 체계적이고 외형적인 폭력으로 다가오는 일진회 앞에서 미리 익혀둔 회피와 굴복의 생존술에 의존하게 되지요. 한마디로 일진회는 학교에 널린 왕따 문화의 자양분을 먹으며 너무나 손쉽게 쑥쑥 커버린 나무라고 할 수 있지요.

 

우월감과 과시욕이 부르는 폭력


왕따가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지요. 왕따의 첫째 요인은 자신의 우월감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아이는 자신의 힘을 도움과 돌봄의 방법으로 발휘하는 것을 모르거나 배우지 못해서 남들을 제압하고 정복하는 오락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이런 아이의 특징은 누군가 한 아이를 찍어서 본보기를 보인다는 점이지요. 여러 명을 같이 괴롭히지 못합니다. 한 명만 굴복시키면 그것을 지켜본 다른 아이들도 굴복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왕따의 둘째 요인은 그것을 지켜보다가 적극적으로 거들게 되는 마음입니다. 힘을 가진 아이에게 가담하는 것은 사실 두려움의 한 표현이지요. 자신도 언젠가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작동해서 “그럴 바에야 나도 괴롭히는 사람이 되자”는 판단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되면 때로는 왕따를 시작한 첫 번째 아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괴롭히고 더 주도적으로 나쁜 상황을 끌고 가는 자리에 서지요. 


왕따의 셋째 요인은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침묵의 마음입니다. 왕따든 일진회든 연출하고 즐기는 것이기에 구경꾼이 있어야 하지요. 잘하면 박수라도 보내겠지만, 이 두려움의 게임에는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는 모면과 도피의 방관자 자리가 생겨납니다. 잘못된 것을 지켜보면서도 말하지 않는 경험은 피해자가 내가 아니기 때문에 괜찮다는, 더 나아가 피해자가 빌미를 제공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를 꼭 만들게 됩니다.


왕따의 마지막 요인은 왕따를 당해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마음이지요. 괴롭힘을 당해서 굴복을 했는데도 반복되는 왕따에 이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무엇보다 왕따를 당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없고, 이유라 해도 정말 보잘 것 없는 이유이기 때문에, 왕따를 당한 아이는 자신을 저주하게 되지요. 스스로 납득할 수 없고 자신의 힘으로 개선할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연대의 위대함’을 가르치자


왕따를 시작하는 한 아이 앞에 세 명의 아이가 두려움에 떨며 각기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배역을 맡으면서 한 편의 나쁜 연극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누군가를 괴롭혀서 우월감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은 그것을 반대하고 꾸짖는 마음 두 개만 힘을 합쳐도 꼼짝 하지 못합니다. 앞에서 말했듯 그 어떤 아이도 동시에 두 명을 왕따 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여럿이 반대하는 분위기에서는 더더욱 기를 펴지 못하니까요.


달리 말해서 우리의 교육은 현재 잘못된 것을 보았을 때 누구라도 먼저 “그것은 잘못이며 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이 나도 공감한다며 한 마디 거드는 연대의 위대함을 가르치지 않고 있는 거지요. 각자는 공부 기계이고 모두가 경쟁 상대라서 서로를 거들떠보지 않고 있습니다. 이때 누군가 왕따를 시작하면 순식간에 두려움이 퍼지고 모두가 기회주의자나 방관주의자나 자기혐오의 함정에 빠져 피해자가 됩니다.


우리 학교에서도 최근 신입생들 사이에 비슷한 문제가 있었답니다. 누군가 한 아이를 지목해서 “싸가지가 없다”고 한 모양이고 “그래그래” 하는 공감이 이뤄지자 곧장 그 아이를 불러서 야단친다는 것이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손짓하고 주먹질하고 무릎 꿇게 만들고 한 겁니다. 다행히도 이 사실이 즉각 알려져서 학교에서는 곧장 폭력에 가담한 아이들에게 사과하게 하고 봉사하게 하고 불이익을 주었지요.

 

두려움을 없애는 교육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왕따 문제는 발견되는 즉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학교에서 평화를 열 번 가르치는 것보다 한 번의 왕따 상황이 생겼을 때 그 사례를 가지고 두려움에서 시작된 나쁜 연대를 바로잡는 경험을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두려움은 한 번 전염되면 치유가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요. 어떤 공간, 어떤 모임 안에서는 그것이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획되고 연출되는 평화의 울타리 안에서 왕따를 시작하는 아이의 마음도 바로잡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아이의 과시욕은 실은 자신 내부의 자아 문제를 외부로 돌리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돕고 돌보는 경험을 교사와 같이 해보면서 자신의 마음 이야기를 꺼내는 계기를 만들어주면 서서히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어 있지요. 두려움은 누군가 한 사람만 떨치고 일어나도 너무나 손쉽게 깨지는 것이니까요.


일진회 문제도 실은 그렇게 해서 똘똘 뭉친 두려움들의 나쁜 연대입니다. 나쁜 연대를 해체하고 흩어놓는 일은 쉽지만, 두려움을 없애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없애는 일을 하지 않고서는 교육이라는 말을 쓸 이유도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