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를 지키기 위한 외침
고요를 지키기 위한 외침
  • 배민정 기자
  • 승인 2010.06.30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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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바라보는’ ‘어딘가’에 대한 단상
▲ 배민정 mjbae@laborplus.co.kr

시끄러운 건 질색이다, 그렇게 주장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요즘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사람들, 팔뚝을 들어 올리며 구호를 외치는 모습, 방패를 들고 막아서는 경찰들. 기자로 일하기 전까지는 정적 속에서, 텔레비전도 안 보고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고, 오직 책 위로 흘러가는 문장들만 바라보며 살았던 저에게는 모든 것이 생소한 모습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처음으로 들어봤다면 말 다했죠 뭐. 때로는 지나치게 핏대를 세워 소리치기 때문에 정작 내용은 잘 들리지 않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생각합니다.

지난 6월 23일, 종로 거리에서 민주노총 결의대회가 있었습니다. 4000여명의 경찰이 출동해 봉쇄와 해산을 반복하며 시위대와 숨바꼭질을 벌였습니다. 날은 무더웠습니다. 사람들의 겨드랑이가 젖어 들어갔습니다. 경찰들은 헬맷의 창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태양이 4000개의 창을 눈부신 막으로 덮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두 개의 확성기가 각각 불법시위를 해산하라고, 폭력 경찰은 물러가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수첩을 들고 서서, 또다시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지 곱씹었습니다.

타임오프 철회와 최저임금 인상 등 그날 민주노총 측에서 요구한 바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보다 궁금한 것은 이들을 계속해서 거리로 나서게 하는 동력입니다. 또한 끊임없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이루고자하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질문은 되돌아와 내 자신은 왜 그날 종로 거리에 있었던 건지 묻게 됩니다. 저는 왜 기자가 되기로, 그것도 <참여와혁신>의 기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걸까요.

다음 날 아침,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습니다. 아직도 어스름에 싸여 있는 주방을 보며 잠깐 서 있었습니다. 희미하게 드러나는 사물들, 냉장고와 전자렌지를 덮은 푸른 색체를 바라봤습니다. 하루 중에 어느 시간보다 이때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급하게 불을 켜고 싶지 않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맑은 정적에 싸여 있었습니다. 저는 전날의 모든 열변이, 태양 아래 소리친 구호들이, 모두 이런 시간을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누군가가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는 시간. 아무런 걱정도 없고 위협도 없이, 조용히 새벽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잠깐의 순간 말이죠.

꼭 새벽을 예로 들지 않아도 좋습니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사람들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어딘가를 바라볼 때가 있겠지요. 남녀노소, 부자와 가난한 이, 살인자부터 수녀님까지 가끔씩은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볼 겁니다. 언젠가 동물원에 갔을 때 만난 낙타도 그렇게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얼굴은 태어나서 죽는 모든 존재가 가진 표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취재를 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일이 끝난 후에도 손을 씻을 데가 없어 버스 손잡이를 잡기 부끄럽다”고 말하는 환경미화원, “임금은 100만원인데 밤 10시가 돼도 일이 끝나지 않는다”고 토로하는 유치원 선생님, “취업 스트레스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벌떡 깬다”고 하소연하는 대학생들을.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이 무섭다고 말했습니다. 공포를 호소하는 목소리 앞에서는 새벽의 거리와 차창을 바라보는 시간마저 사치로 여겨졌습니다.

시끄러운 건 질색이다, 그렇게 말했던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큰 소리가 소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최저임금을 인상하라”
“교사와 공무원에 대한 부당한 징계를 철회하라”
“환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의료민영화를 반대한다”
어떤 외침들은 역설적으로 타인의 고요를 지켜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저는 오늘도 흔들거리는 버스에서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람들은 어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정오의 거리를, 먼 바다를 바라보듯 응시하고 있습니다. 입을 꾹 다문 사람들의 얼굴은 느닷없이 존엄해보였습니다. 각자의 마음속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사람들은 모두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시간을 위해 그토록 많은 투쟁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싸움에 동참하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사회에 처음 나와 아직 갈피를 못 잡는 햇병아리 기자, 이렇게 인사를 드립니다.

 

배민정의 타인 

 한 사람과의 만남, 그것은 한 개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경계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 E. 레비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