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간의 낮잠, 경주는 끝났다
13년간의 낮잠, 경주는 끝났다
  • 정우성 기자
  • 승인 2010.07.0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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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 우왕좌왕하던 사이 게임 셋!
실리와 이념의 부적절한 관계
Special Reports 반성과 도약…① 지금이 반성할 시기

2010년 1월 1일 새벽, 타임오프제와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를 주 내용으로 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일부개정안’이 야당의 반대에도 여당인 한나라당 의원들만의 투표로 통과돼 지난 13년간 한국 노사관계의 해묵은 논쟁인 전임자·복수노조 문제가 일단락됐다.

이후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의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한도 결정, 노동부의 타임오프 매뉴얼 등이 연달아 발표되면서 시행일인 7월 1일을 앞두고 현장은 혼란에 빠졌다. 노동계는 정부와 경영계가 노동조합을 말살하려는 음모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현재의 상황을 초래한 것은 어쩌면 노동계 스스로가 아닐까? 

2010년 1월 1일 새벽, 타임오프제와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를 주 내용으로 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일부개정안’이 야당의 반대에도 여당인 한나라당 의원들만의 투표로 통과돼 지난 13년간 한국 노사관계의 해묵은 논쟁인 전임자·복수노조 문제가 일단락됐다. 이후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의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한도 결정, 노동부의 타임오프 매뉴얼 등이 연달아 발표되면서 시행일인 7월 1일을 앞두고 현장은 혼란에 빠졌다. 노동계는 정부와 경영계가 노동조합을 말살하려는 음모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현재의 상황을 초래한 것은 어쩌면 노동계 스스로가 아닐까? 

토끼와 거북이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에 스스로 안주하는 순간 그 자리에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 후퇴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보여주는 우화가 바로 토끼와 거북이 우화다. 노동계도 마찬가지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노동운동은 약 20년간의 절정기를 맞는다. 1986년 말 2,675개였던 한국의 노동조합 수는 1987년에 한 해 동안 1,361개 노조가 새로 만들어져 1987년 말에는 4,931개로 증가했다.

이런 폭발적인 증가세는 1989년까지 이어져, 1989년 말 노조 수는 7,883개로 늘어났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불과 3년 사이에 노조 수가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그동안 이름뿐이던 노조에서 민주화 추진세력이 새 집행부를 구성하기도 했다.

그에 따라 임금과 근로조건이 1987년을 거치며 급격하게 향상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또한 학생운동 출신의 위장취업자들이 노동운동을 주도하던 시기를 점차 벗어나 이제 노동조합 내에서 자생적인 활동가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하며 노동조합은 단위 사업장을 넘어 사회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후 1995년 민주노총 건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등 노동계는 한국사회의 주요 이슈메이커로서 자리 잡았다. 이는 그동안 정부와 경영계에 억눌렸던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각성을 통해 노동자들도 사회 구성의 한 파트너란 사실을 인식하고 실천한 결과다.

그러나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1997년, IMF 경제위기와 더불어 정리해고 법제화, 변형시간근로제 도입,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 허용이 포함된 노조법이 개정되며 이후 노동계와 경영계, 정부가 만든 13년간의 지루한 싸움은 시작됐다. 마땅한 대안이나 커다란 투쟁을 만들지 못한 노동계는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허용에 대해 2차례의 5년 유예와 1차례의 3년 유예를 통한 시간 끌기 작전으로 연명했다. 한마디로 낮잠을 자버린 형국이다.

열심히 뛰던 토끼는 사회적 영향력이 커졌다고, 임금이 크게 상승했다고, 민주화가 됐다고 잠시 쉬기 시작하더니, 앉아서 지켜보다 누워 자버린 꼴이됐다. 그새 노동계의 승천에 놀라 수세적 방어에 열중하던 정부와 경영계는 IMF사태와 경제 불황이란 조건에 힘입어 노사관계 선진화 로드맵 등을 내세우며 노동계를 서서히 압박했다. 토끼를 따라잡은 거북이가 된 것이다.

승부는 예전에 끝났다

유예된 13년 동안 노동계의 대응은 ‘준비 없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유예기간 만료 시점이 다가오면 노사정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각자의 입장을 내세우기 바빴지만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노사정의 합의가 무산되면 노조법은 또다시 그 시행이 유예됐다. 단지 그때뿐이었다. 유예된 기간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유예기간 만료 시점이 다가오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다시 유예시키면 될 일이었다. 이번에도 일부 노동계 인사들은 “또 다시 유예되지 않겠어?”라며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잘 나간다던 토끼는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졌다.

노동계 입장에서야 투쟁의 산물이자 노사 교섭의 결과인 전임자 임금지급 문제를 법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대응할 가치가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를 철폐하기 위한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한 것도, 노조 재정 자립을 위한 방안이나 대체할 수 있는 정책을 생산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올해와 같이 노사정 간 힘의 균형추가 무너진 상황에서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눈여겨볼 지점은 정리해고 합법화를 막기 위한 1996년 노조법 개정 투쟁과는 양상이 달랐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현장의 참여, 즉 조합원의 참여는 물론이고 시민들의 참여가 폭발적이었던 당시와 달리 이번 노조법 개정 과정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정리해고가 개별적 노동자에 관계된 것이고 전임자·복수노조 문제는 집단적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노동조합과 활동가들에 대한 조합원과 시민들의 지지가 지속적으로 떨어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한 노동계 관계자는 “현장에서의 관심도가 많이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라며 “간부들 중에서도 ‘우리 월급 때문에 싸워야 하나’라는 소리가 있었을 정도로, 주위의 반응은 반대를 넘어 무관심에 가까웠다”고 고백했다. 1987년 이후 노동조합운동 10년의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전투적 실리주의’의 명암

도대체, 왜 13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까? 13년 동안 노동계는 무엇을 했을까?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노동조합은 이익단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합원의 임금 인상과 복지 향상을 위한 노력은 노동조합의 가장 기본적 활동이다. 1987년 이후 한국의 노동조합은 이러한 활동에 충실했다. 그리고 성과도 꽤 좋았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의 노동조합이 갖고 있는 ‘한국적’ 특성이다. 한국에서 노동조합은 민주화의 상징이며 사회적 억압에 저항하는 표지석과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국민이나 조합원이 노동계에 바라는 것은 단순한 임금 인상과 복지향상 그 이상이었다. 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진보적 정책 생산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조직적 능력이 한국의 노동조합에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13년 동안 이러한 활동이 매우 퇴색했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양극화됐다는 표현이 맞겠다. 조합원의 실리추구와 활동가 집단의 운동적 성향이 매치되지 않는 현상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조합원들은 노조를 통해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이라는 성과를 경험했고, 이로 인해 노조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더욱 강조해 선명성 경쟁을 부추겼다.

그런데 이러한 선명성 경쟁이 ‘선거’라는 구도와 얽히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노조의 집행을 담당하게 된 활동가들은 다음 선거에서 조합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더욱 더 높은 임금, 더욱 나은 근로조건을 조합원들에게 약속했고, 회사로부터 더 많은 실리를 얻어내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더 많은 실리를 얻기 위해 그들은 회사와의 담합이라는 위험한 줄타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업장의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는 오히려 조합원들의 표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뿐이었다. 연대는 단지 구호로만 존재하는 문제였을 따름이다. 과도한 선명성 경쟁은 극단적인 실리주의를 불러왔고, 한국적인 독특함이겠지만 ‘전투적 실리주의’라는, 어쩌면 이율배반적인 단어의 조합이 가능하게 했다.

이런 가운데 노동조합의 미래, 혹은 노동운동의 미래와 같은 장기적 전망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었다. 1997년 노동법 개정으로 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됐지만 해당 조항의 시행이 계속 유예되면서 그 문제는 당장 조합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활동가들에겐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왜 이번 노조법 개정 과정에서 현장과 시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없었을까? 바로 이러한 노동조합 활동의 흐름에 기인한다. 이번 노조법 개정이 향후 노동조합 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예상하고 준비했었느냐는 반성이 따라야 한다.

“그동안 노동조합이 무엇을 했는가? 임금 인상이 안 되면 집행부가 갈리고, 이를 염려한 집행부는 회사와의 밀착이든, 생떼를 쓰든, 파업 등 강력한 물리적 힘을 발휘하든, 어쨌든 실리를 취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동안 조합원들에게 현재에 대한 반성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장기적 전망, 그리고 이를 위한 실천을 보여주지 못한 노동조합운동은 이미 한계에 봉착해 있었고 단지 작년에 문제가 터졌을 따름”이라는 한 노동계 인사의 자괴감 섞인 고백을 귀담아 들어야 할 때다.

노동운동 위기론자들의 수많은 지적을 다시 언급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지금은 23년간의 노동조합 운동을 반성해야 할 시기다. 그리고 새로운 전망을 내세워야 할 시기다. 경주는 끝났다? 아니, 끝나지 않았다. 다음 시즌을 준비해야 한다. 비록 이번 시즌은 끝났지만 곧 다음 시즌이 시작된다. 이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