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경영혁신 활동마저 ‘혁신’해야 하나?
이제 경영혁신 활동마저 ‘혁신’해야 하나?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5.10.10 00:00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관심과 불신의 덫에 걸려 ‘왜’도 없고 ‘참여’도 없다
성공적인 경영혁신을 가로 막는 8가지 덫

‘귤화위지’(橘化爲枳). 남쪽의 귤을 기후와 풍토가 다른 북쪽으로 옮겨 심었더니 탱자가 열리더라는 고사에서 유래된 이 성어는 우리기업의 경영혁신 활동 현실을 잘 표현해 준다.
90년대 들어 많은 기업들이 앞다퉈 외국의 경영혁신 기법을 도입했고, ‘패션 경영’이라는 말을 탄생시킬 만큼 도입 기법도 유행을 탔다. 이제는 어지간한 경영혁신 기법 서너 개쯤은 택하고 있지 않은 기업이 없을 만큼 혁신 활동이 일상화됐다.
하지만 혁신 기법의 도입이 경쟁력 향상과 의도했던 성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기업도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경영혁신 활동을 혁신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혁신 활동에 대한 피로감이 높은 반면 추진 담당자들은 우수한 종자를 들여왔는데 엉뚱한 열매가 열리거나 아예 열매를 맺지 않는다며 고민하고 있다.
우리기업이 경영혁신 활동을 ‘지렛대’로 삼지 못하고 ‘혁신의 늪’에서 맴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혁신의 덫 1_ ‘왜?’가 빠진 혁신

“혁신이 대세니까…, 아니, 생존의 조건이니까?” 식품제조업체 P사 변화추진팀 김모 과장이 왜 경영혁신 기법을 도입했느냐는 질문에 한참을 망설이다 내놓은 대답이다. 경영혁신팀이 생길 때 이 팀으로 발령받아 6년째 혁신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김 과장은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봤다고 한다.

이는 비단 P사의 사례만은 아니다. 대부분 기업이 혁신의 ‘방법론’과 ‘혁신대상’에만 치중한 나머지 ‘왜’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 현실.
일선의 담당자들이 가장 큰 애로점으로 지적하고 있는 구성원의 참여 부족도 이런 과정은 생략한 채 ‘어떤 기법을 도입할까’에만 열중한 데서 나온 결과인 경우가 많다. ‘변화의 이유’가 아니라 ‘변화의 당위성’만으로 접근하는 혁신은 구성원에게 또 하나의 피로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국내 유수기업의 경영혁신 컨설팅을 담당한 A사의 한 컨설턴트는 “기법 도입 전에 기업의 현재 상태와 혁신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진단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요식절차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많은 CEO가 혁신기법을 도입한다는 전제를 먼저 세우고 혁신활동을 추진하기 때문에 ‘진단’보다는 ‘결과’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이 이 컨설턴트의 전언이다.

혁신의 덫 2_ 혁신은 ‘기법’이다?

혁신을 조직과 인적자원 개발, 의사소통, 성과·보상이 상호 연관되어서 지속적으로 변화·발전하는 하나의 ‘시스템’이 아니라 단순한 ‘기법’으로 바라보는 것도 실패 요인이다.
지난 7월 LG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0년 이후 우리기업이 도입한 혁신 기법의 대세를 이뤘던 6시그마, ERP(전사자원관리), CRM(고객관계관리) 등의 기법은 2~3년의 시차를 두고 미국의 유행을 따라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6시그마의 경우 1980년대 후반 미국 기업에 도입되어 2000년에 절정을 이루다 지금은 시들해진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이후 본격화되어서 현재까지 열기를 이어오고 있다. 90년대 말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ERP나 CRM도 우리나라에서는 2년여의 격차를 두고 유행하기 시작했다.

LG경제연구원 이병주 선임연구원은 “경영혁신 기법은 경영방식과 사업특성, 조직 문화 속에서 탄생한 하나의 시스템”이라며 “이런 총체적 환경을 무시하고 ‘기법’만을 가져와 이식하는 방식의 혁신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혁신의 덫 3_ ‘바꿔, 바꿔’ 지속성 없는 혁신

하지만 여전히 많은 경영자들이 경영혁신을 ‘기법’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기업이 도입하고 있는 혁신기법의 ‘쏠림 현상’에서 잘 드러난다.
철강업체 S사의 경우 지난 2000년 TPS(도요타생산시스템)를 도입했다가 성과가 나오지 않자 3년 만에 6시그마로 혁신 기법을 바꿨다.

화학업체 C사의 경우도 2001년 추진했던 소그룹 활동의 성과가 나오지 않자 올해 들어 다른 형식의 분임조 활동을 도입했다. 출판교육업체인 N사의 경우 지난해까지 CRM기법을 추진하다 올해 들어서는 CS를 추진하고 있다. 이 회사 경영혁신팀 원모 과장은 “사실 일반 직원들은 CRM이 뭔지, CS가 뭔지 차이조차 알지 못한다”며 “추진팀 입장에서도 너무 짧은 기간에 기법들이 바뀌다 보니 실제로 혁신 활동 때문에 어떤 성과가 나타난 건지, 다른 것 때문에 좋아진 것인지 제대로 평가해 볼 틈도 없이 새로운 기법을 익히는 데만 급급한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대다수의 기업이 ‘혁신은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말하지만 정작 기법을 운용할 때는 소위 ‘뜨는 기법’을 무차별적으로 도입했다가 ‘안 되면 말고’식으로 또 새로운 기법을 찾아 나서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혁신의 덫 4_ 단기성과에 집착하는 CEO

많은 혁신추진 담당자들은 CEO의 강력한 의지를 경영혁신의 성공 요인으로 꼽는다. 능률협회컨설팅이 264개 기업 혁신 담당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응답자의 17%가 ‘CEO의 의지 부족’을 경영혁신 성과 불만족 이유로 꼽았다. <참여와혁신>과 <경영혁신 실무연구회>가 공동으로 실시한 설문에서도 100명의 응답자 중 27%가 같은 이유를 꼽았다.

<경영혁신 실무연구회> 박천석 회장은 ‘CEO의 의지 부족’은 ‘혁신에 대한 의지’라기 보다는 ‘혁신의 성과를 끈기 있게 기다릴 수 있느냐 여부’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경영진이 혁신은 점진적이고 꾸준한 과정이라는 것을 무시한 채 가시적이고 단기적인 성과에만 매달린다는 것이다.

각 기업의 환경과 문화가 모두 다른데도 경영혁신 기법이 유행을 타는 것 또한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가시적인 성과를 좇다 보니 자사의 문제점과 환경, 조직문화에 맞는 혁신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기업에서 어떤 기법으로 성공을 봤다더라’는 막연함을 가지고 혁신 기법을 도입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혁신의 덫 5_ ‘불신’에 가로 막힌 ‘참여’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가 없는 혁신’은 담당자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 일부 기업에서는 구성원들의 참여를 위해 마련된 ‘개선제안제도’가 ‘건수 채우기’와 ‘중간관리자들의 대필’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이에 대해 현장의 작업자들은 ‘혁신 활동이 업무를 효율적으로 하게 돕기보다는 새로운 업무를 하나 더 늘리는 꼴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통신업체 P사의 영업사원 윤모씨는 “건수를 채워야 하니 아무거나 하나 써내라는 팀장들의 지시 때문에 업무와 스트레스가 배가되는 느낌”이라며 “단기적인 성과와 건수로 혁신 활동을 평가하려 든다면 누구도 즐겁게 혁신활동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 내의 뿌리 깊은 불신도 참여를 가로막는 원인이다. 화학업체 L사와 반도체업체 H사의 경우는 지난 2003년부터 6시그마 기법을 ‘전사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반쪽 추진’에 그치고 있다. 혁신 활동이 생산직을 제외한 사무직과 관리직 중심으로만 운영되고 있는 것. L사 노동조합 관계자는 “혁신 활동이 건수 위주로 진행되면서 부서 간 경쟁이나 현장 작업자들의 노동강도 강화 등과 연계 돼 조합원들의 반발이 많았다”고 전한다. L사와 같이 노동조합의 반발 또는 비협조에 부딪혀, 관리자 중심의 혁신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기업은 특히 제조업에 많이 집중돼 있다.

이 회사 인사팀 관계자는 “과거의 혁신 활동이 지나친 건수 위주나 현장 내 경쟁 유발, 현장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혁신활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신이 구조화된 편”이라며 현장 내 불신 해결이 혁신 활동의 성공 열쇠라고 제안했다.

혁신의 덫 6_ ‘정’과 ‘인관관계’에 의존한 성과 측정과 보상

성과 공유와 보상 시스템은 구성원의 동기부여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혁신이 단순한 ‘기법’으로서가 아니라 기업의 평가시스템과 보상시스템까지 연계되어 있는 하나의 ‘유기체’로 작동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기업이 벤치마킹의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의 경영혁신 기법은 대부분 통계적인 품질관리에서 출발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와 합리주의 아래서 발달한 연봉제·성과급 등 성과주의가 뿌리 내린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때문에 미국의 경영혁신 활동은 성과 측정에 많은 노력을 투입한다. 반면, IMF 이후 ‘기법’만을 도입하기에 바빴던 우리기업은 아직까지 성과 측정과 보상시스템까지 손을 뻗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우리 기업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정’과 ‘인간관계’에 의존한 평가와 보상은 통계적 평가와 보상에 근거한 외국의 혁신기법과 불협화음을 낼 수밖에 없다.
‘열심히 해도 돌아오는 게 없다’ ‘혁신활동을 통해 무엇이 좋아졌는지 알 수 없다’는 직원들의 냉소 뒤에는 ‘신식의 기법, 구식의 평가’라는 덫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경영혁신 기법 도입으로 매출상승과 직원역량 향상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가져왔다는 예치과병원의 김진명 원장은 “경영혁신운동 → 성과가시화 및 성과배분 → 구성원 동기부여 → 경영혁신운동매진’이라는 선순환의 고리를 작동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경영혁신 활동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조언했다.

혁신의 덫 7_ 가치관이 쉽게 변할 수 있다는 믿음

많은 경영자들이 지속적인 혁신을 위해서는 구성원의 마인드를 제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사람의 의식과 가치관을 바꾸는 것은 캠페인이나 의식전환 운동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회사의 조직 구성원들은 생산현장에서 기업의 정책과 태도, 기술, 노동조건 등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노동의식이 만들어지게 되고 이렇게 형성된 노동의식은 경영활동에 대한 태도도 결정짓는다. 이처럼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 신념, 규범 등은 오랜 역사와 경험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므로 단기간에 쉽게 변할 수 없다.

혁신기법 도입 시의 일회적인 교육이나 ‘마인드 제고’를 촉구하는 슬로건의 난무로 구성원의 가치와 의식을 바꾼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생산시스템이나 경영혁신기법은 사회 문화적 환경의 산물이기 때문에 의식의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 환경과 제도를 정비하지 않는 경영혁신은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

혁신의 덫 8_ 생산현장이 빠진 ‘혁신’

혁신 성공의 또 다른 열쇠는 생산현장의 자율적인 문제해결 능력이다. 우리기업의 조직·문화적 특성상 도입 초기에 경영진의 강력한 리더십이 발휘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열쇠는 생산현장이 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산현장은 엄격한 분업과 권위주의적 통제 속에서 자율적 문제해결 능력을 갖출 기회를 별로 갖지 못했다. 또, 이 속에서 형성된 대립적 노사관계는 경영혁신을 둘러싼 현장 내 갈등만을 부추겨 왔다. 현장에 경영혁신 활동에 대한 불만과 냉소가 팽배한 상태에서는 권한 위임을 해 준다고 하더라도 권한이 문제해결에 사용되기보다 서로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용도로 사용될 수밖에 없다. 특히 끊임없는 갈등관계에 놓여 있는 현장의 대의원과 관리자 간의 벽은 경영혁신 활동으로 더욱 깊어졌다. 노동조합 대의원들은 ‘관리자들이 경영혁신 활동을 통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인식에, 관리자들은 ‘노조는 기본적으로 생산성 향상에 반대하는 집단’이라는 불신에 메이게 된 것.

경영혁신을 둘러싼 생산현장 내의 갈등은 노사 간 갈등에 그치지 않는다. ‘경영혁신 활동에 협조하면 어용’이라는 노노 간의 선명성 경쟁은 혁신 활동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장막과도 같다. 화학업체 Y사의 경우 지난 2001년 노동조합의 반대로 무마됐던 분임조 활동이 최근 다시 추진되고 있다.

이 회사 노동조합 김모 위원장은 “선거 시기를 앞두고 분임조 활동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노동조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며 “ 자신의 노동에 관심을 갖고 창의적 노동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경영혁신 활동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간의 혁신 활동에 대한 불신이 워낙 깊은 데다 조합원 눈치보기로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다”고 전했다.
이처럼 작업 현장 내의 노사 간 노노 간 역학관계와 갈등은 경영혁신 활동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지만 혁신 활동에서 이를 고려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림대 사회학과 박준식 교수는 “대립적 노사관계의 토대 속에서 형성된 작업장 노사관계가 경영혁신 운동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며 “우리나라 특유의 작업장 노사관계와 현장 내 역학관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 현장으로부터의 혁신을 외치는 어떤 기법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