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잡기'
'자리 잡기'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0.07.13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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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것에 대해 궁금할 때면

▲ 박종훈 jhpark@laborplus.co.kr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극장 나들이를 나섰습니다. 마침 보려던 게 흥행하고 있다는 얘기를 별로 듣지 못해서 예매 없이 그냥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주말 오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찾았는지 맘에 드는 좋은 자리는 이미 표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통로 쪽이 좀 한적하겠지'하는 생각에 오른편 구석 자리에 앉았는데, 스크린이 작아서 두 시간 가까이 영화를 보고 나니 목이 결릴 지경이더군요.  

요새 극장에서 영화표를 끊다보면 직원이 좌석배치도를 모니터에 띄워 놓고 휙 돌려 보여주며 원하는 자리를 선택하게 합니다. 그럴때 능숙하게 좋은 자리를 척척 골라줘야 매표하는 직원도 일이 좀 수월할텐데, 자기만의 원칙이 없어서 그런지 저는 매번 잠시 고민하게 됩니다.

영화보다 조금 더 비싼(?) 공연을 볼라치면 고민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봤자 제일 값싼 좌석 중에 고르는 거지만 경험 많은 사람들에게 '어느 자리가 소리가 좋으냐'고 물어보는 등 난리를 핍니다. 확실히 영화나 공연을 볼 때 좋은 자리를 잡는 것은 노하우가 필요합니다.

어느 장소에 가든 화장실과 인접한 자리는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화장실 바로 옆 테이블이 최고의 상석으로 취급되는 장소도 있습니다. 유흥 문화에 빠삭한 모 씨의 설명에 따르면 나이트클럽에서는 여자화장실 바로 옆 테이블이 가장 좋은(?) 자리랍니다.

약간 부연이 필요할꺼 같은데,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던 여자손님들은 한 곡 끝날 때마다 화장을 고치기 위해 화장실에 들르고 그때마다 기다리던 웨이터들이 손목을 낚아채 이른바 '부킹' 테이블로 안내한답니다. 그러니 화장실 바로 옆 테이블은 부킹이 빈번할 수 밖에요. 여자화장실과 스테이지를 기준으로 주요 통로를 따라 늘어선 테이블이 이른바 '골든 웨이'이고 이런 좌석에 앉기 위해선 웨이터와 안면을 터 놓거나 팁을 좀 찔러줘야 한답니다.

취재를 위해 집회나 기자회견 장소를 다니다보면 '여기 참 자리 잘 잡았네'라고 생각이 드는 날이 있습니다. 반면 시끄럽고 차도 많이 다니고 협소한 데다 뙤약볕이 내리쬐는데 그늘 한 점 없는 장소라면, 사회자가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열심히 애써도 어쩐지 분위기가 어수선합니다.

'자리 잡기'를 잘 하려면 눈치도 빨라야하고 행동도 잽싸야하고, 뻔뻔함도 적당히 필요하고 때로는 '반드시 그 자리를 쟁취하겠다'는 왕성한 투쟁심도 필요합니다. 강원도의 조용한 도시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저는 서울에서 꽤 스트레스가 심했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물론이고 북적이는 거리를 걸을 때도 자리를 잘 잡는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가끔 고향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곧잘 자리 잡는 것에 대해 얘기합니다.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는 등, 어떤 일정한 틀에 우리 삶을 안착시키는 것을 흔히 자리 잡는다고 표현합니다. 고향에 남은 친구들을 지켜보면 확실히 타향살이하는 부류보다 훨씬 빨리 자리를 잡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아무래도 무지막지한 '집값'의 차이가 관건입니다.

때문에 고향의 부모님들께선 표현을 안하셔도 내심 걱정이 많으십니다. 짧은 사회 경험이지만 갑자기 이직을 단행하는 등, 부모님 세대의 눈엔 '자리 못 잡는 녀석'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인이 생길 때마다 그때그때 꽤나 상세히 보고(?) 드리는 편이기 때문에 이 여자 저 여자 줏대없이 만나고 다니는 놈으로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선조치하고 보고를 드릴까 계획입니다.

두서없이 얘기를 늘어놓았는데, 사실 자리 잡는 것은 제 또래들의 큰 고민 중 하나입니다. 세상은 참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자리 잡으려고 사는건가, 살려고 자리를 잡는건가' 라는 식의 존재적(ontisch) 의문은 몽땅 하릴없는 놈의 망상으로 취급됩니다.

자리를 잡고 잘 사는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눌라치면 항상 '돈 버는' 얘기로 빠지게 됩니다. 일단 벌이가 넉넉하고 금전적으로 좀 모아둬야 자리를 잡든 훌쩍 떠나든 가능하다는 게 많은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한동안 반항심에 돈을 안 벌고 잘 사는 것에 대해서 열심히 궁리해봤지만 저 역시 별 뾰족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자리 잡는 방법'에 대한 궁리는 발전적인 고민이라고 높이 평가받는가 하면, '자리 잡는 것 자체에 대한 의문'은 루저(loser)들의 자기합리화 쯤으로 멸시받나 봅니다. 저 역시 중간에 궁리를 그만뒀으니 어떤게 맞는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살다보니 궁금했을 뿐인데 말이죠. 루저니 망상이니 취급이나 당하고...

그런데 정말, 누구나 팍팍하게 살아가다 보면 한번쯤 문득 궁금해지기도 할텐데 말이지요. '돈을 벌려고 사는건지, 살려고 돈을 버는건지', '집을 사기 위해 살고 있는건지, 살려고 집을 사는건지'.

모두들 자리 잘 잡고 사시는지요?

박종훈의 테아트룸(Theatrum) 

테아트룸(Theatrum)은 라틴어로 극장을 의미한다. '극장'은 모든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