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전쟁, 장기분규 사업장
끝나지 않는 전쟁, 장기분규 사업장
  • 성지은 기자
  • 승인 2005.10.10 00:00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악덕사업주’ ‘막무가내 노조’ 진실게임

"끝까지 가겠다"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하니 미칠 노릇 아니냐”
구사대와의 몸싸움, 폭언과 감시, 고소와 고발이 끊임없이 새로 터진다. 더 이상 말도 필요 없고 투쟁과 와해의 가운데서 노사가 벌이는 줄다리기. 양 측 모두 ‘승리’만이 이 긴 싸움을 끝낼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마주 앉는 것조차 이제 지긋지긋하다는 장기투쟁사업장 노·사 얽히고설킨 그들의 갈등은 갈수록 거대해지고 있다.




끊이지 않는 갈등, 풀리지 않는 관계

흥국생명_ 최근 ‘전 직원 비정규직화’ 계획 문건이 노동조합에 의해 해킹되고, 이같은 내용이 드러나면서 논란을 빚고 있는 흥국생명보험 노사(대표이사 유석기, 노조위원장 홍석표)의 줄다리기는 지난 2000년 사측이 노동조합 탈퇴를 강요한다며 촉발된 노동조합과 회사 간의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2003년 5월 112일간의 파업을 비롯해 최근까지 끊임없이 마찰을 빚어오고 있는 흥국생명노조는 현재 파업 중인 노조간부의 손배·가압류와 파업참가자 부당징계, 연봉제 일방 강행 등의 문제를 제기하며 회사의 일방적인 노조 탄압에 ‘절대 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해태제과_ 해태제과 노사(대표이사 윤영달, 노조위원장 공호찬)는 지난해 11월 노동조합(생산직 제외한 직원 대상)이 설립된 이후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진행되어오던 단체교섭 조정이 결렬되면서 70여 일간의 파업을 해 오고 있다.
크라운제과와 해태제과의 합병 이후, 크라운제과의 윤영달 회장이 취임하면서 해태제과노동조합은 윤 회장이 취임 이후 ‘임직원에 대한 3년 고용보장’ 약속을 파기하고 해고조치한 후 임금체불과 노동조합활동 방해, 부당노동행위들을 자행했다고 주장하며 3개월 동안 파업을 계속하고 있다.
‘경영진을 더 이상 믿지 못 하겠다’고 하는 노동조합과 ‘노조가 일방적 주장을 펼치면서 회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회사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가운데 회사측은 2005년 9월 6일 16시부로 서울 남영동 본사 사옥 및 각 영업소에 대하여 파업조합원을 대상으로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이에 따라 노동조합은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를 고발하고 비리사실 폭로, 크라운제과 제품 불매운동을 진행하며 투쟁의 수위를 높여갈 계획이다.

호텔리베라_ 유성호텔리베라 노사(대표이사 정용하, 노조위원장 박홍규)는 노동탄압과 부당노동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대표적인 장기분규 사업장으로 꼽힌다. 2001년 신안그룹이 호텔리베라를 인수하면서 시작된 노사갈등은 조합 간부 및 조합원들의 부적격 인사이동과 부당노동행위 등으로 끊임없이 문제가 이어져 왔다.
2003년 12월, 지방노동청장의 중재를 통해 노조가 회사 복귀를 했지만 2004년 12월, 회사는 인수 3년 만에 폐업을 단행했고, 현재 대전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위장폐업이 인정됐지만 현재까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코오롱_ 코오롱 구미공장(대표이사 한광희, 노조위원장 최일배)의 경우는 합의를 통한 고용보장이 지켜지지 않으면서 갈등이 촉발됐다. 구조조정으로 인한 조합원들의 정리해고가 단행되자, 노동조합은 합의사항 전면 무효를 선언하고 현재까지 투쟁 중이다.
또한 지난해 9월 코오롱캐피탈의 자금횡령 사건에 이어 250억 원을 코오롱에서 부담한다는 말이 나오면서 노사 간 불신이 깊어졌다. 코오롱노동조합과 회사 간 고용을 위해 노동조합은 임금 삭감안을 제시하고 협상을 시도했지만 현재까지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_ 하이텍알씨디코리아(대표이사 박홍서, 노조위원장 김혜진)는 13명의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CCTV감시와 폭언, 노조 탄압 및 부당노동행위 등에 대한 노사갈등이 이어져 오면서 노동조합은 4년간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와 함께 최근 ‘전 조합원 정신질환 발병’에 대한 산재 신청이 불승인되면서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투쟁을 벌이고 있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노동조합은 조합원 13명 전원이 노조 탄압과 부당노동행위로 인해 ‘우울증을 수반한 정신장애’판정을 받았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다.
노동계는 ‘노동조합 탄압으로 인한 재해’ 불인정에 반발, 상급단체인 금속연맹과 시민단체 등과 공대위를 구성해 함께 대응하고 있으며 지난 9월 16일 근로복지공단의 불승인 판정을 받으면서 움직임이 더욱 거세지고 있는 상태다.

악덕사업주 VS 막무가내 노조

장기분규 사업장은 결국 노사의 신뢰가 깨질 대로 깨져 협상의 여지가 없이 서로 줄다리기를 지속하면서 발생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감에서 장기분규 사업장인 기륭전자, 신세계 이마트 등의 내용을 다룰 예정인 단병호 의원은 “결국 사용자들의 부당노동행위가 문제”라며 “노동부에서 단속을 철저히 해야 하는데, 하더라도 솜방망이인 노동부의 단속은 이미 무의미해졌다”고 지적했다.

반면 경총 노사대책팀 남용우 팀장은 “비정상적인 부분이 걷혀야 한다. 즉 불법이 횡행하지 않는 가운데에서 타협이든, 힘겨루기든 진행되야 한다”며 법적인 면에서의 정확성을 강조했다.
이는 한편으로, 단위사업장에서 타협과 조율이 불가능할 경우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외에 실행되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하이텍공대위의 자문을 맡고 있는 노무법인 참터의 유성규 노무사는 “우리나라 노동행정 시스템이 다분히 구시대적”이라며 “잘못하면 처벌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하는 일제시대적인 발상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옳고 그름을 가리기 전에 시행되어야 하는 ‘조정’과 ‘중재’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다 다르지만 결국 다 같다

장기분규 사업장은 해가 갈수록 늘고 있지만 발생되는 문제는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노동계는 구조조정과 M&A를 둘러싼 고용문제가 기업의 생존과 직결이 되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힘의 불균형’과 ‘법 적용의 형평성’에서 문제가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대기업의 경우 노사 간 자율 조정이 불가능할 때 상급단체의 조정 등 후속 조정이 이루어지며 노동조합의 조합원 수가 많을 때에는 회사도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 노사관계의 해결 시스템이다. 이것은 사회적 책무를 지니고 있는 노동조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반면 하이텍알씨디코리아의 경우 13명의 조합원이 긴 투쟁을 하고 있지만 회사는 노동위원회의 중재나 복직 판결을 시행하고 있지 않다.
이렇듯 소규모 사업장의 경우 ‘무시’가 ‘타협’보다 쉽고, 직장폐쇄가 ‘협상’보다 이익인 경우에 조정이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긴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유성규 노무사는 “노동조합 초기의 노조 진압형태나 노조원의 수가 감소한 경우, 임단협이나 노조 탄압이 장기투쟁 사업장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다수”라며 “사업장이 갖는 질적인 피해는 크지 않은 반면 상대적으로 노동자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명백한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처벌과 원칙적인 법질서의 확립은 장기분규 사업장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사후적 측면에서 떠안는 리스크는 특히나 열악한 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원론적으로 ‘악덕’기업주라고 하는 장기투쟁 사업장의 경우 노사관계에 대한 의식이 없거나 회사에 부담이 생기더라도 노조 설립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 낫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유성규 노무사는 “현재, 상장기업에 대한 노무관계 진단이 다분히 형식적이고, 기업주를 상대로 한 노사관계 교육 또한 일부 신청 사업장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새로 진출하는 기업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재 장기투쟁 사업장 문제는 정부의 조정과 심판에 대한 권위와 신뢰가 바닥을 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억울한 노동자와 등을 돌린 사업주, 그리고 손 쓸 수 없는 정부의 삼박자가 낳은 장기분규 사업장.
이제, 쳇바퀴 돌듯 계속해서 제기되는 폭로와 좌절, 벼랑 끝 대응을 넘어 노사관계에 대한 인식의 향상과 신뢰를 통한 근본적인 대안 마련이 제시되어야 할 때다.